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게이의 회의주의적 기원
문제는 사실들이 주장에서 점유하는 지위에 있다. 광우병 사태를 거치며 쿨게이들의 면면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광우병이라는 질병만 두고 본다면 그것이 지극히 명백한 과학적인 사실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그 의도가 어찌되었건 간에 광우병 괴담이라는 형태로 퍼지는 소문들은 쿨게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거의 확실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의주의가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과학적 합리성, 그리고 회의주의 진영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들이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나누는 시도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활동이 사실관계를 밝히는 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누누히 말했듯이, 자연과학의 특징은 양을 다루는 데 있다. 나는 그것을 측정량이라고 부른다. 측정량의 특징은 재생산 가능하다는 것이다. 측정량의 재생산 가능성은 진화된 우리의 인지능력이 가진 특성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적응해야 했던 우리의 두뇌는, 양으로 표시되는 정보들과 반복되는 정보들에 신뢰를 보내는 방식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이 단순히 측정량을 수집하는 데에서 그치는 활동이라면, 그것은 과학이라 부르기 어렵다. 현대 통계학의 주요한 부분들은 로날드 피셔가 농학연구소에 의미 없이 쌓여 있던 엄청난 자료들을 그가 만든 이론으로 분류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측정량을 연결시킬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학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측정량과 이론의 관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의 분과다양성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과학의 세속화는 이론이 측정량을 지배하던 시대로부터 측정량이 이론을 제한하는 시대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이론지배의 시대에, 과학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측정량에 의해 충분히 지지되지 않는 이론을 가지고 세상을 재단했다. 우생학이 탄생했고, 정신분열증 환자의 전뇌가 제거되곤 했다.
과학으로 중무장한 회의주의는 과학의 세속화가 충분히 진행된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자세한 설명은 위키피디아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곳에서 한국 회의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도 간략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등장한 회의주의적 좌파(Skeptical Left)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 아쉬운데, 나는 대충 그 설립의 과정을 짐작하기는 하지만 누군가 그 역사를 서술할 필요는 있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쿨게이들의 쿨함은 이러한 과학적 회의주의에서 한발짝 진화했다. 그들은 더이상 과학적 사실로 손쉽게 판단할 수 있는 초능력, UFO, 초자연현상 등의 떡밥만을 물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정치, 사회, 역사, 문화, 경제, 군사[footnote]예를 들어 모기불통신, 사관은 논한다, quarantine station등은 이제 회의주의적 태도가 단순히 자연과학이 다루는 대상의 범위를 넘어 사회과학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사관논야에 대해서는 적절한 예가 아닐 수도 있음을 잘 안다. 어쩌면 이 바닥을 잘 알지 못하는 내가 초록불의 블로그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를 사관논야에 투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본의아니게 쿨게이가 되신 것에 사죄드리며.[/footnote] 등의 사안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세력, 일종의 태도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성장했다.
가치와 사실의 비분리성 논제
다시한번 말하지만, 사실에 기반한 합리적인 이성을 강조하는 회의주의의 태도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다루는 대상이 자연과학의 대상을 넘어 사회와 문화 전체로 확장되었을 때 발생한다. 그곳엔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것처럼 재현가능한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곳은 자연과학이 다루는 양적인 세상이 아니라 질적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곳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들은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거의 대부분 실험 불가능하고 해석에 열려 있는 종류의 것들이다. 해석에 열려 있다는 것은 사실자체가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사실들처럼(자연과학의 사실들도 해석에 열려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 정도에서 차이가 나는 것 뿐이다. 이는 양화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손쉽게 테스트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뜻한다. 나아가 이러한 사실들은 해석에 열려 있을 뿐 아니라, 이념에 노출되어 있다.
