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쳐드 르원틴과 같은 진화학계의 한 축이 정치적으로 좌파적 사상을 지니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마도 굴드는 중도쪽에 르원틴은 더 왼쪽에 치우쳐 있을 것이다. 이젠 굴드와 도킨스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리도 으르렁 거렸었는지 다 잊어버렸지만, 학계에서의 논쟁이 정치적으로도 이 두사람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연구거리다. 아무리 굴드가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해 조소를 날렸다고는 하지만, 또 도킨스는 인류를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생존기계일 뿐이라고 조롱하면서도 뚜렷하게 입장을 표명하지 않지만, 결국 이 두 과학자도 생물일 뿐이다. 생물이라면 생물학적 제한이라는 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학문에서의 대립각이 정치로까지 나아가는 경우라면 그것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는 유전자결정론을 펼칠 여지까지는 안되어도, 적어도 신경세포의 회로도에 기반한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는 있는 것이다. 괴물스럽게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가끔 이런 흥미로운 신경학적 현상을 바라볼 때 과학자로서 인간을 조작해 볼 수 없음이 통탄스럽기도 한 것이다.
좌파들이 공통적으로 혐오스러워하는 생물학의 몇몇 주제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 하나는 ‘유전자 결정론’이라 불리우고 ‘본성 대 양육’이라는 오래된 논쟁 속에 존재하는, 생물학자들이 이룩한 과업의 해석 중 하나다. 실상 그 어느 생물학자들도 인간의 모든 것이 유전자에 의해서만 형성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특히 두뇌의 활동과 관련된 대부분의 현상들 -예를 들어 성격이나 개성과 같은- 은 유전자로만 설명하기 힘든 복잡다단한 측면을 포괄하고 있다.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은 따라서, 요리책과 요리의 관계에 유추되곤 한다. 유전자란 요리책과 같은 일종의 매뉴얼이다. 요리책에 복음밥을 만드는 매뉴얼이 적혀 있다면, 요리사는 결국 그 무엇도 아닌 복음밥을 만들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요리책이 요리사에게 가하는 제한이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복음밥이 요리사의 능력과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요리사는 환경이다. 요리사가 요리책을 이해하는 방식이 유전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 요리가 어떤 종류의 것이냐는 데에 있다. 닭볶음탕이나 갈비찜과 같이 복잡한 요리와 구운감자와 같이 간단한 요리는 요리사의 능력에 의해 나타나는 변이의 정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복잡한 요리일 수록 다양한 변이가 등장한다. 구운감자는 대부부느이 요리사가 큰 어려움 없이 비슷한 결과물을 내어 놓는다. 요리의 복잡성은 첫째, 얼마나 많은 유전자들이 해당 표현형에 관여하고 있느냐를 나타내는 은유일 수도 있고, 둘째, 해당 표현형이 생존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일 수도 있다. 두번째 예에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진화는 일반적으로 앞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예측 가능한, 그래서 복잡하게 프로그래밍해 놓을 필요가 없는 형질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섹스가 그렇다. 암수가 만나 짝을 고르는 과정엔 복잡한 매뉴얼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섹스라는 과정엔 그런 복잡한 매뉴얼이 필요하지 않다. 그 과정은 거의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르몬과 즉각적인 중추신경계의 반응이면 족하다. 사고나 의식과 같은 복잡한 프로그램은 섹스라는 동작에 있어선 그닥 효율적이지 못하다.
