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그다지 심오하지 않다. 위대한 과학자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적 문제에 관해 심오한 견해를 제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다만 우리는 워딩턴의 문제의식에서 과학과 사회의 관계, 과학자의 지위에 대한 문제등을 짚어볼 수 있을 듯 하다. 그것으로 우리가 워딩턴에게서 얻을 것은 충분하다고 본다. 그저 모든 과학자가 사회문제에 관해 침묵하지는 않았었다는 점, 그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대한민국에 그런 시대가 올런지, 나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희망을 품기엔 대한민국에 과학이 정착하는 데 거둬내야 할 장애물이 너무나 많다. 정치와 행정가들만이 아니다. 학자들이 가장 큰 적이다. 미친 세상에서 워딩턴의 이 미친소리가 정상으로 들리는 건 그 때문이다.
인간이란 그들이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더 그들이 속한 사회의 산물이다. 노예제 사회나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식민지에 사는 사람은 -아무리 정상적이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만나는 모두를 평등하게 대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평균적인 영국인이 엘리자베스시대의 악당이나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들처럼 행동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법률적인 문제 때문은 아니다. 거기엔 좀 더 심오한 문제가 있다. 인간의 개성은 그가 살아왔고, 그래서 맞추어나가야만 했던 바로 그 사회의 양식에 의해 주조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확히 그 반대도 진실이다. 문명은 언제나 그 문명에 부드럽게 순화되지 못하고, 좀 더 나은 세상으로의 개조가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 의해 도전 받고 변화해 왔다. 최근까지도 사회적 보수세력은 이와 같이 껄끄러운 시도와 도전들에 대해 단호한 대응책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해당 사회에서 오래 살아온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인간은 언제나 그 사회가 옳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따르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바꿀수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기만 하다면야 이는 아주 좋은 논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논변은 더이상 타당하지 않다. 전세계 각 대륙의 인류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해온 인류학은 인간의 본성이 극단적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인간 본성의 기저에 있는, 절대 불변할 것이라고 생각되던 그런 것들조차도 이제 모호해 보인다.
한 동물과 다른 동물 간의 차이,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차이, 사나움과 부드러움의 차이, 용기와 교활함의 차이, 풍부한 상상력과 위트 없는 아둔함의 차이, 이런 것들이 위계와 계급의 탄생, 특별한 성직자 그룹의 탄생, 예술가와 예언자의 탄생에 대한 힌트가 된다. 이와 같이 일반적이고도 간단한 단서들과 함께하면서, 인류는 스스로를 위해 그 안에서 형태와 의미에 의해 자신의 삶을 고귀하게 만들어줄 문화적 구조를 건설해나갔다. 각 민족들은 어떤 단서들은 선택하고 어떤 것은 무시하는 방식으로, 인간 잠재력의 특정한 부분에만 강조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문화적 구조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 나갔다. 어떤 문화는 주로 인간의 상처받기 쉬운 자아를 이용해서 모욕을 주고 수치를 안겨주는 방식을 고수한 반면, 어떤 문화는 완고할 정도로 용기를 강조하기도 했다. 줄루나 마사이와 같은 사회는 모든 사람을 나이에 의해 서열화하는 것을 기본적인 사회조직의 수단으로 삼았다.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이들을 샤먼으로 삼고, 이들의 발언을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보통 사람들에게 법으로 삼기도 했다. 바통가나 남아프리카의 사람들처럼 노인과 아이를 모두 공경하지 않는 사회도 있었고, 인디언들처럼 어린 아이나 노인을 신성시하는 사회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마누스나 근대의 미국에서는 어린 아이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으로 생각했다. 