‘합리주의자의 도’에서 시작된 국내의 회의주의의 역사가 좌-우의 이념갈등으로 번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회의주의적 시각이 ‘보수주의’로 흐르게 된 것에는 변하지 않는 사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회의주의의 특성이 있다.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변하지 않는 사실들은 보수적이다. 그런 사실들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는 결국 정치적 보수주의에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국내 회의주의의 역사가 이념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지구조가 지닌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 준다. 우리의 두뇌는 사실과 사실이 벌이는 전투에 앞서 언제나 가치와 가치의 전투를 벌이는 식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두뇌는 귀납도 연역도 아닌 가추의 방법을 가장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합리적 이성이라는 개념이 허버트 사이먼이나 게르트 기거렌쩌 등의 연구에 의해 박살나는 과정 속에는 우리의 인지구조가 지닌 필연적 한계, 즉 가치와 사실을 분리하지 못하는 우리의 진화적 인지구조의 한계가 스며 들어 있다. 우리는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동물이 아니다.
따라서 쿨게이들이 사실관계만을 거론하며 쿨함을 표현할 때 그들은 이미 일종의 가치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쿨게이들을 일반적으로 못마땅해하는 독자들은 그 숨어 있는 가치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이며, 쿨게이들은 우리에게 ‘그런 가치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쿨게이들의 이러한 주장이 그들을 쿨하다고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인류의 진화적 경로를 벗어나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두뇌를 지니게 되어버린, 초인류적 지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인지과학자들의 연구가 그리 헛된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쿨게이들의 세 가지 오해
어차피 ‘나는 쿨할 뿐이다’라는 것이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 두뇌 구조의 치명적 단점을 감추려는 시도 이외의 것이 아니라면, 즉 태도에 불과하다면, 이에 대해 그닥 할 말이 없어야만 할 것이다. 지들이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쿨하게 살겠다는데, 그리고 쿨한게 싫으면 오지 말라는 데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그리고 실제로 나는 대부분의 쿨게이들의 블로그에 방문하지 않는다. 아래에서 거론될 몇 가지 기준을 충족하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제는 첫째, 그들이 다루는 ‘사실들’이 구성되는 방법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방식 둘째, 이로부터 비롯되는 이들의 지적인 우월성과 계몽주의 그리고 셋째, 논증이 제기되는 방식에 있다.
쿨게이들은 지나치게 사실에 집착한 나머지 세 가지를 망각하곤 한다. 그 첫번째는 자연과학이 다루는 것처럼 엄밀한 대상이 아닌 종류의 것들에 대해 자연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리라는 점을 잊는 것이고 둘째, 심지어 그렇게나 엄밀해 보이는 자연과학적 사실들로 때에 따라서는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구성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며 마지막으로는 이들이 사실에 집중한 나머지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고는 한다는 점이다. 사실의 불확실성 문제
예를 들어 내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사이비과학을 논하는 것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들에 대한 주장을 자연과학의 엄밀한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오류다. 층위가 다른 수준의 문제는 그 수준의 합리성만을 갖다 대면 족하다. 특히 역사적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경우, 환빠들과 같은 황당무계한 이들을 비판하는 것과, 신복룡의 ‘고구리 문제’를 비판하는 것을 동류에 놓을 경우 문제가 심각해진다. 여기서 이덕일을 환빠와 동일시 할것인가의 문제는 조금 어려운데 나는 적어도 이덕일의 모든 주장이 환빠들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지식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덕일은 논쟁이 가능한 상대라 여기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나는 이성규와 같은 창조과학 진영의 과하사학자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할 뿐, 그들을 창조과학자들과 같은 동류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여지가 이들에게는 열려 있기 때문이다. 대화 이게 중요하다. 쿨게이들은 심각할 정도의 정신이상을 보이는 환빠, 황빠, 광우병 괴담 유포자들, UFO 신봉자들과 이덕일, 신복룡, 이성규 등의 학자들 모두를 하나의 기준에 묶어 싸잡아 비판해 버린다. 이는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몇 가지 사실관계의 오류만으로 이들을 그 동류로 취급해버리기엔, 우리가 지닌 합리성의 칼이 그다지 날카롭지 않다.
