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2009/06/16)’라며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변희재 회장의 개인적 사정을 알지 못하는 제 3자가 그의 자유분방한
행적의 기저에 ‘밥벌이 문제’가 있다고 단정한 것이 옳은 일은 아닐지 모른다. 누구도 변희재 회장이 되어보지 못했고, 될 수
없기에 우리는 변희재 회장의 요란한 행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실상 황진태 연구원이 프레시안의 기고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변희재 회장의 말처럼 젊은 논객들의 밥벌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 예로 변희재 회장을 든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하지만 변희재 회장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의 궤적을 지닌
이를 예로 드는 것보다 더 적절한 예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황진태 연구원의 발언은 이해할만 하다. 원래 사례란 가장 극적인
것을 고르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황진태 연구원에 의해 하나의 예로 전락해버린 변희재 회장의 불편한 심정이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칸트의 정언명법과 변희재 회장의 이중잣대
칸트는 자신의 정언명법을 여러가지 공식으로로 표현했는데, 그 중 하나는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칙으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말이다. 아마 칸트의 정언명볍중 이 말이 가장 유명하리라 생각한다. 칸트의 도덕율에 대해서는
복잡한 해석들이 난무하지만, 필자는 뉴턴의 고전역학으로부터 철학적 종합진술의 확실성을 구했던 그의 사상을 이해하면 이 문제가
쉽게 풀리리라 생각한다. 변희재 회장도 이에 동의하리라 본다.
철학적 개념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식은 자연과학, 특히 17세기 물리학의 등장으로 시작됐다.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논리적 확실성을 물리적 세계와 등치시키려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철학자들은 논리적 확실성이 물리적 세계에 대해
공허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상식적 문제에 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종합적 분석을 내놓은 사람이 바로 칸트다.
물리적 세계를 포괄하는 ‘종합진술’의 확실성이 논리적 세계인 ‘분석진술’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어려움 속에서, 칸트는
종합진술의 확실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했다. 우선 칸트는 종합적 진술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를
‘선험적 종합판단’이라 불렀다. 경험과 이성 모두에서 확실한 진리의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했던 셈이다. 그 가능성을 불문하고
이것은 위대한 시도다. 칸트야말로 플라톤과 데카르트처럼 이데아의 실재나 논리적 속임수에 의지하지 않고 최초로 종합적 진리를
발견하고자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종합적 진술을 수학과 물리학의 원리들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지식이 존재한다고 묻지 않고, 어떻게 이런
지식이 가능하냐는 식으로 질문을 바꿨다. 그리고 그 답은 바로 물리학과 수학적 물리학이 종합적 지식을 증명해준다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칸트는 모든 진리의 가능성을 물리학, 정확히는 뉴턴의 수학적 물리학에 기대는 것에서 구했다. 그것이 칸트가 당대의
과학적 발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철학으로 종합하려했던 처음이자 마지막의 유일한 철학자라 불리는 이유다. 칸트가 대학에서
물리학을 비롯한 당시의 발전하던 과학을 강의했다는 점만 봐도 그 철학의 일관성은 뚜렷한 것이다. 그는 과학에 민감한 철학자였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이러한 시도의 연속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부터 칸트는 이러한 종합적 판단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나아가 뉴턴물리학의 인과원리로부터도 다시금 그의 논증을 확신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칸트는 과학의 권위에 기대 철학자들의 염원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실천이성비판>은 윤리학에 대한 칸트의 또다른 <순수이성비판>적 답이기 때문이다.
역시 칸트는 또 다시 수학의 공리들과 물리학의 공리들로부터 윤리학의 공리들을 연역해내려 한다. 위에서 언급한 ‘정언명법’은
그러한 고민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선험적이면서도 종합적인 윤리학적 진술을 논의하던 칸트는 갑자기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한다. 왜냐하면 칸트에겐 그가 제안한 도덕의 원리들이 적용되는 영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역설이 등장한다.