그 어떤 문화도 나이나 성별과 같이 눈에 잘 띄는 특징을 이용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그건 모든 남자들은 비밀을 가질 수 없다는 필리핀의 어느 부족이던, 남자만이 아이와 즐거울 수 있다는 마누스족의 문화던, 너무나 신성한 것이라 여기던 집안 일을 여자에겐 금지했던 토다 족의 문화던, 여자의 머리가 남자의 것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하던 아라페쉬족의 문화던 상관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매우 제한되어 있던 우리의 선입견을 넘어서는 아라페쉬족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사고를 발견했다. 아라페쉬족의 남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역할을 담담하기도 했고, 성교에 있어서도 여성처럼 행동했다. 이와는 반대로 먼더거머족의 남성과 여성들은 매우 공격적이고 주저함없는 성행위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대하도록 길러진다. 이러한 성격은 매우 방종하고 폭력적인 현대사회의 남성에서나 그 전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세번째 부족인 챔불리족의 경우엔 우리가 사는 사회와 정반대로 뒤바뀐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나타난다. 챔불리족 사회에서 여성은 지배적이고 냉담하며 상대를 주도하려 하는 반면, 남성은 책임감이 없고, 감정적으로 매우 의존적이다.[footnote]이 인용구는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의 <세 부족사회의 성과 기질>의 일부다.[/footnote]
내가 이처럼 긴 인용구를 삽입한 것은, 이 인용구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유연하며 -그것이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던 간에 어느쪽으로던- 사회에 의해 다듬어지게 마련이라는 점을 잘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에게 정말로 갱생의 여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변하지 않는 짐승에 불과하다면, 문화적 활동에 대한 강조나, 사회에 의해 변화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향상시킬 수 없다면, 인간을 만든다는 것을 논할 목적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비관론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우리가 인간의 가장 고귀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왔던 것들; 이타성, 불합리한 것과의 투쟁, 타인에 대한 사랑 등도 모두 그가 살고 있는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향상되고 바뀔 수 있는 것들이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다. 아마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전쟁이나 실업과 같은 혼란스런 사회적 시스템에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는 적을 것이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사회의 발전은 특별히 악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조금씩 인정하는 과정의 증폭으로 인해 마구잡이식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르고, 그 결과로 일반적인 관점과는 합치되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사회가 강요해온 것들로부터 벗어났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기를 원했었는지, 어떤 종류의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가장 먼저 발견할수 있다면 더욱 좋을지 모른다.
인간에게 내재하는 바람직한 측면이 무엇인지는 매우 명확해 보일수도 있다. 열정, 인내, 창의성과 같은 덕목들을 나열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보통 현재 사회의 골격 속에서 그 측면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사회가 포함된 모든 전제 조건까지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골격이 낡은 것이고, 시스템이 오류를 범하기 시작했다면 무엇이 바람직한 행위들인지는 불명확해진다. 최근 들어 독일과 러시아가 선택한 시스템, 예를 들어 독일의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와[footnote]히틀러의 나치즘을 말하는 듯 하다.[/footnote], 러시아의 인류 진보에 대한 사심없는 희생[footnote]아마도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 같다[/footnote]은 우리가 특별히 가치를 두지 않던 것들이다.