복잡한 요리를 프로그래밍하고자 할 때 종이를 아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매뉴얼에 가소성을 주는 것이다. 만일 엄청나게 복잡한 요리를 깨알 같이 세세하게 요리책에 모두 적으려 한다면 생명체의 유전체는 용량의 한계에 부딪히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요리를 생생한 경험과 동영상이 필요한 요리라는 프로세스에 맞추어 글로 완벽하게 적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생물의 유전체가 가진 용량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제한이다. 따라서 요리책의 저자는 이런 결정을 한다. 최대한 간략하고 이해하기 쉬운 식으로 요리책을 쓴다. 대신 많은 괄호들을 남겨두고, 재료들에 대한 제한도 최소로 한다. 비슷한 재료라면 모두가 가능하다는 식이라던가, 이런 재료도 가능하리라는 식의 어구들을 남긴다. 나머지는 요리사의 몫이다. 요리가 갈비찜이 될지 갈비탕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제한되어 있는 지면을 위해서는 값진 선택이다. 어쨌든 요리사는 갈비로 된 요리를 만들기는 할 것이다. 내장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유전자 결정론의 실체는 위와 같은 것이다. 문제는 도대체 왜 생물학자들에게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암흑 이미지가 뒤집어 씌워져 있느냐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대한민국의 좌파들이 이 분명한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생물학자들이 유전자 결정론자란 소리를 듣는 이유는 그들이 ‘유전자 결정론으로 연구가 가능한 간단한 요리들만을 요리해왔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가설로 연구하는 것이 무척 쉽다는 것이다. 구운감자가 갈비찜보다 요리하기 쉬운 이유와 같다. 구운감자가 갈비찜보다 그 누가 만들어도 별반 차이가 없는 이유가 생물학자들이 갈비찜보다는 구운감자를 선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환경적 요인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간단한 시스템이 생물학자들의 주된 연구주제였다. 유전학의 많은 주제들이 이러한 간단한 시스템을 대상으로 연구되어 왔다. 의식이나 의사결정과 같은 복잡한 주제들은 생물학자들에 의해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백여년의 오랜 연구를 거쳐 이제서야 생물학자들은 그 복잡한 주제들에 정면으로 칼을 겨누고 있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이제서야 비로서 그들에겐 복잡한 요리를 파고들만한 무기가 생겼다.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떠오르는데,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고려할 이유가 별반 없는 시스템으로 연구하던 생물학자들에게 복잡한 시스템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도 유전자 결정론이 일종의 교조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좌파들이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할 때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여전히 문제는 도구적인 이해에서 유전자 결정론을 선호하는 생물학자드이라 할지라도, 복잡하 시스템을 다루는 데에 있어 스스로가 가진 제한을 너무나도 겸손하게 잘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일테지만 말이다.
유전자 결정론과 더불어 좌파들이 싫어하는 생물학적 이슈 중 하나는 아마도 ‘유전자 조작’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에 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 다음 편에 계속해볼까 한다.
다음 글도 기대~
‘유전자 결정론으로 연구가 가능한 간단한 요리들만을 요리해왔기 때문이다!’ 쓰신 글 잘 보았습니다. 종교/신학계에도 이런 한계를 늘 노출해왔죠. 어렵고 복잡한 것을 멀리 하려 하고 그런 연구에 대해서는 쉽게 마냐사냥을 해 왔던 게 사실이죠. 그리고 표현하신대로 오늘날에 좀 더 진보적으로 접근하려 할 때, 익숙해져버린 환경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또 다른 한계를 가져오고요.
으윽. 부담 만빵
그렇군요. 그런 사례를 좀 소개해주세요 ^^
유전자 결정론, 아니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들이 인간 삶의 일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 대해 너무 과민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인간도 동물인 이상 셀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습득한 본능(?)을 무시할 수는 없을테니.
다만 그럼에도 인간에겐 그 본성을 벗어난 선택과 행동이 가능한 게 사실이죠(어쩌면 적어도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는 게 사실이거나). 더구나 인간에게 이러이러한 본성이 있다해서 인간이 반드시 이러이러한 행동을 해야할 당위는 없다고 봅니다(자연주의적 오류랄까요…ㅎ). ‘본성’과 ‘양육’은 다른 차원의 문제고, 하나만 가지고는 인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테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동물적 특성에 영향을 받는 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고만 하더군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