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논객(論客)의 방점은 논(論)에 있다

이전 글에서 잠깐 논했지만, 진중권에 대한 내 비판의 방점은 그 논쟁의 태도에 있다. 잠시 인용한다.

복잡한 것은
복잡한 것이다. 복잡한 것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겸손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성의 원리로 환원하려 했던 것은
자연과학이 취한 미덕이기도 했지만, 자연과학이 극복해야 했던 딜레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게엔 여전히 그 자연과학이 다루지도
못하는 엄청나게 많은 대상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복잡성 앞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 없이 합당한 논증을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지한 지식인들이 취하는 태도다.




그런 복잡한 문제들은 진지한 학자들의 저술로, 그런 고민을 담은 논문으로 출판될 때에는 논의의 대상 속으로 포섭될 수 있다.
우리가 라깡의 허무맹랑함을 비웃을 지언정, 그들의 지적 결과물을 내어 놓은 그 태도조차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칼의
비판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지하게 문제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소칼의 ‘지적사기’는 그 해프닝만으로 기억될
일이 아니다. 이 후에 벌어졌던 과학자 진영과 인문학자 진영의 진지한 논쟁이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그것이 논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그 복잡한 사안들에 대해 진지하고 치열하게 논증의 형태로 제시했다. 이건 상식인 것이다.
논증의 방식이 선수들보다 못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기본 골격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강준만은 이를 논증의 ‘진실성’이라고
에둘러 표현한다. 여기서 강준만과 진중권 사이에 오갔던 그 논의들 전부를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이미 많은 부분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시길 바란다. 이런 게 백투더소스가 아니라고 비난받지는 않겠지.
그러나 결국 링크를 찾아 거는 이 센스).




실상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투정에 불과한 쿨함이 아니다. 진중권마저 쿨하게 욕하고야 마는 우리의 쿨게이들은 실은 태도라는
측면에서 진중권을 욕할 자격이 없다. 논의를 슬쩍 비껴나가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수구꼴통들 뿐 아니라 진지한 다른
진보들에게까지도 어린아이 투정부리듯 쿨하게 행동하는 진중권의 태도는 쿨게이들의 미래태다. 그래서는 이 땅에 진지한 지식인 논쟁이
싹틀 수가 없다. 게다가 요즘의 쿨게이들은 진중권을 욕하면서도 결국엔 진중권을 닮아가는 기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문제다.
욕하면서 닮는 이 사태가 사회의 발전을 가로 막는 대한민국의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부자를 욕하면서 부동산 투기를 하고, 삼성을
욕하면서 위험한 펀드에 투자하는 괴현상의 이면에도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숨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 모든 것은 진중권의
탓이라 하자. 어차피 이런 쿨게이들을 키운 교육제도, 제대로 된 본을 보여 주지 못한 지식인 사회 내부의 문제, 그런 것들이 더
문제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쿨게이론 부족해”는 어떤 훈계나 비난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나은 태도가 가능하다는 상식적인 제안이다. 우리가
그다지도 비판하는 우리 앞세대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누군가 이야기했듯이
“경박단소 키치의 시대, 원본이 사라진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진지함이란 새로운 형태의 소외일지도” 모른다. 허나 우리의 목적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것을 건설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끊임 없이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내가 쿨게이의 쿨함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이유다. 
2009/05/19 – [래디컬(Radical) 바이올로지] – 쿨게이론 부족해


논객(論客)의 논(論)은 논(論)한다는 뜻이며, 논(論)이란

음(音)을 나타내는 侖(륜☞冊(책)과 집(人+一)의 합자(合字)☞冊은 나무나 대나무의 패를 이은 옛날 책, 집(人+一)은 모으는 일, 음(音)을 나타내는 侖(륜ㆍ론)은 책을 모아 읽고 생각하여 정리하는 일)과 여러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며 정리하여 말한다(言)는 뜻이 합(合)하여 ‘논의하다’를 뜻함. 즉 상대방(相對方)과 조리를 세워서 의논하는 일.