물자체의 영역엔 물리학적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칸트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결국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칸트는 자신의 종교적 도덕을 구출하기 위해 물리학적 인과율을 거부하는 영역을 창조하는
비일관성을 시도한다. 이러한 비일관적이고 비극적인 결론에 대해서는 칸트도 저술을 통해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칸트의 반과학적 윤리학이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해 악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사이의 괴리에 개념치 않고, 단지 <실천이성비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진정한 종합가 칸트를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솔직한 철학은 칸트에서 끝났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변희재 회장이 주장하는 전문성에 대해 필자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칸트의 정언명법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하다. 황진태 연구원에게 들이대는 그 잣대를 빅뉴스의 필자들에게도 들이대라는
것이다. 빅뉴스의 필자들이 과연 황진태 연구원만큼이라도 전문성을 갖추었는지는 묻지 않고, 황진태 연구원의 자조에 가까운 목소리에
‘전문성에 목숨을 걸 자신’이 있느냐 묻는 것은 비겁하다는 말이다. 빅뉴스 필진들의 전문성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다.
빅뉴스 필진의 참담한 전문성(변희재 회장의 ‘전문성’을 기준으로)
우선 스스로를 ‘문명비판가’가 부르는 김로빈의 경우를 보자. 그는 최근의 칼럼 ‘ 소통을 주장하는 사회와 낡은 지식인들(빅
뉴스, 2009/06/19)’을 통해 문명비판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여실히 증명한다. 무려 소통을 강조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문명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삽 한자루’론을 주장한 진중권 교수에 대해
이렇게 비판의 포문을 연다.
문명을 거부하며 도망가고, 문명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야만인들, 그들을 몰살할 것이 아닌 그들이 문명사회로 진입할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추고 손잡아 이끌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두 개의 다른 문명 속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능을 기르고 그럼으로써 각 진영의 책임감 있는 문명의 건설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야만문명의 야만성을 기르고 타 문명에 공격적인 그것을 마치 그 문명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로써 보존받고 길러야할 그것으로 보고 이를 획책 고무 발전해야 한다는 옹호논리를 가지고 온다면 그 지식인이야 말로
야만문명의 사악한 주술가로써, 진중권 교수의 비유로 말하자면 이것이야 말로 ‘배후에 있는 사악한 거대 권력’ 에 해당하는
것이다.
얼마나 문명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서양사를 단 한번만 읽어봐도 이런 말은 쉽게 하기 어렵다. 문명의
발전은 이성과 합리성이 승리하는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제국주의는 소위 문명의 꽃이라는 이성과 합리성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바로 그 시기에 등장해 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김로빈씨가 경멸하는 아프리카의 야만인들을 노예로
삼으며 문명의 추악한 탐욕을 철저히 까발렸다. 서아프리카에는 여전히 노예선으로 실려가던 바로 그 노예해안이 남아 있다.
김로빈씨에게는 매우 미안하지만, 문명의 역사 어디에도 타 문명에 공격적이지 않은 아이덴티티를 지닌 문명은 없었다. 정수일 교수의
말처럼, 고대로부터 지속적으로 문명의 교류가 이루어졌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문명간의 쟁투가 더욱 뚜렷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에 야만문명이 더욱 공격적이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언제나 서구의 눈에 비판 야만국가들이 더욱 평화를
원했다. 아프리카가, 인도가, 동아시아가 그랬다. 김로빈씨가 사는 대한민국도 그런 야만문명의 평화를 간진한 역사가 있는 땅이다.
게다가 문명은 국론통일의 시기에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국론분열, 즉 백가쟁명의 시기에 더욱 발전했음을 김로빈 문명비판가께서는
되내여 보시길 바란다. 위대한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빵의 쟁취>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를 타락시키고 더럽히는 것이다”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런데도 모든 문명 생활은 하나의 거짓이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과 우리 자녀들을 위선과 두 얼굴을 가진 도덕의 실천에 익숙하게 만든다. 그리고 두뇌는 거짓말을 하기에
불편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궤변으로써 기만한다. 위선과 궤변은 문명인에게 있어 제2의 천성이 된다.
김로빈 ‘문명비판가’께서 주의 깊게 읽으셔야 할 대목이다.
