‘상식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이야기한다.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그것을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한 속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상식이
이념화되는 세상이 그래도 더 건강하다고 정당화 할 것인지, 아니면 상식 자체가 이념화될 수 없음을 논증할 것인지. 오래 걸릴
일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런 거대 담론을 논하기엔 내 능력이 벅차고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원래 혜강의 책을 읽고 유비했던 유기체와 상식에 대한 글과 프리고진을 읽고 추론했던 ‘상식의 좁은 길’을 엮은 것이라 연결점이 조금 불안하다. 이해하고-만약 읽으신다면- 봐주시길 부탁드린다.
지금 몇 년전에 썼던 이 글에 한 가지를 더하라면 역사를 이끌어가는 모순된 두 힘이다. 절대로 화해하는 법이 없는 그 두 힘의
갈등이 상식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상사회 따위는 없고 바로 여기 이곳에서 인간의 두뇌가 허락하는 수십년 평생을 잘 사는 것
이외에 내가 대답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하튼 좋은 것을 배웠다.
혜강의 사유체계를 특징지우는 단 한마디의 단어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상식 Common sense”이라는 한마디를 고를 것이다. 혜강의 모든 사유체계는 철저하게 이 상식이라는 건강성에 의하여 관통되고 있다. 인류의 진리의 역사는 상식의 역사다. 그러나 이 상식은 역사적으로 演變(연변)한다. 혜강이 19세기 중엽에 한양에서 도달한 상식의 구조는 오늘날 서구라파 문명이 고전물리학, 현대과학의 눈부신 성과를 거치면서 도달한 이성주의의 최첨단의 상식의 구조를 능가하는 상식의 구조를 과시하고 있다. 도올 김용옥
깨어나 먹고 마시고 놀고 일하고 싸고 자는 행위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예술과 학문, 또는 다른 인류가 구성해 놓은 문화적 유산들 속에 몰입한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고 식량을 비축하게 된 후 폭발한 이러한 여가활동들은 가끔 인간이라는 종을 다른 종보다 우위에 세우게 만드는 이미지에 일조한다. 그러나 학문과 예술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거렌쩌가 자주 예로 드는 것처럼 택시기사에게 수긍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어떤 학문적 진리도 의미를 상실한다.
학문이 일상생활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부분에서 역사적 고려가 요구된다. 학문적 진리가 일상생활과 괴리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류가 걸어 온 역사적 발자취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란 쓰여진 기록만이 아니다. 쓰여진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쓰여지지 않은 진화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가 과거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과거 없이 현재는 없다. 현재의 인류가 가진 지적 수준이 한없이 높아 보일지라도 그러한 수준이 어떠한 역사적 기반을 가지고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다면 우리는 쉽게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착각 속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언명들이 도출된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인류의 지적 사고능력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신석기 혁명이라는, 인류에게 여유를 선물한 그 혁명 위에서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 ‘여유롭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에 대한 접근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인류의 두뇌가 진화한 역사적 관점을 고려하지 않고 연구되는 모든 의식에 대한 이론은 무효다. 우리는 의식하기 위해 진화하지 않았다. 우리 조상이 진화한 2백만 년이라는 시간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깨어나 먹고 마시고 놀고 일하고 싸고 자기 위해 진화했다. 이 말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진화를 유도한 것으로 오해 될 여지가 있으므로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의 의식이라는 것도 결국 다른 개체보다 조금 더 쉽게 깨어나 먹고 마시고 놀고 일하고 싸고 자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 고상하게 포장되어 인간에게 유일하고 인간을 여타 종들과 구분시켜준다고 여겨지는 의식이라는 것도 이처럼 역사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깨어나 먹고 마시고 놀고 일하고 싸고 자는 일상생활과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학문은 모두 일상생활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일상생활속의 그 무엇을 상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상식은 정의 될 수 없다. 