자연과학에서의 사실의 문제
자연과학의 엄밀해 보이는 사실들조차 그 오류에 대해 자연과학 내부에선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1990년대의 JBC의 어떤 논문을 찾아 들어간다 치자. 생물학 연구자들은-전부는 아니지만- SCI에서 그다지 높은 지위를 점하지 않는 모든 논문들이 모두 사실을 말하고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생물학자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지식이다. 어떤 대학원생은 졸업을 위해 약간의 데이터에 수정을 가했을 지도 모른다. 심지어 어떤 논문들은 교수의 권위에 의해 동료 심사자들의 엄밀한 심사과정 없이 게재되었을지도 모른다(PNAS가 그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물론 다른 논문들의 경우에도 과학자의 권위가 작동하는 구석은 많다. 일종의 내부고발 같이 되어버렸는데 사실이 그렇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그 엄밀하다는 자연과학의 연구결과들조차 측정량이 재현가능성이 시험되고 선택되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사실로서의 가치를 평가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어떤 논문을 하나 떡 찾아 놓고, 단순히 ‘이런 결과가 있으니까 닥치시지’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벼운 태도다. 오히려 ‘그 연구 결과를 연관 논문들과 후속 논문들, 그리고 이론과의 연관성 측면에서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면 닥치시지’가 그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말이다. 특히 광우병 사태에서 증거로 사용되는 어떤 논문들은(이건 내가 당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으면서 직접 경험했던 것인데) 해당 이익단체의 이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축산협회에서 연구비 지원을 받은 연구, 해당 교수가 축산협회와 긴밀한 유착관계에 있는 경우 등등. 이런 사례는 몬산토를 비롯한 다국적 연구기업에서 과학자들에게 사주해서 내놓는 연구들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과학계의 비극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이 Suggest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우연이 아니다. 과학적 사실들이 발표되고 시험되는 과정은 단순하게 논문 몇편만을 가지고 어떤 사안을 단정지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쿨게이들은 이런 점을 간과하곤 한다.
전체적 맥락에서 사실관계가 차지하는 지위
내가 소고기를 섭취함으로써 인간광우병이 유발될 낮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애써 광우병에 대한 쿨게이들과 정부의 계몽주의적 태도를 비판한 것은, 광우병 괴담이 광우병 사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명박 정부의 태도와 FTA를 위한 미끼라는 측면에서의 비굴한 졸속협상, 나아가 이를 모두 고려한 국익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하찮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글을 통해 과학적 사실들에 대한 해석이 언제나 열려 있으며, 특히 임상실험이 거의 불가능한 이런 임상의학적 데이터들은 엄밀한 자연과학적 잣대를 들이댈만큼 튼튼하지 않다고 주장했었다. 그러한 비판에는 광우병 괴담이라는 사건 하나만으로 촛불의 전체적인 맥락을 폄하하려는 쿨게이들에 대한 비판이 녹아 있었다.
문제는 맥락이다. 맥락은 양화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두뇌 속에서 벌어지는 가치평가의 기준이고, 따라서 사실관계만으로 단정지을만한 어떤 사태가 아니다.
이는 우리의 두뇌 속에서 사실과 가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와 더불어 중요하게 생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복잡다단한 현상들을 분석하는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과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통일장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으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것은 결론에서 다룰 우리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지적 권위의 문제
어떤 쿨게이들은 정말 잘났다. 사실이다. 그들의 독서량은 엄청난 수준을 과시하고 그들이 수집하는 자료들은 상상을 불허한다. 문제는 그러한 태도가 대중에 대한 일종의 지적 권위의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몇가지 사실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지 못한 상대방을 계몽하려는 것은 무의미한데, 이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쿨게이들이 정작 그들보다 지적으로 권위 있는 프로들을 만났을 때 다시금 그 지적 권위에 복종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프로들이 쿨게이들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안다는 전제하에). 그렇다면 쿨게이들은 끊임 없이 그들보다 지적으로 약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비판해야 한다는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윤리적 문제 뿐 아니라, 그들보다 지적으로 권위 있는 자들을 만나면 결국은 소멸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대중을 다루는 태도엔 분명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지식인이 취해야할 스탠스가 아니다. 쿨게이들 스스로가 지식인이 아니라고 자처한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허나 그들이 지식인의 스탠스를 취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될 비극은, 지적인 권위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토론을 시작조차 하지 않으며, 결국은 건강한 논쟁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지식인 사회의 현재태,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잘났다는 지식인들은 쿨게이들이 성장한 모습을 닮았다. 그들은 ‘모르면 말을 하지마’라고 쉽게 말한다. 물론 모르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당히 모른다면, 적당히 안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도 말을 하지 말아야 할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요약하자면 쿨게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우리네 지식인들의 자화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논쟁이 없고, 토론이 없고, 니가 나보다 책을 많이 읽었네, 내가 많이 읽었네, 어랍쇼 나는 독어로 읽었네, 나는 누구 밑에서 공부했네 따위의 말들로 도배된 대한민국 지식인들의 지적 권위는 쿨게이들이 대중에게 보여주는 그 쿨함 속에 녹아 있는 지적 권위와 닮아 있다.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세번째 문제, 우리가 어떤 복잡한 사안을 다룰 때 취해야할 태도의 문제가 제기된다.
