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統攝)‘이라는 말의 현대적 의미는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ence’를 최재천 교수가 원효는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통섭(도맡아 다스린다. 총괄해서 다스린다)’라는 말로 번역하면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통합, 혹은 이미 유행하고 있던 학제간 연구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통섭이라는 용어가 지배적이고, 이러한 용어를 원효가 쓴 적도 없다는 김상현 교수의 비판은 용어에 관한 문제를 주로 제기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러한 인문학자의 일갈엔 통섭이 지닌 지배적이고 환원적인 성격에 대한 우려가 녹아 있다.
최재천 교수의 통섭, 정확히 말하자면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라는 개념이 지닌 일방성과 지배적인 성격을 가장 먼저 알아챈 학자는 최종덕 교수다. 평소 인문학적 상상력과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고, 과학철학자이면서도 인문학에 대해 과학과 같은 애정을 쏟는 최종덕 교수에게 통섭 개념의 무시무시함이 보이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는 의철학회에서의 발표를 통해 통섭 개념이 가진 비수평적 태도를 까발리고 있다. 문제는 철학자인 최종덕 교수조차, 도대체 왜 이러한 비수평적 개념이 정당하지 않은 것인가에 관하 논증을 내놓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종덕 교수의 글이 그래도 의미를 가지는 것은 환원주의의 대척점에 놓여 있던 신과학운동이 가진 통섭적 성격으로부터 문제점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비유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많은 분야에서 과학이 인문학을 잠식시켜왔고, 사회과학이 자연과학에 잠식되어 온 역사적 사실들과 비교해서, 통섭이 왜 불가능하며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인지를 논증하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김상현 교수의 비판이 용례에 대한 비판이며, 자신의 학문 테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동양철학자의 협소한 인식적 성취를 보여준다면, 최종덕 교순 충분히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너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논증을 펼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의 비판은 뚱딴지 같이 김지하 시인에 의해 제기된 종류의 것이다. 촛불에 대한 김지하의 생각을 시리즈로 연재하던 이 글의 2번째 연재에 뚱딴지 같이 통섭이 등장한 이유도 의문이지만, 갑자기 왜 과학도 아닌 형이상학에 불과한,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 개념과 통섭이 한데 묶여 버리는 지도 알 수 없다. 나는 맥락이 없는 이러한 비판이 코미디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김지하의 역정을 감정적으로 이해할수는 있을 것 같다. 특히 시인인 그가, 통섭을 비판하려고 그렇게나 많은 과학책들을 읽었다는 점도 참으로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샤르댕 같은 신학자의 사상을 현대적인 과학자인 윌슨의 그것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윌슨도 통섭이 형이상학적 시도라고 이야기한 마당에 그 비교가 절대 불가할 듯 싶지는 않다. 거의 욕 수준에 가까운 최재천 교수에 대한 김지하의 비하적 발언이 어떻게 화해되었는지, 혹은 최재천 교수에 의해 대답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아마 최재천 교수가 답을 안한 듯 싶다. 이와는 반대로 장회익 교수는 짧게나마 코멘트를 했다). 김지하의 발언이 뚱딴지 같고 과학에 듣보잡인 시인 따위가 왜 이런 코미디 같은 글을 쓰느냐고 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올이 어디선가 김지하의 눈빛은 어느순간부터 광인이 되어버렸다고 했는데, 내가 봐도 율려를 말할 때나. 그런 형이상학적, 종교적 성찰에서 나온 추상적 사고들이 실재세계에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과히 정상은 아니다. 다만, 과학적 사실들만이 아니라 과학자의 형이상학적 세계관까지 빌려오는 최재천 교수의 행태를 과학식민지라고 표현한 점은 여전히 그의 날카로운 직관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하의 비판은 도무지 뚱딴지 같은, 학자의 그것이라고 보기도 힘든, 최재천 교수가 답을 하지 않아도 이해가 충분히 갈, 그런 종류의 것이다.