그러나 상식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상식이라는 말은 철학자들에 의해 사용되기 이미 오래전부터 평범한 생활인들에 의해 사용되는 의미로 우리의 언어체계 속에 남아 있었다. 오히려 철학자들은 상식의 의미를 변질시켰다. 상식의 철학은 단지 소박한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때로는 과감한 그 무엇이다. 이미 언급했듯 상식은 정의하기 힘들다. 따라서 두 명의 역사적 인물 속에서 상식의 희미한 자취를 찾아볼 것이다. 한 사람은 150년 전 이 땅에서 태어나 읽고 쓰던 학자이며 한 사람은 2003년 작고한 유럽의 과학자이다. 혜강 최한기와 일리야 프리고진이라는 두 인물 속에서 우리는 상식의 일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혜강은 이제 이 땅에서 꽤나 유명인사 대열에 끼어 있다. 학문한다는 사람치고 혜강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혜강에게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부분에 서게 되면 우리는 엄청난 어리석음을 목도한다. 혜강을 통해 통합과학으로서의 기학을 논하는 사람들과 혜강의 텍스트에 파묻힌 이들 외에 우리에겐 혜강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전혀 없다. 정말 혜강은 그 텍스트로만, 기학이라는 사유구조로만 우리에게 가치 있는 인물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혜강을 읽는 다는 것은 혜강의 학문의 구조를 배운다거나, 조선말 혜강의 <기학>이 가지는 근대적 의미 따위를 아는 것이 아니다. 혜강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미는 혜강이 학문했던 자세, 바로 그것이다. 혜강의 학문적 방법론과 자세를 제외하면 혜강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혜강을 둘로 나눌 것이다. 혜강은 ‘역사적 historical 혜강’과 ‘비역사적 ahistorical 혜강’으로 나눌 수 있다. ‘역사적 혜강’은 또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혜강의 텍스트속에서 통시적으로 존재하는, 즉 현재의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부분을 ‘의미론적 혜강’이라 한다면, 혜강의 텍스트를 포함해서 그가 살아간 자세 전반이 그의 학문적 배경 속에서 드러나는 부분은 ‘방법론적 혜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상가가 이와 같이 구별될 수 있다. 하지만 혜강이 이러한 구분 속에서 위대해 지는 것은 ‘방법론적 혜강’속에서 상식이 찾아지기 때문이다. 혜강에게서 우리는 상식이 생명의 발생과정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배운다. 상식은 유기체와 같다. 닫힌계는 생명을 품지 못한다. 열린계 속에서 생명은 그 의미를 획득한다. 상식을 열린계 속의 유기체에 유추할 때 혜강의 사유체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혜강은 열린 사람이었다. 물론 서구라파의 거센 바람 속에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왕정중심의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개벽의 입김을 혜강에게서 찾기는 어렵다. 혜강은 수운과 같은 혁명가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혜강은 상황성과 합리성으로 뭉친 사상가로 충분히 이야기 될 수 있다. 혜강은 서구의 두 가지 지적전통인 과학문명과 기독교를 택일해서 받아들일 줄 아는 선각자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서구의 과학문명이 일군 성과들이 實한 전통의 氣론과 합치하는 면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나, 기독교와 이슬람은 불교와 도교와 마찬가지로 虛한 학문으로 규정하고 배척했다. 서구의 지적전통을 직수입해서 그 사상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의심 없이 따르는 현재의 인문학자들과 혜강은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다르다. 혜강은 무조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시각 속에서 부조리를 타파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찾아나간 위대한 우리의 지적 전통이다. 혜강이 찾아나간 이러한 열린 마음은 유기체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과 유사하다. 