<네이버 한자사전>

을 말한다. 고재열 기자는 논객의 객(客)에 더욱 방점을 찍지만, 나는 논객의 방점은 논(論)에 찍여야 한다고 믿는다. 논쟁은 객(客)들만 하는 것이 아니며, 논쟁의 주체도 객이 아닌 까닭이다. 우리가 진중권, 전원책, 손석춘 등을 논객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손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안을  일반인보다 심도 있게 논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논(論)이라는 말은 언중에게는 그러한 전문성으로 인식되는 것이다[footnote]따라서 논객에게 논(論)이 없다면 진중권과 조갑제가 서 있는 지점은 동일하다고 본다.[/footnote].

고재열 기자의 취지에는 나도 동감한다. 진중권이 ‘칼을 빼들겠다’고 한 배후에는, 최근 한예종 사태로 비롯된 그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의 징후가 있다. 고재열 기자는 그러한 권력으로부터 진중권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어떤 의견이던 사회의 다양한 의견들이 무시되는 것은 결코 좌시할 일이 아니다. 특히 대중의 갈망을 잘 표현해 주는 진중권의 가치는 크다.

하지만, 그를 노무현에 빚대어 표현하는 것은 오바다. 욕도 많이 먹었지만 매 순간순간을 진지함과 정면돌파로 일관했던 노무현과, 조롱과 냉소와 회피로 많은 시간을 보낸 진중권에게서 나는 어떤 공통분모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진중권의 전문성을 들어 그를 비판하는 보수 진영의 행태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해당 주제에 토론자로 나선 인물은 그 전공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욱 조리 있게, 그리고 더 많이 공부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진중권은 그러한 자격에 꽤나 부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미학과 출신이라고 운운하는 작자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언급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 내가 진중권을 비판할 때, 그것은 애정어린 채찍이다.

나는 진중권이 강준만과의 논쟁에서 무언가를 배웠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는 싸움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속된 말로 하자면 자기밥그릇을 지켜야겠다는 말로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자기 밥그릇을 지키는 것은 모두의 일상이다. 하지만 한가지는 말하고 싶다. 그가 꺼내들 그 칼이 독설로 그치고 마는 ‘사시미’가 아니라, 무사와 무사가 합을 겨룰때 쓰는 ‘검’이기를 바란다.[footnote]예를 들어 나는 최근 한겨례21에 실린 “집회·시위 ‘글로벌 스탠더드’를 아느냐”와 같은 글에서 논객의 태도를 느낀다.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5057.html[/footnote] 칼을 꺼낸다는 표현이 그동안 냉소와 조롱으로만 일관했던 스스로의 태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리고 내가 제대로 본 것이라면, 이제 내가 진중권을 비판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가 변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면, 나는 강준만이 말했던 것들을 이제서야 진중권이 스스로 인정했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진중권이 권력으로부터 부당한 탄압을 받는다면 나는 그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에 대한 합당한 비판은 계속되어야 한다


11 Comments

  1. 저는 진중권이 논객으로까지 말할 가치는없는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학자적인측면에서는 존중할지몰라도 그에게는 논객이란 단어는전혀 어울리지않습니다.

  2. 그러니까 글쓴 분은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느니까 어지간한곳, 가능하면 모든 곳에 분향소가 설치 되어야 하고,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극우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으로 읽게 됩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예를 갖추고, 추모하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다른 생각이 있다고 아니다라고 밀어 붙이는 것도 민주주의의 방법은 아닌듯 합니다. 나름대로의 소신과 이유로 반대하는 학생들을 인민재판하듯이 넘겨버리는 것도 잘못이네요.

  3. 글에서 말하는 내용은 ‘지식인의 의무’로는 옳다고 봅니다만 ‘논객의 의무’는 아니지 않나요? ‘논객’이라는 말 속에는 논쟁에 대한 참여의 자유로움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과 ‘객’ 중에 어느 한 쪽 방점을 찍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혹 글에서 지식인만을 ‘논객’으로 규정해 두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링크해둔 강준만씨와 진중권씨의 과거 논쟁도 ‘지식인대 지식인’으로 볼 문제지 ‘논객대 논객’으로 볼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글을 봐서는 지식인과 논객을 거의 동의어처럼 간주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안별로 다르겠습니다만 조롱이나 냉소가 많은 진중권씨의 태도가 ‘지식인의 성실함’을 기준으로 문제가 된다고 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논객의 태도로까지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논객이란 말 자체가 인터넷을 근간으로 생겨난 말이고 보면 논쟁의 참여 방식에 대해서만큼은 자율성이 크다고 봅니다. 조롱이나 냉소를 무기로하는 진중권 특유의 풍자적인 글쓰기 방식을 ‘성실함의 부족’으로 귀결시키는 논지에는 동의하기 어렵군요. 문제가 된다면 조롱과 냉소가 아니라 ‘회피’겠지요. 이미 참여한 논쟁에서 끝을 보지 않는 태도 같은 것 말이지요.