논증의 태도
복잡한 것은 복잡한 것이다. 복잡한 것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겸손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성의 원리로 환원하려 했던 것은 자연과학이 취한 미덕이기도 했지만, 자연과학이 극복해야 했던 딜레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게엔 여전히 그 자연과학이 다루지도 못하는 엄청나게 많은 대상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복잡성 앞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 없이 합당한 논증을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지한 지식인들이 취하는 태도다.
그런 복잡한 문제들은 진지한 학자들의 저술로, 그런 고민을 담은 논문으로 출판될 때에는 논의의 대상 속으로 포섭될 수 있다. 우리가 라깡의 허무맹랑함을 비웃을 지언정, 그들의 지적 결과물을 내어 놓은 그 태도조차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칼의 비판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지하게 문제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소칼의 ‘지적사기’는 그 해프닝만으로 기억될 일이 아니다. 이 후에 벌어졌던 과학자 진영과 인문학자 진영의 진지한 논쟁이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그것이 논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그 복잡한 사안들에 대해 진지하고 치열하게 논증의 형태로 제시했다. 이건 상식인 것이다. 논증의 방식이 선수들보다 못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기본 골격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강준만은 이를 논증의 ‘진실성’이라고 에둘러 표현한다. 여기서 강준만과 진중권 사이에 오갔던 그 논의들 전부를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이미 많은 부분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시길 바란다. 이런 게 백투더소스가 아니라고 비난받지는 않겠지. 그러나 결국 링크를 찾아 거는 이 센스).
실상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투정에 불과한 쿨함이 아니다. 진중권마져 쿨하게 욕하고야 마는 우리의 쿨게이들은 실은 태도라는 측면에서 진중권을 욕할 자격이 없다. 논의를 슬쩍 비껴나가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수구꼴통들 뿐 아니라 진지한 다른 진보들에게까지도 어린아이 투정부리듯 쿨하게 행동하는 진중권의 태도는 쿨게이들의 미래태다. 그래서는 이 땅에 진지한 지식인 논쟁이 싹틀 수가 없다. 게다가 요즘의 쿨게이들은 진중권을 욕하면서도 결국엔 진중권을 닮아가는 기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문제다. 욕하면서 닮는 이 사태가 사회의 발전을 가로 막는 대한민국의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부자를 욕하면서 부동산 투기를 하고, 삼성을 욕하면서 위험한 펀드에 투자하는 괴현상의 이면에도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숨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 모든 것은 진중권의 탓이라 하자. 어차피 이런 쿨게이들을 키운 교육제도, 제대로 된 본을 보여 주지 못한 지식인 사회 내부의 문제, 그런 것들이 더 문제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쿨게이론 부족해”는 어떤 훈계나 비난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나은 태도가 가능하다는 상식적인 제안이다. 우리가 그다지도 비판하는 우리 앞세대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누군가 이야기했듯이 “경박단소 키치의 시대, 원본이 사라진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진지함이란 새로운 형태의 소외일지도” 모른다. 허나 우리의 목적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것을 건설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끊임 없이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내가 쿨게이의 쿨함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이유다.