유전체의 제한속에서 끊임없이 환경에 적응하고 또 환경을 바꾸어 나가는 능력이야말로 유기체의 특성이다. ‘방법론적 혜강’이 보여주는 상식의 구조는 이러한 유기체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혜강은, 혜강의 <기학>은 텍스트 속이 아니라 컨텍스트속에서, 공시적 맥락이 아니라 통시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변화되어 이해될 수 있다. 혜강의 <기학>은 현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 우주론 따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세로서 기여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혜강의 <기학>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기학의 구조가 아니라 혜강의 학문의 자세일 뿐이다. 현재 역사학자들과 인문학자들에 의해 유행하고 있는 혜강에 대한 인식속에서 혜강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로만 머물고 있을 뿐, ‘혜강정신’은 실종되어 있다. ‘혜강정신’이란 혜강이 우리에게 제시한 학문방법론이다. 학자로서의 끝없는 열린 자세와 역사인식, 그리고 상식을 기반으로 한 현실적 학문으로서의 기학은 실종되고 혜강의 기학이 현대에도 적용될 수는 없는가라는 쓰레기 같은 질문들과, 혜강 텍스트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만이 공허하게 난무하고 있을 뿐이라는 이 비극적인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혜강이 보여주는 상식의 구조는 <기학>속에 드러나는, 누구도 인용하지 않았던 다음 구절 속에서 분명해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미치지 못한 다른 사물의 성실한 (진리의) 측면을 들어, 나의 기학에 첨가하고, 또 그것의 증험하는 바의 보편성이 나의 기학을 능가하고, 또 구체적 사례들에 적용함에 있어 나의 기학을 뛰어넘는 바가 있어, 그것을 천하에 밝힌다면 나의 기학은 폐지될 수 있는 것이다.
혜강을 통해 우리는 상식의 구조가 유기체의 역동성에 유추될 수 있음을 알았다. 이에 더해 벨기에의 물리화학자 프리고진은 상식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프리고진이 보여주는 상식의 단면을 간단히 정리하고 프리고진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에게 호불호 好不好의 외침은 쉽다. 제 아무리 탄탄한 기반위에 쌓인 이론과 사상일지라도 호불호의 외침은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쉬운 길에 대항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어쩌면 침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침묵의 합리성’은 상황 선택적이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합리적인 선택은 없다. 모든 선택은 환경문맥에 의해 합리성을 획득한다.
상식은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한 솔직한 느낌이다. 우리의 경험은 진화적 역사 속에서 적응되어온 마음을 거쳐 해석되고 발현된다. 진화를 다양성의 증가로 본다면 마음의 다양성은 일상경험 속에 존재하는 상식을 위협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진화적 다양성은 무작위적 발산이 아니다. 다양성은 진화적 제한 속에서만 기능한다. 우리의 마음은 진화심리학만큼의 공통점과 행동유전학만큼의 다양성 속에 존재하는 스펙트럼이다. 진화적 다양성은 차이와 유사를 넘어서는 어떤 개념이다. 그 개념은 상황적 맥락의 고려를 포함한다. 그러나 호불호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미 마음속에 형성된 규범으로 모든 상황적 가능성을 무시한다. 규범에 지배되는 호불호는 따라서 상식의 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식적 삶이란 호불호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호불호를 넘어서는 가장 상식적인 방법은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결론을 가지고 어떤 사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그 결론이 도출된 과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조과학은 나쁘다’라는 명제는 성립될 수 없다. 그것이 왜 나쁜지, 왜 과학이 아닌지에 대한 근거가 분석적으로 제시될 때 ‘창조과학은 나쁘다’라는 명제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근거의 제시는 판단을 요구한다. 판단은 우리의 적응된 마음과 환경문맥에 의해 결정된다. 판단을 진화적 역사라는 모호한 실체에 넘겨버리는 것은 무책임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다. 적어도 이러한 방법론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인간의 마음을 완벽한 합리적 존재로 가정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다. 고전역학의 세계관과 닿아 있는 이러한 이성의 합리성에 대한 추구는 마음의 역사성을 발견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진화론은 모든 세계관에 역사성을 부여하면서 변화를 유도하고 있는 사상이다.