사실 이런 구체적인 비판도 필요 없다. 김로빈씨는 그의 유일한 저서로 보이는(그는 조만간 저서를 출판하겠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출판하지 않고 있다. 분발을 바란다) <인간 혁명 게릴라 경서>에
서 이 책이 “인간사의 본질적인 문제를 파헤칠 목적을 가지고 썼으므로, 청년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데 기름진
토양을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세상을 헤쳐나가는데의 에센스를 담아 놓았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틔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현재 한국에 나와 있는 책들 중 이러한 핵심을 명료하게
집어낸 책을 본적이 없다”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위에서 밝혔듯 영혼세계로 다가가기 위해, 영혼을 밝히기
위해 수많은 도전이 있어야 비로소 높은 영혼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이 도전이라는 것이 바로 challenge이다.
control 이란 말의 동의어로 master란 말이 있는데, 쉽게, master란 말은 현재 학위를 나타내는 말로 많이
쓰이고, 이 의미는 어떤 영역의 지식에 있어서 정통한, 어느 분야에 있어서 알만 한 것들을 다 알고 있는 지식이 많은 전문가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master또한 어떤 dictate하는 군림자, 어느 대상의 조종자라는 뜻 또한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곧 지식 체계라는 것이,(관념 체계, 가치체계 포함)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도구로써
이용될 수 있고, control 또한 dictate하는 식의 저급 상태, 좋지 않은 상황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 그러한 사실은 혹독하게 판명된 바 있다.) 지식은 어떤 사람을 부정적 의미에서의, dictate적인
의미에서의 control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어떤 대상의 의식 세계에 어떤 도구를 심어 놓음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이게 하는 등 저급의 컨트롤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폐해를 피하기 위해선 어떤 것이 필요한가? 간단하게 말하면
challenge가 필요하다는 말로 설명하고 싶다.
필자가 무식해서인지 도무지 이 책이 의도하는 바를 알기 어렵다. 게다가 변희재 회장의 빅뉴스에서 문명비판가로 활동하는 자칭 타칭
‘전문가’여야 할 김로빈씨의 책에 대한 그 어떤 서평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변희재씨의 생각으로는 김로빈씨가 전문성이 있는
논객인가. 그래서 황진태 연구원에게 일갈했듯이 김로빈씨에게도 ‘목숨을 걸 준비가 돼 있느냐’라고 물을 수 있는가. 필자는
변희재씨가 이미 천명한 바 있듯,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모든 논객들이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 그렇다면
황진태 연구원에게 향한 그 독설, 김로빈씨에게도 쏟아낼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필자는 변희재 회장을 존경하려 한다. 자기식구를
비판하지 않고, 자기식구를 지키기 위해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 이나라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의 무능, 그 기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밝혀지지 않았는가. ‘패밀리는 건드리지 말자’고.
자칭 문화평론가인 김휘영씨는 어떤가. 필자가 조사해본 바로 그는 안철수 연구소의 IT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한 바 있는데, 현재 그가
전방위적으로 쏟아내는 발언들은 가히 문화평론가라 부를만큼 광벙위하기 짝이 없을 지경이다. 구태여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도
않았고, 실리콘밸리처럼 한번의 실패로 젊은 사업가들을 몰살시키지 않는 제도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서, ‘비정규직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그의 몰상식함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김휘영씨는 문화평론가들이 한 권쯤 가지고 있다는 그 흔한 저서
한 권이 없다. 물론 필자도 학위나 저서 따위로 전문성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비록 변희재 회장이 진중권
교수의 학위 문제를 연일 거론하며 비난하고 있지만, 필자는 변희재 회장이 학사출신이라는 이유로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변희재 회장은 99년부터 포털에 대항해 열심히 활동해 왔으며 이는 강준만 교수도 인정하는 바 아닌가. 필자는 변희재 회장의
전문성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변희재 회장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변희재 회장의 윤리적 잣대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필자들에게도 공평하게 겨눠질 수 있는가라는 아주 소박한 물음에 있다. 그래서 칸트의 정언명법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옳바로 키우는 게 정말 힘든 일이다. 회초리를 쓰시길 바란다
칸트의 정언명법과 황진태, 김로빈, 김휘영에 대한 변희재 회장의 이중잣대를 이해했으면 이제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이 윤리학적
황금율이라 이야기했던 명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공자가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 표현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적 중용이라
표현한 이 황금율도 실은 아주 소박한 상식에 기대고 있다. “남이 네게 했으면 싶지 않은 일을, 너도 남에게 하지 말라는” 아주
쉬운 일상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변희재 회장 정도의 논객이라면 이런 말을 통해 필자가 주장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리라 믿는다.
필자가 김로빈, 김휘영에게 “전문성에 목숨걸 준비가 되었느냐”라고 묻는 것이 싫다면, 변희재 회장도 함부로 누군가의 전문성에
대해 목숨을 걸라는 식의 허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식도 못챙기면서 남의 자식을 탓하는 부모는 꼴사나운 법이다.