하지만 새로운 삶의 씨앗이 바로 여기 우리들 속에 있다. 새로운 이상적인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낙서로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록, 일상의 덕목들이 위험에 처해질 수록, 새로운 삶의 조건들은 발전해왔고, 그러한 조건들로부터 최대한의 수혜를 뽑아낼 수 있도록 해왔던 덕목들은 더욱 선명해져왔다(수사 번역). 우리들 중에서 인간 잠재력의 발전을 계획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이들은 예술가와 작가들이었다. 문화의 기능은 대다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상적인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신비주의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로부터 빌려온 개념으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아니 적어도 가장 중요한 문화종사자들의 책무는 즉시적으로 실용적인 가능성들의 최대한의 탐사에서 비롯된 영적 풍요를 사람들에게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리스의 문화는 노예제 사회가 오를 수 있었던 최고봉이었다. 르네상스의 문화는 그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상황속에서 새롭게 발견된 지식들의 잠재성을 가지고 일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존재의 물적 조건이 문화의 본성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footnote]아마도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두고 하는 이야기같다.[/footnote]. 하지만 물적 조건이 제한하는 것은 사실이다. 기술적 지식의 상태, 사회적 동력의 균형이 사람에게 기회를 부여한다. 주어진 것으로부터 최선의 것을 만드는 것은 그에게 달린 일이다. 이러한 노력들 중에, 진보의 선봉대 중에서도 척후병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온 것은 바로 작가, 예술가, 과학자, 기술자 들이었다. 우리가 근대적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운 것은 요즘의 문화에서였고, 바로 그것을 알 때에만 우리가 창조해나가야 하는 정치와 경제 시스템이 어떤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과거에는 예술가와 작가들만으로도 인간의 이상을 물질적 세계에 적용하는 이런 문화의 주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과학자들과 협조할 필요가 있다. 200년전만 하더라도 인류의 물적 조건들은 매우 천천히 변화했었다. 천천히 떠오르던, 그리고 문화적 활동이 밝혀내야만 했던 새로운 삶의 잠재력들은 사회의 경제적 조직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제도로, 봉건제에서 교역과 자본주의로. 한 역사학파들의 주장처럼, 이러한 전이들은 새로운 물질들을 다룰 수 있게 해준 기술적 진보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봉건제의 몰락은 수력을 이용한 풍차와 대량의 광부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적인 개량은 최후의 일격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이러한 변화를 촉발시켜 많은 이들의 삶을 변화시킨 주요 동인은 그 대다수의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문제들이 그들로 하여금 물질적 기술에 의하지 않고도, 경제적 상태와 이러한 전이들을 연결짓게 만들었다. 기술자들은 그들에게 어떠한 감사도 받지 않았고, 그들이 배제된 해결책을 만드는데 일조하지도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은 완전히 다르다. 구시대의 삶의 골격을 뒤흔드는 대부분의 난제들이 기술적 변화로부터 야기된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고 있다. 여기엔 두 가지 작동 방식이 있다. 새로운 발명과 새로운 프로세스들이 일반인들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자동차, 전기불, 전화기, 라디오 등이 세익스피어 시대의 어른이 일주일도 견디기 힘든 정도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직접 노출되지 않은 다른 기술적 진보들이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변화시키도록 만들었고 결국 간접적으로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사업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산 유닛의 거대화-공장, 상사, 주식회사 등등-는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경제체계에 의해 영향받은 것이지만, 순전히 경제적인 것 이상의 무엇이 있다. 그것은 근대 기술적 방법론에 의해 지배받고, 이러한 방법론들이 사용되는 경제 시스템에 의해 일어난다. 인간은 대량생산과 대규모 경영의 혜택을 자발적으로 거부하지 않는한, 중세의 장인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문명이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 또 기술적 진보가 안겨준 풍요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이 작가들과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함께 기술적 진보가 안겨주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이를 일반인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문화적 활동에 있어 과학자들의 협업은 보잘것 없었다. 그들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고상한 직업적 활동으로 주어진 지위에 도전하지 않는 것에 만족했다. 그런 과학에선 악취가 난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은 인본주의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학에 대한 이러한 통념은 실은 과학이 대학이라는 특권 조직에 자리잡기 위해 치뤄야 했던 일종의 페널티였다.
