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이 발생하기 수 년전인 1980년대 초부터,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인권에 대한 열망은 뜨겁게 분출되고 있었다. 유교정신이 뿌리내린 중국에서 그러한 운동은 서구의 근대화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중국적인 색채를 띈다. 나는 천안문 사건이 단순히 서구에 영향을 받은 근대화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마리 끌레르 베르제르의 번역문을 참고. 번역해 주신 두부님에게 감사) . 중국은 외부에서 받아들인 사상을 언제나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 역사를 지녔다. 천안문 사건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표면적인 슬로건의 기저에는 지도자의 덕을 강조하는 유교적 뿌리가 녹아 있다.
당시 학생들에게 사상적으로 영감을 준 여러 지식인들이 있었다. 문필가이자 언론인인 Liu Binyan, 이론가 Yan Yiaqi, 개혁가 Bao Tong과 Gao Shan, 경제학자 Chen Yizi, 소설가 Zhang Xianlinag등의 논의는 학생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물리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물리학자 팡리즈(Fang Lizhi)다.
1936년에 태어난 팡리즈는 베이징 출신으로 베이징대학교에서 전자기학과 양자역학을 가르치던 물리학자였다. 이후 천체물리학자로 행보를 바꾸지만, 중국인들은 그를 물리학자로서가 아니라 반체제 지식인으로 기억한다. 그를 중국의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Dmitrievich Sakharov)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제어열핵융합의 기초를 마련했던 이 이론물리학자는 군비경쟁시대에 소련의 열핵폭탄 핵실험에 반기를 든다. 그는 소련인권위원회를 만들었고, <진보, 공존, 지적인 자유(Progress, Coexistence, and Intellectual Freedom)>를 출간하며 소련의 반체제 인사, 저항운동가의 활동을 시작했다.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지만 소련의 방해로 수상식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하로프의 모습은 팡리즈를 닮았다.
과학자가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소련과 중국이라는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자유와 인권을 외쳤던 주도적인 인물들이 과학자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민해볼 일이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한창인 지금, 대한민국의 과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부조리한 사회질서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하고 있을까. 나는 그것이 대한민국의 과학, 그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학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역사가 없었고, 또 과학자들 스스로 그들의 역할이 ‘인류평화에의 기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지나치게 좁게 생각하는 편견 속에 서 있다. 팡리즈의 말은 이 땅의 과학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의 인터뷰 중 일부를 번역한다. 그의 말처럼, 과학자들은 불합리하고, 잘못되었으며 악랄한 사회문제에 대해 그들의 감정을 표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자들도 시대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물리학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물리학자들이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서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사회의 불합리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이미 전통이 되어버렸고,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통일성과 조화, 그리고 완벽성을 추구하는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사악한 것들을 논리적으로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진리를 추구하는 물리학자들의 방법이 그들을 매우 섬세하게 만들고, 그것을 찾으려는 용기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선 현대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크다. 과학적 배경지식이 없는 이들은
사회의 주요한 문제들을 명료하게 바라보기 어렵다. 또한 많은 자연과학자들은 그들의 역할이 기술의 진보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도 포함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 과학적 도덕성 문제가 자주 거론되곤 한다. 중국에서 과학적 도덕성이라는 개념은 학자사회에서의 표절을 거론할때만
사용되곤 한다. 이건 정말 좁은 관점이다. 과학적 도덕성이라는 문제는, 만약 과학자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인류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넓은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는 가능성이 있는 혼란을 예고하고 경고하는 일도 포함되는 것이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번역하면서 팡리즈라는 인물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하다고 생각하면서 넘겼는데…
김우재님의 글을 보고 많이 배우게 되었네요
‘과학자의 가치중립성’이라는 것이 가끔 불편했는데,
저런 소신있는 과학자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군요.
종종 놀러와서 글 읽고 가겠습니다.
앞으로 자주 이야기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올 건강은 문제가 없는 듯. http://www.icas6.org/ProgramArea/m_01.html 아시아학 국제학술대회라..영어 초록.
Envisioning a New Paradigm of Civilization for Asia
The Eurocentric historical view of the world can no longer hold itself as a model of universally valid values. We must bear in mind that, despite its enormous subsequent influence, Greco-Roman civilization was a derivative, secondary civilization, not a self-originated, primary one. Asia is the birth place of the majority of primary civilizations.
We have so far been too neglectful of the value of Asian identity. Time has come to reevaluate the entire inheritance of all of humanity within the context of the Asian Continent Civilization as a whole.
“Asian thought” is a fluid structure of discourse that contains all of humanity’s discourses. As such it is not one that can be delimited preemptively according to some parochial cultural dogma or ideology. Transcendental monotheism (Judaism), the cosmic dualism of Good versus Evil (Zoroastrianism), and polytheism (Hinduism) – they all constitute one segment of Asian thought. And yet, within the spectrum of Asian thought there can also be found ideas – wuwo (無我, no self, anātman), wuzhu (無住, no attachment), wuzixing (無自性, no substance, niḥsvabhāva), wusuoyou (無所有, no possession) – that can deconstruct these very same mythic narratives, and change their potentially oppressive ideology into liberating poetry. Going further, one can find within Asian thought a tradition of stringently ethical humanistic thinking that would question the value of all these various soteriological labors.
I believe that the best of Asian values and Asian forms of thought can and should serve all of humanity as it steps into a murky future.
좋은 글을 번역해 주셔거 감사할 따름입니다.
덕분에 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나 도올의 꿈은 담대하군요.