윌슨의 <통섭>에 대한 비판은 이미 외국에서는 비일비재한 것이다. 다 찾아 볼수도 없을 정도로 <사회생물학>의 확장팩일 뿐인 이 책에 대한 외국 학계의 비판은 다양하고 따갑다. 그래봐야 외국학계의 인문학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의 비판이 국내의 인문학자들이 제기하는 식의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인 개념”이라는 투정 이상의 것일리 만무하다. 과학에서 엄청나게 성공했고, 독학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까지 모두 섭렵한 윌슨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평소에 과학공부에 게으르고 스스로의 학문적 경계내에만 머물러 있던 인문학자나 사회과학자들에게서 구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가장 성실하고 결정적인 타격은 윌슨과 같은 부류의 과학자에게서 왔다. 엘런 오의 서평은 이미 번역해 두었으니, 어떤 개념이 문제가 있던 없던 간에, 우리가 그것을 비판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학자로서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꾸지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인문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해서 윌슨과 같이 나이브한 학자의 헛소리를 혼내줄 수 있기를 바란다. 국내의 학자들에게 그런 학문적 위용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이 나의 희망이다. 윌슨의 인문학의 존립기반을 박살내려던 무모한 시도는 그 밥그릇을 챙겨야 하는 인문학자들이 아니라 또 다른 자연과학자의 방어에 의해 무마되었다. 하지만 다음 번에 더 강한 내공으로 무장한 새로운 윌슨이 등장했을때, 그래서 자연과학자들이 그 말에 수긍할 수 밖에 없을 때, 인문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을 구원해줄 사람은 누가 될 것인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원효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김상현 교수의 비판은 적절한 것이다. 비록 그 비판이 왜 과학이 모든 학문을 통섭해버리면 안되는지에 대한 논증은 찾아 볼 수 없지만, 그 감정만은 이해할 수 있다. 학자도 사람이고, 자기 밥그릇이 위협받는 것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학자라면 통섭이라는 용어의 용례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쉬운 일을 넘어, 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나름대로는 장대한 작업을 시도한 윌슨의 책에 대해 정중한 비판을 제기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은 서평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 김상현 교수의 비판이 자신의 학문 테두리를 벗어나(윌슨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왜 과학이 인문학을 통섭할 수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었다면 보기 좋았을 것이다. 그의 비판에선 애써 감정을 추스리며 통속적인 상식을 주장하는 것 이외의 태도를 볼 수 없다.
최재천 교수의 통섭, 정확히 말하자면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라는 개념이 지닌 일방성과 지배적인 성격을 가장 먼저 알아챈 학자는 최종덕 교수다. 평소 인문학적 상상력과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고, 과학철학자이면서도 인문학에 대해 과학과 같은 애정을 쏟는 최종덕 교수에게 통섭 개념의 무시무시함이 보이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는 의철학회에서의 발표를 통해 통섭 개념이 가진 비수평적 태도를 까발리고 있다. 문제는 철학자인 최종덕 교수조차, 도대체 왜 이러한 비수평적 개념이 정당하지 않은 것인가에 관하 논증을 내놓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종덕 교수의 글이 그래도 의미를 가지는 것은 환원주의의 대척점에 놓여 있던 신과학운동이 가진 통섭적 성격으로부터 문제점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비유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많은 분야에서 과학이 인문학을 잠식시켜왔고, 사회과학이 자연과학에 잠식되어 온 역사적 사실들과 비교해서, 통섭이 왜 불가능하며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인지를 논증하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김상현 교수의 비판이 용례에 대한 비판이며, 자신의 학문 테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동양철학자의 협소한 인식적 성취를 보여준다면, 최종덕 교순 충분히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너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논증을 펼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의 비판은 뚱딴지 같이 김지하 시인에 의해 제기된 종류의 것이다. 촛불에 대한 김지하의 생각을 시리즈로 연재하던 이 글의 2번째 연재에 뚱딴지 같이 통섭이 등장한 이유도 의문이지만, 갑자기 왜 과학도 아닌 형이상학에 불과한,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 개념과 통섭이 한데 묶여 버리는 지도 알 수 없다. 나는 맥락이 없는 이러한 비판이 코미디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김지하의 역정을 감정적으로 이해할수는 있을 것 같다. 특히 시인인 그가, 통섭을 비판하려고 그렇게나 많은 과학책들을 읽었다는 점도 참으로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샤르댕 같은 신학자의 사상을 현대적인 과학자인 윌슨의 그것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윌슨도 통섭이 형이상학적 시도라고 이야기한 마당에 그 비교가 절대 불가할 듯 싶지는 않다. 거의 욕 수준에 가까운 최재천 교수에 대한 김지하의 비하적 발언이 어떻게 화해되었는지, 혹은 최재천 교수에 의해 대답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아마 최재천 교수가 답을 안한 듯 싶다. 이와는 반대로 장회익 교수는 짧게나마 코멘트를 했다). 김지하의 발언이 뚱딴지 같고 과학에 듣보잡인 시인 따위가 왜 이런 코미디 같은 글을 쓰느냐고 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올이 어디선가 김지하의 눈빛은 어느순간부터 광인이 되어버렸다고 했는데, 내가 봐도 율려를 말할 때나. 그런 형이상학적, 종교적 성찰에서 나온 추상적 사고들이 실재세계에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과히 정상은 아니다. 다만, 과학적 사실들만이 아니라 과학자의 형이상학적 세계관까지 빌려오는 최재천 교수의 행태를 과학식민지라고 표현한 점은 여전히 그의 날카로운 직관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하의 비판은 도무지 뚱딴지 같은, 학자의 그것이라고 보기도 힘든, 최재천 교수가 답을 하지 않아도 이해가 충분히 갈, 그런 종류의 것이다.