17세기에 과학은 고전이나 신학, 형이상학과 학문적으로 숭상받기 위해서, 또는 대학의 석좌교수 자리를 위해서 경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학은 과학이 사회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데 있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허영을 부리지도 않았다. 영국 과학자 사회의 중심인 왕립학회는 1662년 “인류의 물품은 교역에 대한 자연학자들의 통찰에 의해 더욱 증가될 수 있을 것이다”는 말로 보일에 의해 표현된 믿음을 비웃은 일군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중 대부분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경향에 가치를 두는” ‘보이지 않는 대학’에 이미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가 현재 우리가 부르는 말로 과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웬과 같은 건축가, 사뮤엘 페피스와 같이 지금은 그의 일기로 유명한 영 해군사령부의 대표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보다 이른 시기에는 토마스 브라운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두 명의 인물이 한 사람에 의해 과학적인 관심과 문화적인 관심이 어떻게 융화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 요즘에는 과학과 예술 사이의 전형적인 상호관계를 매년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잡지인 네이쳐 지에 실리는 왕립학회의 리뷰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보는것은 조금 불공평한 일이 될 듯 싶다. 매우 소심한 네이쳐 지의 리뷰어들은 풍경의 지질학과 젊은 여성의 해부학이 과연 교과서에 실리기에 충분한 것인지만을 인식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이 과학과 문화 사이의 관계의 소멸과, 과학이 순전히 기술적인 영역으로 빠져들어간 것은, 과학이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며 그래야만 한다는 이상하고 모호한 논증에 의해 강화되어 왔다. 가장 평범하고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과학자가 그들의 실험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열성적인 과학자들은 열정적으로 그들의 작업이 어떤 이론을 증명하거나 부정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의 기능을 문화적 힘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 과학자들이 그들의 지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확실히 과학은 진리여야 한다고 생각되는 아이디어나 누군가가 그진리라고 믿는 것에 의해 사실이 왜곡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과학은 동물성과 식물성 음식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측정이 채식주의에 대한 윤리적 논증에 의해 영향받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단지 식물성 단백질보다 동물성 단백질이 효과가 있다고 측정한다거나, 윤리적 질문은 완전히 한쪽으로 미뤄두고 다른 이들에 의해 결정되기만을 바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태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는 길이다. 다양한 영양섭취에 의한 음식의 가치는 윤리적 판단이 만들어져야만 하는 전체적인 상황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과학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는 이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고 아마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텐데, 과학이 인류가 필요한 아주 간단한 대체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가축사육장이나 도살장과 같은 고상하지 않은 것이 훨씬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윤리학에 대한 과학의 기여로, 근원적인 전제에 대한 질문과는 동떨어진 채, 단지 알려지지 않았거나과장되어 온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보다 더욱 대단하다. 과학에서는 아주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사고법 자체를 취하는 것은, 윤리적 판단 전에 지금은 나타나지도 않았던 모든 현상들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윤리적 지각은 개인의 행위에 대한 개인의 책임이라는 시스템에 근본적으로 기대고 있다. 두 가지 세트의 사건에 대한 통계적인 상관관계에 대한 법칙은 그것이 과학적 실제에서는 매우 잘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윤리적으로 완전히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해머로 아기의 머리를 내려친다면, 우리는 그를 잔인함이나 살인행위로 고소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더러운 우유를 팔아서 아기들의 질병과 사망이 증가한다면 우리는 단지 그에게 건강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벌금을 부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윤리적 쟁점에 있어 범죄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책임이 통계적 집합에 맞아떨어지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영국과 웨일즈에서는 태아사망률을 1931년 이전으로 떨어트리는 데 실패해서 8000명의 아기를 죽였지만, 누구도 이것이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최근에는, 원자폭탄이라는 아주 수수께끼같은 윤리적 판단의 문제가 부상했다. 여기서 과학자들은 인간이 새로운 동력을 결정하는데 있어 지배적이지는 못해도 역할을 크게 할 수 있고, 이를 그의 사회적 생활과 연계해야만 한다. 그들의 책임은 순전히 그들의 지식에서 비롯된다. 정상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원자폭탄이 가능한한 최소한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인들이 경고를 받기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 이들은 비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자들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은 타당하다. 폭탄의 오용을 막기 위한 자세한 측정이 필요할 때, 이에 대한 다양한 측면의 효과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훈련받은 과학자 뿐이다. 어떤 통제 시스템이던간에 요즘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살아숨쉬는 윤리적 신념인 민족주의와 갈등을 유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정보와 이론적 이해를 가지고 이러한 사회적 가치와 가장 갈등을 덜 빚을 수 있는 사람들은 과학자들 뿐이다. 물리학자가 그의 책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물리학자가 아닌 이들이 그들 평의회의 심대한 중요성을 부정한다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과학자가 의문의 여지없이 그가 사는 시대와 사회의 윤리적 가치의 체계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진실이다.