즉, 프리고진이 드러내고 있는 상식의 구조는 유기체가 가진 역동성이 아닌 ‘제한’이다. 우리가 최한기의 상식으로부터 유기체의 역동성을 배웠면 프리고진으로부터는 제한이라는, 유기체가 지닌 또 다른 측면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제 프리고진이라는 인물의 삶과 그의 저작을 통해 그가 보여준 상식의 구조를 조금 더 상세하게 파악해 보도록 하자.
프리고진은 브뤼셀의 열역학 그룹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형성했다. 클라우지우스로부터 시작되는 열역학의 학문적 전통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혁명기에도 이들과 통합되지 않은 채로 다른 세계관 속에서 발전하고 있었다. 열역학적 세계관과 물리학적 세계관은 ‘시간패러독스’로 불리는 문제에서 충돌한다. 시간패러독스란 시간의 화살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즉 과거와 미래는 서로 같은 역할을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세계관의 차이가 시간패러독스의 핵심이다. 아인슈타인은 종종 ‘시간은 환상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이전에 이미 다윈은 생물 종에서 시간의 화살을 발견했다. 다윈의 진화론에 감명 받은 통계역학의 건설자 볼츠만은 자신의 이론 속에서 시간의 화살을 정당화하고자 노력했지만 그의 이론은 이미 시간 대칭적인 틀 속에서 짜여진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볼츠만은 자신의 이론 속에서 시간비가역성을 발견할 수 없었고 푸앵카레와 로슈미트 등의 반론에 부딪혀 자살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이론과 세계관사이의 갈등 때문에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신경쇠약증으로 인한 자살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볼츠만은 물리학에서 시간의 화살을 발견하지 못했다. 프리고진을 사로잡은 문제는 볼츠만에게 갈등을 유발한 바로 그 문제, 시간의 비가역성문제였다. 프리고진은 평생을 시간의 화살을 발견하기 위해 살았다. 열역학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그에게, 게다가 문사철을 포함한 폭넓은 관심분야를 가진 그에게 이러한 상이한 세계관은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프리고진은 자신이 발견한 소산구조 dissipative structure를 기초로 비평형열역학을 건설했다. 이제 대중에게 너무나 친숙한 자기조직화 self-organization이나 창발성 emergence, 카오스 chaos등의 개념의 건설자 중 한명인 프리고진은, 그러나 많은 인문학자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포스트모던한 사상가가 아니다. 프리고진은 프리초프 카프라처럼 새로운 물리학의 결론을 동양철학에 끼워 맞추지 않는다.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질문 “추상화가와 우수한 이론 물리학자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추상화가는 가능한 한 독창적인 경향이 있어야 하지만, 우수한 이론 물리학자는 가능한 한 보수적이라야만 한다. <확실성의 종말, 제 7장 자연과의 대화>
‘보수’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프리고진이 말하는 ‘보수’는 여러분과 내가 공감하며 진저리를 치는 대한민국의 그러한 보수가 아니다.
프리고진은 말년에 <확실성의 종말>을 저술하면서 고전역학, 양자역학, 상대성 이론, 그리고 대폭발 이론 모두에서 시간의 비가역성을 증명하려는 야심에 찬 시도를 기획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보수’의 의미가 드러난다. 프리고진이 속해 있던 학문적 전통은 비록 열역학이었지만 그의 세계관은 카오스 이론의 선구자들이나 복잡계 이론의 선구자들과 동질의 것이었다. 프리고진은 기상학자 로렌츠로부터 시작된 카오스 이론가들의 그룹 속에서 만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리학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 분명히 못 박을 수는 없지만 카오스 이론과 복잡계 이론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과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로렌츠를 비롯한 물리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소외된 일단의 과학자들이 있었고 이들에 의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복잡계 이론이 탄생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프리고진의 위치는 매우 미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그가 속한 브뤼셀의 열역학 그룹은 적어도 물리학에서 비주류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의 선배들이 일구어 놓은 물리학적 전통을 자신의 발견 속에서 정당화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프리고진은 이러한 갈등을 가능한 한 보수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제임스 글레익의 말에 따르면 종교집단과 비슷했던 초기 카오스 연구자들과는 다르게 프리고진은 물리학의 전통에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 언급했던 ‘침묵의 합리성이 상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단적인 예다. 어떤 때에 침묵은 비합리적이다.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에 이르는 모든 이론에서 시간의 화살을 발견하고자 했던 프리고진의 노력이 현재 모두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너무 과도한 욕심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문제를 해결해 나간 그 방식이다. 이미 위에서 그러한 방식을 ‘보수’라고 말한 바 있다. 이미 앞에서 이에 대한 해명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많은 이들의 오해를 덜기 위해 프리고진이 말하는 ‘보수’를 어설프게나마 규정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프리고진이 말하는 ‘보수’는 다음과 같은 말들과 맥락이 일치한다.