추신: 배너를 공모한지 5분 만에 이처럼 멋지게 상징화된 배너를 만들어 주신 이름 모를 ‘행인’님에게 감사드린다. 예술평론 같은 건 정말 문외한인데 나름 대로 해석을 해보자면, 이 그림은 냄비뚜껑이 열려린 채로, 침을 튀기며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면서, 남의 말엔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얼굴이 감추어진 자칭 쿨게이? 들에 대한 묘사다.
“쿨게이론 부족해” 캠페인을 시작한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 덧붙혀 이 그림을 티스토리 사이드바에 다는 소스코드와 그걸 이쁘게 다는 법을 좀 알려주시길 부탁드린다. 조금 할 줄 알 긴 아는데, 여전히 HTML은 참 나쁘다.
‘쿨게이론 부족해!’ 캠페인 배너 HTML 소스
<s_sidebar_element>
<!– 쿨게이론 부족해! –><center>
<div style=”margin: 8px 0pt; font-family: dotum; font-style: normal; font-variant: normal; font-weight: normal; font-size: 11px; line-height: normal; font-size-adjust: none; font-stretch: normal; -x-system-font: none; text-align: center;”>
<a href=”http://heterosis.tistory.com/156″ target=”_blank”>
<img src=”http://cfile5.uf.tistory.com/image/134706244A1285373E0274″ alt=”쿨게이론부족해”></a></div>
</center></s_sidebar_element><div style=”text-align: center; font-weight: bold; color: rgb(255, 228, 9);”>
<s_sidebar_element><span style=”font-family: Arial;”>쿨게이론 부족해!</span><br />
<span style=”font-family: Arial;”>캠페인 기간입니다.
</span></s_sidebar_element></div>
왠지 그라데이션의 의미가
‘가슴은 차갑고 머리는 뜨거운’
을 의미하는 듯 하군요.
편가르기가 아니라 건설적인 마찰을 위한 켐페인이라면 저도 동참하고 싶군요.
(그런데 쿨게이 사이트는 재미있더라능…일부러 댓글은 안읽는다능)
그러고보면 쿨게이들의 원조는 맬서스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이런식으로 입력하시면 되긴 합니다만, 티스토리 플러그인에 “배너 출력” 추가 하신 담에 그냥 이미지 url입력하는게 더 편하네요.
//덧. 감히 트랙백 하나 남깁니다.
아. 그런 의미도. 그나저나 만들어주신 분은 진정 숨은 고수..
그래도 나름 진지한 사람있다고 해요. <세속의 철학자들>에 따르면..
시도해 보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명료하시다는..글재주가 좀 늘어야 할텐데..
ㅎㅎ. 변변찮은 이미지를 캠페인에 써주셔서 민망하군요. 요즘 펜이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정도로 속사포처럼 글을 쓰시는데 그럼에도 문장에 비문이 거의 없고 문체에서 특유의 박력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내용이야 뭐 거의 동의하기도 하거니와 요즘엔 예전보다 사고의 흐름이 유연해지신것 같아 오히려 적게 쓰실때보다 읽다 걸리는 부분이 덜하구요.(사실 개인적으로 주장하시는 바에 거의 동의하는 편인데도 종종 정서적으로 탁탁 걸리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몇년 잠적하겠다고 해놓고 요즘 너무 말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그럼 전 또 눈팅족으로 돌아가죠. 공부하시랴 글쓰시랴 바쁘시겠지만 운동도 좀 하시고 건강도 함께 챙기셨으면 합니다. 그럼.
강호무림에는 숨은 고수가 많다더니..나대는 제가 뻘줌할 정도로 그림 하나로 모든 이해를 보여주시고는, 이제 다시 어디로 잠적을 하신단 말입니까. 항상 보고 계시리라 생각하고 겸손에 겸손을, 항상 비판적인 견제를 해주실 것이라 믿으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쳐있는 제게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우,제가 쿨게이들을 보면서 느낀 것을 잘 정리하셨군요.그런데 잘 보면 이 글에도 ‘쿨게이’의 냄새가 좀 나긴 합니다만(그러고 보니 쿨게이들의 특성이 다름아닌 ‘사실에 기반한 합리적인 이성’을 빙자한 고도의 지식나열과 분석을 통한 압박주기와 나는야 모든 것을 정의내릴 수 있는 지식인 흉내내기니),나쁘지는 않거든요.사실 쿨게이 까는데 ‘쿨게이틱하게’지적하는 것만큼 좋은 건 없지요.