하지만 과학적 태도의 윤리적 함축은 이보다 더 나아간다. 과학적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떤 윤리적 기준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이 간과되거나 무시되어온 이유는, 과학적 태도가 사심없이 상황을 판단하는 일과 충돌하는 감정이라는 강력한 충동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사고와 감정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오래된 심리학이 과학은 모든 감정을 축출해야 하고, 결국 윤리적 판단마져 그래야 한다는 이런 결론을 이끌게 한 것 같다. 모든 행위에 감정과 사고가 관여하고 있고, 따라서 이러한 구분이 부당하다는 최근의 사태들을 인지한다면, 감정이 과학적 태도의 구성요소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협조하고 전문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 과학자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 이를 확인해준다. 전쟁 전에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나찌즘과 같은 시스템은 과학적인 기질과 공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윤리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공유된 믿음이 존재했다. 이러한 관점은 나치와 파시스트들이 통제하고 있던 국가를 제외하고는 영국의 네이쳐나 미국의 사이언스지와 같은 저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치와 파시스트가 지배하던 국가에서도 과학적 태도의 윤리적 결과에 대한 주장은 이를 주장하면서도 매우 괴로워했던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사실상 이제는 과학자들이 과학적 태도가 그의 지적인 태도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기능에 있어서도 다른 인간 행위들처럼 열정으로 가득차 있음을 인정해야 할 때다. 그것은 이를 통해 이루고자하는 바에 있어서만 조금 다를 뿐이다. 돈을 더 벌거나, 외양을 꾸미거나, 노동자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대신에 그들은 사물이 작동하는 방식을 발견하고자 노력한다. 인과적인 연결고리는 찾는 것은 e다른 속셈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데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상상력과 통찰은 주어진 인식과 편견을 마음에서 모두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인간행동에 있어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과학적 태도를 기저에 깔고 윤리적 판단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이를 장려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이를 부정하거나 망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나쁜 일이다.
마지막으로, 좀 더 논쟁적이고, 좀 더 철학적이면서 조금 덜 중요한 쟁점이 있다. 과학적 예측은 인간이 가진 다양하고 수많은 윤리적 신념들 중에서 어떤 것이 최선인지를 결정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인 접근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논할 공간은 없다. 거칠게 말해서, 인간의 윤리적 신념은 그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러한 영향을 관찰할 수 있다. 그래서 과학 이론이 인류의 삶에 어떠한 윤리적 신념들이 가득차야 하는데 기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어떤 음식을 먹는 것이 좋은지에 관한 이론을 건설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이론의 주요 테제는 인간의 윤리적 신념이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인류의 진화의 방향을 전진시키는 데 강력한 기제를 제공하는 그런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의 진화적 경로를 돕는데 가장 만족스러운 그러한 윤리적 신념들은 최선의 것이라고 판단될 수 있고, 같은 방식으로 최선의 음식은 인간의 정상적인 성장과 발달의 요구에 가장 만족스럽게 부응하는 그런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이론을 실용화하기 전에, 물론 진화의 경로에 대한 주된 개요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요인들만을 고려한다거나 하는 좁은 편견은 벗어던져야 한다. 하지만 이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영원한 난제보다는 쉬울 것이다.
