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게는 박노해와 김지하가 있다. 신채호와 장지연이 있었고, 정치인이기는 했으나 김대중과 김영삼이 있었다. 안다. 그들을 미네르바와 비교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들은 미네르바와 같은 일반인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다. 허나 그 시작이 어떠했든, 스스로 대중을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을 때, 신동아와 인터뷰를 할 만큼의 배짱이 있었을 때 그는 대중 앞에 나설 수 있었다. 그리했다면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으리라.
나는 그것이 아쉽다. 그가 당당했었다면 이 정권에 줄 수 있는 타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7인이 팀을 구성해 구국의 충정으로 그런 다량의 글을 쓸 용기가 있었다면 대중 앞에 당당히 나설 용기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한 사람이 구속되고 대중이 방황하고 있었어도 그는 나서지 않았다. 그를 비난할 자격이 나에겐 없다. 허나, 그의 태도를 아쉬워할 자격이 나에겐 있다.
하나, 그가 당당히 나서주었다면 익명의 폐해를 주장하며 사이버모욕죄를 통과시키려던 한나라당에 재갈을 물릴 수 있었다.
하나, 그가 강만수의 제안을 수락했었더라면 정부는 꼼짝없이 공개적으로 그들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감수했어야 했다.
하나, 그가 박씨의 구속 이후 등장했더라면 검찰에 큰 윤리적 타격을 줄 수 있었다.
하나, 그가 신동아의 입을 빌려 등장한 것은 실수다. 7인 중 단 한사람도 박노해나 김지하와 같은 용기는 없는 이들이었음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 그가 당당했었다면 그의 글을 읽은 대중들은 종교가 아닌 행동으로 정권을 심판할 수 있었으리라.
나는 아쉽다. 비록 익명은 권리일지언정, 그것이 당당해야할 지식인과 지식인이 된 자들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믿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도, 민주주의가 무르익지 않았던 이 땅에서도 익명을 통한 사회비판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 우리가 사는 현재는 당당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것이 지식인의 권리이며 의무다. 그리고 그는 그럴 수 있었다. 그리고 설사 그가 잡혀갔더라도 그것은 정권의 목을 칠 그런 절호의 기회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익명에 용기가 없는 것인지, 익명은 권리이며 디지털 시대의 화두인 것인지 늙은 나는 모르겠다. 허나 아쉽다. 그가 당당히 나서주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므로.
다시 교산을 떠올린다. 두려워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그의 <호민론>은 견훤과 궁예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는 견훤이나 궁예가 될 수 있었다. 나는 그게 못내 아쉽다. 그리고 못내 아쉽게도 전봉준의 한을 떠올린다.
그 7인은 허구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