사실 전 쿨게이에 대해서 딱히 말하자면,’고도의 지식과 논리로 무장한 베르사체나 프라다가 울고갈 시니컬 X간지틱한 정체불명의 도덕성과 계몽주의 사상,심판자로서의 위치착각에 쩔은 키워’라고 보거든요.뭔 토론이랍네 생산적인 발상입네 떠드는 것도 결국에는 지적 권위의식으로 무장한 키워질일 수밖에요.그러다가 주제가 벗어나면 개싸움에 정신승리 난무가 되고 말지요.그냥 그 친구들은 ‘토론을 빙자한 키워질’의 승자가 되고 싶었나 봅니다.
사실 ‘쿨게이로 부족해’가 아니라 ‘쿨게이는 때려치워!행동이 필요해!’가 정답일 텐데요.예전 한겨레의 김진변호사의 ‘주머니병’이 생각나는 대목이라고 봅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저 친구들에게 ‘Cool’도 아깝습니다.’풀게이(FoolGay)’가 딱이지요.
“복잡한 것은 복잡한 것이다”라는 문장이 예사롭지 않게 들립니다. 덕분에 ‘쿨게이’라는 바보들을 알게 됐습니다.
저에겐 그런 간지가 없습니다.
쿨해보이긴 합디다.
그런 애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많습니다. 이글루스에서는 정말 마리신님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http://curtis187.egloos.com/4362832
http://discuss.egloos.com/1408826
락쿤(사관논야)님 같은 경우는 이글루스에서 ‘쿨게이’라 지칭되는 거의 모든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은, 쿨게이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며칠전까지 ‘쿨게이는 대단해!’ 캠페인 주창자인 커티스님과 논쟁을 하기도 했고요.
그것 말고도, 쿨게이란 단어 자체가 이글루스 내에서 너무 남발되는 감이 있습니다. 캡콜드님의 지적(http://minoci.net/860#comment19281)대로 조금만 회의적이 되도 쿨게이라 몰아 붙여지는 경우도 있고, 애초에 ‘쿨게이는 대단해!’ 캠페인도 그런것에 대한 반발성+장난성 캠페인이고.. 여하튼 쿨게이란 단어에 대해선 좀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댓글로 설명하기엔 너무 길고, 저도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다 얘기는 못하겠지만요.;;
‘쿨게이’에 대해 정확한 이해없이 쿨게이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여는건 좀 이상한 점이 있지않을까요? 캠페인 자체는 지나친 회의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니 충분히 의미있고 저에게도 필요한 캠페인이긴 한데, 그로인해 아쉬움이 더 커지는 감이 있군요.
뭐, 뻘댓글 입니다.
락쿤(사관논야)님에게는 이미 대역죄를 고백했습니다. 고민을 이해합니다. 너무나 흔하지만 또 정말 거기에 푹 빠진 쿨게이들은 얼마 없더군요.
우왕 굳. 글 진짜 잘쓰시고 최근에 그런 쿨게이에 대해 제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잘 써주셧군요.
특히나 그들이 전체 맥락을 무시하고 전체적으로 봐서 중요하지 않은 단편적인 부분만 가지고
난리치는게 전 젤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하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쿨게이보다는 풀게이가 그들에게 어울려 보여요
뭐 내 태도도 조심해야겠죠.