  4. 태도를 논할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들 스스로 지식인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진중권은 강단에 섭니다. 논객의 정의가 모호한 것은 고재열 기자의 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우리사회에서 논객이라는 용어는 지식인들 중 정치적 글쓰기를 하는 이들이라는 말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포괄해서 광의적으로 쓸때 ‘인터넷 논객’이라는 말을 씁니다. 다음 글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이미 읽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http://mentalexile.com/321

  5. 그외 민경배 교수의 논객관련 글들을 추천드립니다. 논객들은 치열한 논리와 문체로 생존경쟁해온 이들입니다. 그들을 ㅅ생존경쟁에서 살아남게 만드는 것, 그건 스타일이 아니라 논증의 방식이었을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6. 딴은 그렇기도 하네요. 다만 태도가 내용을 침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죠.

    인터넷이 부여하는 글쓰기의 자유로움이 논쟁을 적나라하게 만들고, 저마다의 파당성을 뚜렷하게 만든 덕에 이만큼 토론이 활발해질수 있었던 측면을 부정하지 못 합니다만 이제는 인터넷의 자유로움이 역으로 토론,논쟁의 장애로 작용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고 판단하신것 같은데 거기에는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이를테면 파당성이 강화되면서 한편으로는 진영논리가 뿌리내린 측면이 있지요. 논쟁 되어야할 문제가 다수진영의 폭력적 배제로 뭍히는 문제 같은 것이 대표적이죠. 적절하지는 않습니다만 변희재의 난무하는 쓰레기 의제 중에 간혹 충분히 논쟁 할만한 의제가 나와도 ‘변듣보’의 명성(?)에 뭍히게 되는 문제처럼요.이 경우 충분히 태도를 문제삼을수 있다고 봅니다.)

    김우재님이 문제 삼고자하는 ‘태도’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인터넷 매개로 변화된 글쓰기를 조건으로써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보면 태도가 내용을 침해하는 문제로 번지지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조심을 요한다고 여겨집니다. 앞으로 언급하시게 될 ‘태도’라는 것이 ‘파당성은 건지고 진영논리는 버리기’같은 것이어야 할텐데…글쎄요. 쉬운 문제는 아니네요.

  7. 동감합니다. 그의 말투는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죠. 그래서야 그의 의견이 아무리 옳다고 한들, 누가 그에게 따를까 하고 예전부터 느껴왔습니다.

  8. 토론 하시는걸 보니, 한자어 논객의 어원이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만.. 쉽지가 않네요.
    한국에서 쓰는 한자어라는게 일본에서 만든것들로, 대다수가 영어 단어를 모방해서 만든것들이라..
    한편으로는 한자어 가지고 뭔가를 정의 내린다는 것이 조금은 코믹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9. 진중권이 포함된 한예종 죽이기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진중권씨가 여유있게 상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여유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상대방 진영이 작정하고 덤벼드는 것 같더군요.

    저도 김우재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그의 논쟁 방식에 대해서는 100%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최근에 황석영, 김지하에 대한 반박은 말꼬리 잡기 수준이었지요),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100% 그를 지지하렵니다. 힘을 보탤 수 있다면 보탤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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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uture Shaper ! 2009/06/02

    논쟁을 지켜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싸움 구경만큼 재미난게 없다’는 못된 심보는 아니다. 살다보니 논쟁을 하는 적도 있고, 나름대로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요령도 생긴다. 그러다 보니 남들 논쟁하는 것 지켜보며 오고가는 심리전을 내 맘대로 복기해보거나, 나라면 이렇게 할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당사자들이야 피가 튀는 일이지만, 내 편이 당하지만 않는다면 느긋하게 관전하며 즐길 수 있다. 그동안 변희재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