실상 전문성이라는 개념은 얼마나 규정짓기 어려운 것인가 말이다. 특히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 강조되고, 최재천 교수가
통섭원을 통해, 여러 인문학자들은 학문간의 소통을 통해 융합이 강조되는 시점에서 도대체 변희재 회장이 말하는 전문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변희재 회장처럼 한 분야에서 10년정도 일하면 전문성이 생기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심지어 논객이라는 스스로가 원하지도 않는 칭호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경제학자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없고, 과학자가 아니면 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말인가. 변희재
회장의 전문성 개념은 지나치게 협소하다. 필자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과학자로서 소통의 문을 아예 차단하는 변희재 회장의
전문성 개념에 동의할 수 없다. 아마 변희재 회장은 그런 철학 속에서 한예종의 ‘통섭프로젝트’를 증오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통섭은 시대정신이다. 변희재 회장도 포털 전문가, 미디어 전문가로 불리기 위해서는 아마 조만간 과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논문에서 존 케이스는 “기상전문가가 아니라도 바람이 어디로 부는가는 누구나 알 수
있다(Economic and Energy Crisis, 2008)”라고 말했다. 변희재 회장의 행적을 통해 지식인계의 비정규직
양산과 논객들의 배고픔을 논하는데 있어 변희재 회장이 주장하는 만큼의 전문성 따위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아무데나 전문성을
들이대는 것은 위험하다. 도대체 지식인의 밥벌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 어떤 방식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변희재 대표가 매번 강조하는 ‘전문성’이라는 말이 들릴 때마다, 필자는 이 말이 ‘전대미문성’의 줄임말은 아닌지 고민한다. 융합의 시대정신을 가로막는 그 말, 전문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나 잘하세요’. 이거군요.
네
내용은 점잖은 데 이거 무지 웃기네요. 큰 웃음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디씨 진중권 갤에선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김휘영씨는 현재 영어학원강사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프로필이 죽 나오는데 다소 황당합니다.
http://www.abc.co.kr/2k6/expert/detail_tutor.php?tutor_id=wepass
김로빈씨는 중국 유학 후 중국어와 영어 강사로 잡다하게 활동했으며, 인간혁명게릴라 경서라는 책을 낸바 있네요.
http://gall.dcinside.com/list.php?id=jinjungK&no=52862&page=1
아무튼 두 사람 모두 딱히 ‘전문성’과는 거리가 있어보이는군요. 하기사 변희재씨가 스스로 이야기하는 전문성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야기가 틀려질 수 있겠지만요.
원래 웃기는데 재주가 없습니다. 디씨에 안들어가니 몰랐는데 대단한 정보력이군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변희재씨는 강사출신을 좋아라 하는군요
드보르잡
전대미문성에 올인..ㅋㅋㅋㅋ
그나저나 고소당하는거 아닙니까? 묻지마 고소의 달인에게 괜히 트집 잡히실라.
전대미문성에 올인 2.
개똥같은 듣보잡 색이에게 더이상 신경쓰지 맙시다. 악플보다 무서운게 무플이지 않습니까. 저런 색이는 주변에서 떠들어줄수록 좋아할껄요.
아..드디어 웃긴건가.
그럼 변태..
고소당할 거리는 절대 만들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에 나와 있는 책들 중 이러한 핵심을 명료하게 집어낸 책을 본적이 없다” 자기 책을 이런식으로
평하는 사람을 좀 심각하게 다루신 건 아닌지….
우리 듣보나 이 문명평론가라는 사람들….아우…손발이 오그라 들어서.
허경영 전 대통령 후보님이 헐 나으신 것 같다는….ㅎㅎ
웃기는 건 짤방으로 하시라는.. 저처럼 공룡을 탄다든가, ..
이전 글을 보다 문단에 대해 쓰신 글이 있어 찔리는 마음에 적습니다.
전 광고회사 전력이 있습니다.
글에 대해 엄격하기는 하지만
줄 바꾸기를 함으로써 리듬을 생성하는 방식도 좋아합니다.
그런 리듬이 소설가 박민규씨 같은 형식도 낳았겠지요.