좋은 글 잘봤구요. 내공에 감탄을 금할수 없내요
우왕 금하지 말아주십시오
오오 리 수령 블로그급의 하루 카운터수라는
스스로를 쿨게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겠지요. 아닐까요? 쿨게이가 뭔지 알지 못한다고 썼다고 해서, 락쿤님을 쿨게이라고 몰았다고 해서(게다가 락쿤님은 이제 캠페인 간판을 거셨는데요. 이거 그만 물고 늘어지시길), 제가 쿨게이를 모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글의 요지를 알아들으신 분이라면 댓글에 달린 한마디를 트집잡아 ‘제가 하려던 건 말이죠’ 따위의 시비는 걸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공허한 밤입니다.
실험 안하고 논 댓가라는..
“너무나 흔하지만 또 정말 거기에 푹 빠진 쿨게이들은 얼마 없더군요.”는 무슨 뜻으로 하신건가요? 제가 리플을 좀 이상하게 쓴 걸까요;;
제가 달았던 리플을 요약하자면 “쿨게이에 대해 잘 모르면서 ‘쿨게이는 대단해!’를 비꼬는 캠페인을 벌이는것은 괜찮은가”입니다.
락쿤님 얘기를 꺼낸건, 락쿤님 같이 쿨게이 진영과 극명하게 대치되는 분을 쿨게이로 오해 할 정도면, 쿨게이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 하는 것 으로 보여져서 입니다.
사죄글을 추가하시면서 초록불님 블로그를 언급하신 것도 이유를 모르겠군요. 본문에 이덕일이 나와서 그런가요? 초록불님 블로그를 자주 가지만, 초록불님 블로그에 나온 포스팅에서 이덕일과 관련된 포스팅 들은 ‘환빠성 주장’에 대한 비판에 머물러 있습니다.( http://orumi.egloos.com/tag/이덕일 ) ‘싸잡아 비판’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쿨게이는 대단해!’ 캠페인은 ‘쿨게이’라고 싸잡아 비난을 받자 그에 대한 조롱으로 달게 된 배너고( http://curtis187.egloos.com/4364420 ), 언급하신 블로그 중 확실하게 쿨게이인-소넷님의 경우는 제가 잘 모르니 보류하겠습니다-모기불님도 “나는 쿨게이가 아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http://mogibul.egloos.com/4083036)
자신을 자발적으로 쿨게이라고 한 건 스프린터님이 백투더소스 추천사에서 한 정도.
에.. 그러니까, “쿨게이에 대해 하고 싶으신 말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쿨게이’에게 하시는 말인가요?”
그런데 때로는 그런 ‘쿨게이’적인 태도가 상황에 따라서는 나름대로 적절할 때가 있기도 합니다. 가령 때로 길에서 입교를 강요하는 – 한 때 기독교인어었다가 무신론자가 되었으니, 재입교라고 해야 하려나… – 종교인들을 만날 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저 소위 ‘쿨’하게 무시할 수밖에요. (물론 혹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들을 ‘가지고 노시는’ 분들도 있는데 이 정도까지 가면 똑똑한 게 아니라 경박한 겁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직 네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합리성이 대체적으로 딱 쿨게이 정도이거나 그 이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쿨게이에 대해서 불편함은 있어도 그들의 태도 자체를 지금 상황에서 못났다고 비판하는 것도 좀 껄끄럽지요. 근거도 없이 자신이 옳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것보다는 조금 못나게 보여도 근거를 대가며 어떠한 논증이 있는 주장이 더 낫지 않겠어요?
아직은 좀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계몽주의적인 태도를 보면서도 나름 의미는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포섭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확실히 부족하지요, 김우재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내가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온 것은, 사람들의 행동을 조롱하기 위한 것도, 한탄하기 위한 것도, 경멸하기 위한 것도 아닌,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 바루흐 스피노자’
정말 ‘스켑틱’이 현재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에서 소개하고 있는 스피노자의 인용구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http://www.skeptic.com/about_us/index.html)
사실 뭔가 좀 더 나아가서 무슨 글이라도 써야 겠다는 느낌이 팍팍 드는데, 제 미천한 내공으로는 이 정도의 댓글 밖에는 달 수가 없군요. 흑흑…
역시 공부 좀 더 해야 겠습니다. 글 쓰는 공부도 (…)
‘쿨게이를 모른다’ 부분에 대해선 제가 틀렸을지 모르겠군요. 일단 물러나겠습니다.