윌슨의 <통섭>에 대한 비판은 이미 외국에서는 비일비재한 것이다. 다 찾아 볼수도 없을 정도로 <사회생물학>의 확장팩일 뿐인 이 책에 대한 외국 학계의 비판은 다양하고 따갑다. 그래봐야 외국학계의 인문학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의 비판이 국내의 인문학자들이 제기하는 식의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인 개념”이라는 투정 이상의 것일리 만무하다. 과학에서 엄청나게 성공했고, 독학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까지 모두 섭렵한 윌슨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평소에 과학공부에 게으르고 스스로의 학문적 경계내에만 머물러 있던 인문학자나 사회과학자들에게서 구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가장 성실하고 결정적인 타격은 윌슨과 같은 부류의 과학자에게서 왔다. 엘런 오의 서평은 이미 번역해 두었으니, 어떤 개념이 문제가 있던 없던 간에, 우리가 그것을 비판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학자로서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꾸지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인문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해서 윌슨과 같이 나이브한 학자의 헛소리를 혼내줄 수 있기를 바란다. 국내의 학자들에게 그런 학문적 위용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이 나의 희망이다. 윌슨의 인문학의 존립기반을 박살내려던 무모한 시도는 그 밥그릇을 챙겨야 하는 인문학자들이 아니라 또 다른 자연과학자의 방어에 의해 무마되었다. 하지만 다음 번에 더 강한 내공으로 무장한 새로운 윌슨이 등장했을때, 그래서 자연과학자들이 그 말에 수긍할 수 밖에 없을 때, 인문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을 구원해줄 사람은 누가 될 것인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그냥 앨런 오 광신종파를 만들면 간단하겠군요.
징후가 보이면 까 주시면 되겠습니다.
좋은 번역과 의견 잘 읽었습니다. 오라는 학자는 정말 매력이 있는 사람이군요. 최근 김우재님의 문제의식도 십분 이해하고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과학 비판이 지금보다 훨씬 정밀해야 한다는 데도 동의합니다. 다만 말씀하신 “인문학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의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인 개념”에 대한 비판을 단지 투정으로만 받아들이시는건 좀 좁은 시각이 아닌가 싶군요. 인식론적으로 이미 정립된 과학 개념이라 할지라도 사회 안에서 소통되고 소비되는 양상은 종종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튀게 마련이고, 이 양상 자체를 화용론의 차원에서 연구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기반을 둔) 사회과학이 독자적으로 할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독자적인 연구 프로세스를 통해 어떤 개념이 (그 인식론적 정의와는 무관하게) 특정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면 그걸 밝혀내는 작업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물론 지금까지의 사회과학이 그런 역할조차 정밀하게 효과적으로 해냈으냐고 묻는다면 저도 부정적입니다만.
이렇게 투덜거리기만 할 셈? 실망임 ㅡ.ㅡ
통섭이 가능한 것인가를 묻기 위해서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차원의 분석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건 그런 과학 프로그램자체가 왜 불가능한가에 대한 과학철학적, 과학사적, 사회과학적, 철학적, 역사학적, 나아가 과학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앨런 오의 서평은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시도가 들어 있는 유일한 비판입니다. 적어도 윌슨을 뜨끔하게 만들 비판이라면 그런 논의들로 충만해야 합니다. 화용론으로 비껴서는 것은 윌슨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투정하는 것 밖에는 안됩니다.
메타담론 자체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화용론 가지고는 안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 점에는 십분 동의합니다. 다만 저 같은 경우엔 사회학 전공의 입장에서 섹슈얼리티가 대중매체와 교육기구등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메타담론으로부터 파생된 진화심리학이 대중적인 미디어를 통해 소비되는 양상에서 성차에 대한 기존의 보수적 관념을 강화하는데 강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어서요.(특히 교육심리학 분야에서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을 성차를 강화하는 교육정책의 합리화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메타담론 자체에 대한 논박도 중요하지만, 교육과 같은 사회적 기구에서 어떤 이론을 취사선택하는 실천의 순간에는 가치개념의 사회적 생산이라는 관점도 그리 쓸모없는 수단은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진화심리학이 그런 방식으로 왜곡되는 것에 대해 진화심리학자들조차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신중한 진화심리학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행인님의 시도는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진화심리학은 특별한 실험실 경험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진화심리학의 논의들을 아우르면서 사회학적인 논의에 이를 포괄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논의가 완성되면 알려주시길.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언젠가 구체적인 결과물이 완성되면 한번 보여드리고 조언을 구하겠습니다. 김우재님의 건필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