비록 도올 보다 아는게 적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객관적인 건덕지가 조금 필요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도올은 소크라테스는 될 수 있어도 플라톤은 못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나저나 기술과 인간의 거리는 언제나 가까워질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술이 가진 해악성이 도덕과 만나면 괜히 어색해지는 분위기는
마치 여자는 이성을 교란시키는 성적 도구라로 취급하던 중세시대를 연상시킵니다.
도올의 역할이 거기까지라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리고 도올을 판에 빼다박은 대한민국 지식인들의 모습도 안타까울 뿐이고.
기술은 그 자체로 진화하니까요. 지속적인 견제와 사후대처. 그정도로 만족해야 할 듯 합니다. 분명한 것은 윤리학이 해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국민으로써가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깊은 사명감을 갖고 계신것에
무한 감사와 놀라움을 가져 왔었습니다. 배우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구요.
저는 인문학을 전공했고, 인문학조차도 거론할 필요가 없는 정도의 일을 꽤 오래
하고 있는데요, 항상 뭘 모르는지 몰라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해야하고
숨어 있는 세상의 이치와 진실을 찾아다니는 게 인생의 재미난 일면이라 생각합니다.
과학적 배경지식이 없으면 사회의 문제들을 명료하게 바라보기 어렵나요?
지금으로썬 수긍하기 어려운데 과학자로서, 일반 지식인들은 이러한 과학적 지식이 없으면
명료하게 모르겠구나…생각하시나요?
원체 제가 당신의 광팬이고 저로서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면서 그저 챙겨 읽기도 하기에 반박하고 싶진
않은데 믿고 싶지도 않은 이 내용이 정말 궁금합니다.
지금 이 시기를 참아내며 희망으로 겪어가고 고민하는 제가 더욱 정확히 현세를 파악하기 위해
최소한 가져야할 과학적 배경지식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 알려주세요 ^^
팡리즈의 말은 과학과 기술이 사회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를 명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느 과학기술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은 문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팡리즈의 말은 스스로의 위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격한 어투를 쓴 것 같습니다. 다만, 예전에 이야기했듯이 이젠 사회도 과학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이나 인문학에 대한 교양을 강조하듯이, 과학과 기술에 대한 교양도 강조해야 한다는 정도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저는 팡리즈의 말은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어느정도 해당된다고 생각하지만그게 일반화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최소한의 과학적 배경지식을 얻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과학대중서를 읽을 수도 있고, 신문의 과학분야들을 섭렵하셔도 됩니다. 그러다 체계적인 지식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전문적인 책들을 보기 시작하시면 됩니다. 학문엔 왕도 따위 없습니다.
과학적 배경지식이 없어도 사회문제를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만, 과학기술이 현대사회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고려해 보았을 때,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점덤 더 중요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도올 선생은 한국의 온갖 사회적 모순이 집결돼 있는 인격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면도 엿볼 수 있고, 부정적인 면도 엿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최종 판단은 유보해 놓은 상태이지만, 제가 보기에 도올 선생의 가장 큰 문제는 그에게 계급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계급적 자각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얘깁니다. 도올의 모순성과 사회적 한계는 여기서 비롯됩니다.
학문적 성숙과 심화를 위해선 정치적 깨달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저의 잠정적 결론입니다. 학문적으로 잘 나가던 철학자 하이데거가 형편 없이 좌초해 버린 근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미숙한 정치적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도올 선생께 학자로서의 엄밀함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그 분께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게 될 것입니다만, 적어도 도올 선생이 여러 사람들 보기에 그럴 듯한 학문적 엔터테이너로 끝나지 않으려면 당신의 계급적 모순을 몸소 처절하게 느끼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처절함까지는 결여돼 있는 까닭에 위정자들에게 도올 하면 ‘재미’는 주지만 ‘위협’은 주지 못하는 안전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올은 늘 부르주아지라는 그 지긋지긋한 사회적 안전망 속에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당신을 자리매김시켜 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도올 선생이 자신의 맏형이나 누이와 달리 대선 후보로 이명박을 지지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어쨌든 근래 김지하의 언행을 봐도 그렇고 도올의 장형을 봐도 그렇거니와 1970년대에 유신 정권에 저항했던 소위 개혁 인사들은 상당수가 알고 보면 정치적 보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시대가 그들에게 그러한 과제를 부여했을 뿐이겠지요.
과학자의 이른 바 ‘정치적 중립’의 문제군요. 공무원도 그렇고 과학자도 그렇고 일반적으로 ‘정치적 중립’의 의무는 본디 정치적 간섭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하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상하게도 ‘참정권의 제한’으로 인식되고 있네요.
그건 그렇고 중국의 이른바 ‘주체적 수용’-신영복 교수님은 이것을 ‘대륙적 포용력’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만- 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지리적/규모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저는 역동적인 이 땅의 문화수용의 역사도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도올 말처럼 그냥 유교 복덕방일지 모르지만, 관계만으로 존재하는 그 안에서 새로운 주체성이 탄생할 날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주체적 수용은 우리에게도 있었는데, 일제시대를 거치며 많은 것이 단절된 느낌입니다. 에효..
역시…
다소 무례하거나 모자란 질문일 수 있었을 텐데,
요즘은 무지는 명백히 ‘죄’이며, 알 권리가 아니라
의무란 생각이 듭니다.
온전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지만…다소..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많이 생각도 하고 배우기도 하네요
화이팅~~!!
무례하지도 않았고 모자르지도 않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습니다. 자책하지 마시고 자주 들르세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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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에요. 과학자가 되야나하?? 고민했…
전 광팬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자주 들를꺼구요
…네..자주 들를께요 ^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