전 캠페인의 속 내용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편 입니다. 잘못된 방식의 회의주의는 분명 고쳐야겠죠. 다만 ‘쿨게이’라는 단어의 잘못된 사용은 캠페인의 기반을 흔들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서 저런 댓글을 달았습니다.락쿤님을 왜 자꾸 걸고 넘어지시냐고 하셨는데, 이른바 ‘쿨게이 진영’에서 가장 황당해하고 부각하는 부분이 락쿤/초록불님을 쿨게이로 지목한 거였습니다.그리고 위에서도 말했지만 쿨게이란 단어는 원래 비난조의 말이라 ‘스스로를 쿨게이라 생각하는 이’는 없다는 것 역시 ‘쿨게이 진영’에서 나오는 얘기고요.’쿨게이 진영’에게 호응받지 못 하는 ‘쿨게이론 부족해’ 캠페인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 부분에 대해 질문한 것 입니다.또 흥분해서 마구 쓴게 죄군요.바로 어제 감정에 휘둘려서 글 쓰지 말라고 포스팅 했으면서 왜 이러는지…좋은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쿨게이라는 단어가 형성된 데에는 쿨게이가 아니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책임도 있는 겁니다. 토마스 쿤이 나는 쿠니안이 아니야 했던 그 억울함은 이해하는데, 쿨게이라는 말이 소위 ‘나는 쿨게이가 아니야’ 류에 의해 반어법으로 사용되었건 아니건 간에, 회의주의와 사실을 화두로, 논증의 방식과 태도를 향해 진행되는 제 주장에 문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쿨게이라는 용어를 그냥 ‘사실관계에만 집착하고 사건에서 떨어져 객관적인 스탠스를 보이는 무책임한 어떤 행태’라고 바꾸어도 저 글은 그냥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집니다. 댓글로 나누는 대화는 정신을 차분치못하게 합니다. 할 말이 있으시면(게다가 이정도 분량의 긴 글이라면) 차분히 트랙백으로 남겨주시면 답변의 요량을 한번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입니다.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댓글로의 대화는 제 정신을 혼탁하게 만들고 저를 너무 시니컬하게 만듭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붉은 새벽이군요. 글을 붉게 물들어 놓으실것까지야…
스피노자는 그 괴이한 철학적 시도에서보다는 삶의 태도에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과정 중의 무엇이던 비판의 여지는 존재하며, 그 비판을 받아들여 성장할 것인지 아닌지는 그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제가 지적으로 잘나서가 아니라, 결국 저 문제는 태도의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입니다. 제 태도는 또 우월하냐 하면 그런 것은 제가 판단을 할 수 없는..컥.
너무 달린 거 아니냐는.. 이러다 다함께 저능된다는.. ㄲㄲ
그냥 되는 대로 살거라는…
내공에 얼어붙게 하시는군요. ㅎㅎ;;
블로그스피어란 것, 발디딘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과연 웹2.0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오랜만에 ‘합리주의자의 도’란 이름을 듣게 되어 몹시 반가웠습니다.
돌이켜보면 영문의 고급 텍스트를 독해할 능력이 없는 저로선 당시 ‘합리주의자의 도’라든지 ‘사탄의 교회’라든지 하는 ‘마이너’ 웹사이트들을 통해 합리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은 것 같습니다. (요즘은 다시 신비주의와의 화해 지점을 탐색 중입니다.)
그떄도 참 감탄스러웠지만, <만들어진 신>조차 한국에서는 2007년에야 발간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니었거니, 하면서 자위하고 있습니다. ^^;
그나저나 얼치기 인문학도가 뒤늦게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학습하려니 가랭이가 찢어질 판입니다. ㅋ
※ ‘쿨게이론 부족해’ 캠페인에 동참하고 싶은데, 그런데 html엔 영 꽝이라 배너다는 방법을 모른다는…ㅋ
별 힘이야 안되겠지만, 노통의 서거를 겪게 되니 역시 설득보단 선동이 힘이 세다…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요. 아무쪼록 건필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