정정당당함, 용기, 성실, 그리고 좁은 길.
프리고진의 ‘보수’는 ‘좁은 길’이다. ‘좁은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다. 프리고진은 가치와 사실이 충돌하는 갈등구조 속에서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쉬운 길을 선택한다는 것을 보았다. 역사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그는 일상적 삶 속에서 경험하는 상식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고, 아무리 정교한 물리학적 이론이라고 해도 이러한 상식적 삶과 갈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가 일상적 경험에 충실한 과학자였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 속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시간의 화살을 확립하게 되면 자연의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인 통일성과 다양성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의 화살이 우주의 모든 부분에 공통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통일성이 나타난다. 당신의 미래가 바로 나의 미래에 해당하고, 태양의 미래는 다른 별들의 미래에 해당한다. 다양성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방안에 들어 있는 어느 정도 열적 평형에 가까이 있고, 분자 수준의 무질서 상태에 있는 기체의 혼합물인 공기에서 찾을 수 있다. 방안에는 나의 집사람이 마련해 준 아름다운 꽃꽂이도 있다. 꽃꽂이는 시간에 따른, 비가역적인, 비평형 과정의 덕분으로 평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도로 조직화된 대상이다. 이 같은 시간의 긍정적인 역할을 고려하지 못하는 자연 법칙은 절대로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확실성의 종말, 제 1장 에피쿠로스의 딜레마>
그는 자신이 매일 경험하는 일상과 자신이 발견한 이론을 합치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은 보수와 진보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그 문맥 속에서의 보수와 진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의 샛길이다. 프리고진은 이러한 좁은 길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소외를 가져온 두 가지 개념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좁은 길이다. 새로움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법칙에 지배되는 세상의 개념과,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으로 상징되는 아무것도 이해할 것이 없는 괴상하고 인과성도 없는 세상의 개념 사이에 있는 좁은 길을 찾는 것이다. <확실성의 종말, 제 9장 좁은 길>
프리고진이 제시하는 이러한 좁은 길을 창조성과 집단적 노력, 즉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갈등이 아니다. 창조성은 집단적 노력이라는 구속에 의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문제의 답이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엄정한 기준과 요구 조건을 만족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구속 조건이 창조성을 배제하는 것이며 오히려 창조성에게는 도전이 된다. <확실성의 종말, 제 9장 좁은 길>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프리고진은 시간의 화살을 발견하기 위해 새로운 물리적 개념과 수학적 도구를 개발한다. 그의 말처럼 “시간 패러독스는 단순히 상식에 호소하거나 동력학 법칙의 임시방편적인 수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프리고진의 결론은 현재 우리의 학문풍토를 돌아보았을 때 많은 것을 말해준다. 심지어 이런 좁은 길을 걸어온 프리고진마저도 왜곡 해석하는 가벼운 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학문방법이 프리고진이 강조하는 좁은 길과는 완벽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프리고진의 전일적 세계관이 구미에 맞는다는 이유로 프리고진을 자신들의 숭배자로 만드는 것이다. 프리고진이 보수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일상경험 속에서 기능하는 상식이 발산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리도 최한기와 그를 왜곡하는 현대 최한기 숭배자들의 구도와 똑같은지 모르겠다. 사상의 창시자와 이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발산도 상식의 좁은 길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예수와 바울, 화이트헤드와 국내의 신학자들, 도킨스와 로버트 엉거, 굴드와 국내의 과학사회학자들 등등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일상을 포기하고 관념의 유희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홉스의 말처럼 “진정한 지식을 열망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제까지의 저술가들의 정의들을 검토하고, 그것들이 소홀하게 규정되어 있으면 정정하며 또는 자신이 정의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홉스 리바이어던, 제 4장 언어에 대하여>” 상식은 좁은 길이고 발산하기 쉬운 혼돈의 가장자리 속에 있다. 그러나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명이 안정성을 획득하듯이 상식은 살아 있으면서 역동적인 안정성을 획득한다. 한 과학자가 발견한 사실과 이로부터 유도되는 사상적 결론이 이처럼 일치한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다.