얼마 안된 과거에 비록 과학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며 정치나 사회적 사건들과 관련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영감은 일반적인 문화적 관념들의 바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한 사회가 움직이는 목표는 아무리 뛰어난 개인에 의해서도 공식화될 수 없었고 그러지 못할 것이다. 과학만큼 강력한 이런 움직임은 우리 문명 속에 있었고, 비록 인지되지 않고 간접적이긴 했어도 사회의 문화적 측면과 연계된 채 그 조망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사실 최근의 예술적 움직임들이 마음의 과학적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된 다는 것을 밝히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최근의 가장 건설적인 예술적 조망은 과학적 멘탈리티를 공유하는 그런 것들이다. 나치 독일에서는 이러한 것들도 마찬가지로 추방당했다. 현대 예술의 최고는 진정한 과학과 비교될 수 있고, 사이비 과학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가짜 예술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후 세개의 장에서 나는 최근에 과학이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최근에는 과학의 사회적 영향을 기술할 때, 이집트의 기하학이나 바빌로니아의 천문학과 같은 고대의 역사, 그리고 르네상스 수학자들에 의해 도전받은 포물선 문제등부터 기술하는 것이 유행인 듯 싶다. 하지만 역사는 자신이 증명하기를 원하는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가벼운 사례들을 끌어오는 데이터의 더미 같은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아주 좋은 예를 찾았을 때, 단지 가장 확신에 찬 전문가만이 그것이 타당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다. 대부분 가설적인 과거에 대한 무의미한 나열은 현재를 분석하기 위한 대체물일 수 없다. 그리고 그 현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
현재에 대한 연구는 과거에 대한 연구보다 과학과 사회의 상호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어 더욱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 관계가 최근에 이르러 급속도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과학은 인류의 마이너한 활동에 불과했고, 과학이 과거에 딴지를 걸었던 문제들이나 그것이 따랐던 발전과정을 보더라도 과학은 그 시기에 대부분 인간의 다른 사회적 활동에 의해 지배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여전히 사실이다. 이에 대한 아주 면밀하고 명료한 분석은 최근 버날에 의해 “과학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과학은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과학은 그 자신의 추진력을 획득해 왔다. 사회가 제안했던 문제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과학은 과학이 사회에 제안할 수 있는 문제들을 찾아냈다. 내가 논증하고 싶은 논제는 과학이 이미 아주 잠재적인 사회적 동력이며, 과학이 주장하는 그 대안에 대해서 사회적 만족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수고했어요. 그런데 이런 글 저작권 걸리는 거 아냐? ㄷㄷㄷ 직업병 탓인지 이걸 “중학생 버전”으로 다시 쓰고 싶어졌다는.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관한 글이 생각나네요.
이번 글은 저의 신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군요^^. 제가 진보를 낙관하는 이유는, 인간 본성에는 몇가지 절대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믿기 때문인데요. 공정성, 그것에 바탕한 이기적 욕망들의 타협과 합의가 인간 사회를 진보의 길로 이끌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 본성이 극단적으로 다양할 수 있다면,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북한 사회도 인간 본성에 의해 거부되지 않고 그 나름의 정당성을 갖게 되어 버리겠지요. 저는 그런 막장의 사회 시스템이 가능한 이유는 힌두교와 주체사상이라는 강력한 세뇌때문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인간 본성에 의해 진즉에 무너졌겠지요.
저는 인간 본성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경향성은 분명히 존재함을 믿습니다. 마치 수학에서 소수를 다루는 일반 법칙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2를 빼고는 모두 홀수이다는 경향성은 존재하듯이. 저는 그것을 공정함이라고 믿습니다. 지배계급의 세뇌와 사적 권력과 폭력적인 개입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 사회는 그 즉시 고유의 본성에 의해 공정함이 지배하는 사회로 구성될 것임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없이 진보란 그저 환상에 불과하겠지요.
장애인 과학자들은 어떤가요? 기존의 과학자보다는 사회정치적 부분에 접근하는 데에 있어 학계의 저항이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싶은데.
과학자들이 장애인 문제에 대하여 기능적 관점 이외에 그들에 대한 동정의 시선 측면에서 일반 대중과 똑같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훨씬 더 그렇지 않나 싶은데요. 만약 성립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그 학문체계의 경직성을 해소해 준다는 측면에서 학계 내의 소수자들이 가지는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알게 뭐야. 이거 자체가 영어만 알면 중학생 버젼임.
그런걸 배웠는지도 까먹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글신에게 ‘들어라 침팬치들아’ 라고 검색을 요청해 보세요.
참고로 워딩턴이 epigenetics를 창시한 인물임을 맥락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자에게 사상이란 코스모폴리스적인 것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아이 하나를 가르친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녀석이 절 따르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생각 해본적 있습니다.
