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만인에 평등하지 않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이다. 요즘의 초등학생들은 과감하게 대통령을 욕할 정도로 사회의 부조리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도올은 헌법조차 국민의 함성 아래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정직하고 법치주의의 기원을 잘 아는 학자들은 법이 국민의 상단부에 존재하는 구조가 가장 최악의 상황임을 알고 있다. 법이란 인간사회에서 등장하는 이해의 갈등, 죄수의딜레마 등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최소한의 규제였고, 또 그래야 한다. 만일 법을 통해 모든 것을 규제하려 한다면 그 사회는 스스로가 친 거미줄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는 거미와 같은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법치주의의 기원이 무엇인지, 과연 모든 것을 법으로 푸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외치는 법치주의의 목표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더구나 진보주의자들에게서도 법에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 의존성을 볼 수 있는 요즈음 과연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도그마의 수호가 중요한 문제인지, ‘법은 만능이 아니다’라는 소소한 진리의 확산이 중요한 문제인지 결정할 때가 아닌가 한다.
언제나 광복절이면 사면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운데도 이 지겨운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그 악순환의 고리에 놓인 끈은 ‘권력의 고리’라는 보이지 않는 부패의 구조다. 대기업의 경영진을 언제든 맘만 먹으면 감옥으로 보낼 수 있는 권력은 국민들의 불만과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저울질하며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장난을 치고 있다. 언제나 대기업 총수들이 재판을 받고 실형을 산다는 것은 일종의 상징 이상이 아니다. 그들은 상징적으로 감옥에 들어가며, 권력은 그것으로 자신들이 국민과 돈줄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했다고 위안한다.
따라서 권력의 이해 당사자에게 사면권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될 수 없는 현실에서 정경유착이 누가나 알고 있는, 하지만 국가의 발전을 위해 용인되는 현실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인에게 사면권이 있다는 것은 진정한 오류다. 적어도 사면의 결정은 국민에게 돌아가야 옳다. 입법, 사법, 행정 누구도 사면이라는 권리를 국민에게서 원리적으로 빼앗아 갈 수 없다. 용서는 국민이 하는 것이다.
국민투표가 어렵다면 적어도 국가인권위나 이익과는 상관없이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관에 사면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치적 사면이라고 의심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적어도 우리가 도덕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관이 이를 심사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나아가 ‘덕불고 필유린’이라는 상식을 살필 필요가 있다. 아니면 적어도 법의 적용에 있어 사회적인 양극화가 진행중인 이 사태를 막아야만 한다.
아니면 차라기 행정부는 사면의 목록만을 제출하고 이를 여론조사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돈만 있으면 죄가 죄가 아니게 되는 사회에서는 언제고 반드시 폭력으로 점철된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법이 범죄를 용인하는 마당에, 폭력혁명을 단죄할 정당성 따위가 법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법의 양극화는 경제적 양극화보다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한나라가 망할 때 등장하는 그런 현상이기 때문에.
추신: 도대체 국가 경제에 공헌한 정도가 기업총수 한사람에게 있다라는 인과관계는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