그냥 엔터를 함부로 치는 네티즌으로서 찔려서 그렇습니다. ^^;
요새 빅뉴스에 댓글 다는 재미에 푹 빠진 threk이라 합니다.
빅뉴스 댓글러로 인해 김로빈씨의 문체가 많이 호전되어서 뿌듯함을 느낍니다. -_-;
재미있는 글 잘 봤습니다.
저도 전대미문성에서 ‘풋~’ 했습니다.
김로빈 문명비평가 님께서 이 글의 반박글을 쓰셨습니다.
시간 많으시면 들어가 보세요.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0774
건필하세요.
threk님 빅뉴스 댓글 잼게 보고있습니다. ㅋㅋㅋㅋ
저도 한때 빅뉴스 비판적 댓글러였으며 자게에도 비판글을 종종 올렸는데 언제부터인가
글을 쓸려면 회원가입 창이 떠서 안쓰고 있습니다.ㅋㅋㅋㅋㅋ
안쓴지 꽤 되었는데 심심하더군요…. 나같은 초짜도 비평하기 좋은 허접한 빅뉴스가
그래도 재밌었는데 말이죠.. ㅋㅋㅋㅋㅋ
네임드를 노렸으나, 중간보스가 걸렸어요
역시..네임드를 노렸는데..중간보스가 걸렸어요. 슬픈..
시가 아닐 경우엔, 일정한 형식도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블로그 글쓰기엔 형식의 자유로움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뭐 그런 생각
제가 너무 수준을 올려 놓았군효. 농담입니다. ㅋ
전대미문성ㅜㅠ)b
변희재가 지적하는 것은 황진태라는 논객의 정신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실력쌓을 생각보다 현실생계를 걱정하는 정신자세 말입니다. 대충 글을쓰고 책을 읽고 하면서 논객생활하면서 현실적 생계를 보장 받으려는 정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현실적 문제를 가지고 추측해서 변희재의 사상전환에 근거로 제시되니 변희재의 입장에선 혀가 찰 노릇이죠. 적어도 글의 논쟁에서 상대의 입장을 추측 하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나 상황에서 벗어나서 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황진태의 글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김우재님이 말하는 김로빈과 김휘영의 전문가 자질 운운하는 것도 역시 핀트가 한참 빗나간 거 같습니다. 변희재가 말하는 것은 학벌도 아니고 책을 몇 권 써 냈냐도 아닌데 님은 ‘실력’을 말하니 말입니다. 실력이 있다 없다는 상대적인 것이고 논쟁을 제대로 해봐서 실력을 판가름 내는 것이고 변희재가 말하는 것은 전문가가 되기 위한 정신적 자세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 정신자세를 굳이 자신의 필진에게 강조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황진태에게 변희재가 말하는 것은 그가 변희재의 사상전환에 자신의 현실적인 생계문제를 적용하는 잣대를 꾸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김로빈과 김휘영에게 그런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라는 김우재님의 말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죠.
희재야. 로빈이는 이제 불러들이자. 정말 못봐주겠다. 나보고 김 박사후라고 하지를 않나. 뇌구조가 의심이 간단말야.
빅뉴스는 필진의 전문성뿐만 아니라 기자도 좀 이상합니다. 이런 영화 리뷰는 처음 봤습니다.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0677
이 글은 진지하게 읽으실 필요는 없는 글입니다. 빅뉴스라는 코미디 신문을 진지하게 비판할 가치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휘영씨의 위의 프로필을 보니 뭔가 이상하네요. 원래 김휘영씨는 진중권씨와 같은 해에 서울대학에 입학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진중권씨가 재수해서 입학했다고 하니 김휘영씨가 굳이 한 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하더라도 겨우 진중권과 김휘영은 두 살 터울입니다. 진중권씨가 올해 47인데 김휘영씨가 두 살 적다하더라도 45입니다. 근데 위에 누가 올려놓은 프로필에 김휘영씨가 67년생이며 나이는 43으로 되어 있군요. 진중권씨가 63년생이며 47이라면 김휘영씨는 겨우 64~65년생 그리고 나이는 45~46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제가 알기론 김휘영씨는 현재 무역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해외에 출장을 자주 다니고 비즈니스상 바이어도 자주 많나는 걸로 아는데 지금 영어강사로 재직중이라는 것은 뭔가 생뚱 맞네요….혹시 다른 사람 프로필에 김휘영씨 사진과 이력을 첨가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