이제 프리고진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개념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좁은 길’이다. 프리고진이 말하는 좁은 길이라는 화두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엄청나다. 좁은 길은 일상생활 속에서는 상대방과의 대화 속에서 이념이나 호불호에 구속받지 않고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과학과 타분야의 갈등을 다룰 때에는 이념과 종교에 구애 받지 않는 방식으로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과정 속에 기능하는 철학이다. 이것이 상황윤리학이 말하는 윤리학의 좁은 길이고, 환경문맥을 고려하는 제한된 합리성이 추구하는 것이다.
상식적 삶은 좁은 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것이 좁은 길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창조적 소수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식의 자기 정당화나 우월의식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프리메이슨과 음모론이 상식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혜강정신을 관통하는 유기체적인 상식이 좁게 나 있는 길임을 발견한다. 상식은 제한 속에서 기능하는 열린 마음이다. 그것은 어렵고 고달픈 작업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작업을 쉽게 일탈한다. 이것은 과학정신도 아니고 합리적 이성도 아니며 광신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을 ‘상식의 좁은 길’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제한과 역동성이라는 모순 되어 보이는 단어가 유기체라는 유비를 통해 상식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에 더해 혜강과 프리고진이라는 두 사상가를 함께 고찰했을 때 나타나는 상식의 특성은 바로 동서양을 가로질러 존재하는 일관성이다. 상식이란 서구의 합리성속에서만 나타나는 특성도 아니고, 동양의 합정리성 속에서만 나타나는 특성도 아니다. 서로 다른 문화권 속에서 끊임없이 일상세계에 관심을 가진 사상가들의 사상이 수렴되어 나타난다는 이 사실은 상식의 보편성과 함께 시대정신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일 것이다.
대한민국엔 학풍이 없다고들 한다. 학풍이라는 것도 유기체에 유추했을 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 학풍이 없는 이유는 한국의 학문이 너무나 열려 있기 때문이며 너무나 열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속의 모순은 실은 모순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학문은 사대주의라는 키워드 속에서는 너무나 열려 있고, 주체성이라는 키워드 속에서는 너무나 닫혀 있다.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서는 학풍이 출현할 수 없다. 혜강이라는 인물을 비역사적으로 해석해서 현대의 상황에 맞지도 않는 ‘통합과학으로서의 기학‘을 외치는 것은 학풍의 건설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융합과학이 유행한다고 해서 학제는 제대로 뜯어고치지도 않은 채 연구비만을 지원받을 속셈으로 떠들어대는 학제간 연구라는 구호도 학풍의 건설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방법론적 혜강‘, ’방법론적 프리고진‘속에서 우리의 학풍을 건설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리고진의 학문적 보수성과 그가 우리에게 말해준 학문적 제한에 혜강의 열린 자세를 더한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조금은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