‘과학은 정치에 중립적이지 않다’라는 글을 작성하신지 딱 일 년만에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다’라는 글을 쓰셨네요. 제가 이해력이 모자라는지라 본문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어릴 때 읽었던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괜히 생각이 나네요. 누가 한 말인지도 모르겠고 정확한 문장도 기억이 안 나지만 ‘패러다임의 변화는 그 시기에 사람들이 그 패러다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전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말이죠.
쿤은 과학적 발견이 과학자 사회 내부의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된다는 이야기를 한거고, 워딩턴의 이 글은, 과학이 가진 진리에 대한 객관성이라는 것이 윤리적으로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과학이 발견한 그 어떠한 것이라도 좋다 나쁘다와는 상관이 없지 않다.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며, 이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이런 말입니다. 쿤의 논의와는 다릅니다.
우재님 블로그를 간간히 읽어보는 열독자입니다. 그런데 왜 저는 이런 글이 점점 더 우재님을 코너로 몰고가는글이라 생각 될까요?
저도 아마추어 수준이긴 하지만 과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과학의 가치중립성같은걸 믿는 순진함을 버린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것과 과학이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라는것엔 분명한 차이가 있고, 전자를 하나의 독립진술로 언급하는거야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것은 후자를 주장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고 그러는게 아닌가 하는정도로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우재님의 이 글을 읽는 어떤 순진한 사람들은 “아 그럼 과학연구를 가치지향적으로 운용해도 되는거구나”
라고 하면서 황우석의 “국가를 위한 과학”을 정당화시키고 “인종주의 가치관”이 과학과 결합한 우생학을 정당한것으로 잘못 생각할 여지가 있을거란거죠.
더 나아가서 이런 순진한 무리들의 생각대로 우재님이 우생학이나 국가주의를 과학과 결부시키는걸 몸소 실천하진 않으리라 생각하지만,(이건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이와 같은 글을 통해 현재의 우재님이 보유한 이념적 스탠스(그것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딱지붙여진거라면)를 과학과 결부시켜 좀 더 본인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려 하는게 아닌가.. 뭐 저는 지금 그런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과학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라는 것으로부터
“과학은 가치지향적이어야 한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건 너무 뻔합니다. 그렇지만 우재님의 글을 읽는 순간 이 결론이 더 이상 뻔한게 아닌것처럼 느껴지는군요.
우재님이 이런 결론을 이끌어내실 요량으로 이 같은 글을 썼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설령 그렇더라도 제가 우려하는것은 앞뒤전후 맥락과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이 글이 “과학의 가치지향성”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글로 오독될 수 있을 가능성이 있고, 저는 이 코멘트를 통해 이를 경고해두려는 것입니다.
혹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우재님이 “과학은 가치지향적이어야 한다”라는 암시적 전제에 동의하실 가능성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아마 이에 대해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죠.
어떤 케이스에 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과학을 공부하고 있는 저로서는 썩 내키는 글이 아니네요.
그리고 후생유전학이라는게 원래 보편형질보다 개체간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관련된 권위자를 끌어들여 개개인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주장을 꺼내놓는건 큰 의미가 없는것 같습니다. 그 반대편에서 도킨스나 데이빗 버스같은 동물행동학자, 진화심리학자들 대동해서 “모든 동물은 이러저러한 보편형질을 가진다”라고 맞받아치면 그만이니까요.
이런 핑퐁게임을 시작한다면 현 상태에선 끝을 볼수가 없습니다.
잘 아실만한 분이 왜 이런 논쟁적인 글을 꺼내놓고 계신지 이해하기 힘들군요.
어투가 좀 공격적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제 성격이 원래 좀 드럽습니다. 이해해주세요. ;;;
저같은 순진한 사람은 소녀시대짱님의 글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김우재님의 글은 쉽게 읽혀요. 님은 스스로 아마추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용어를 남발하여 일부러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것 같네요. 썩 내키는 글이 아니네요. 제 성격도 드럽습니다. 이해해주세요. ;;;
소녀시대가 짱임을 아신다면 모든걸 이미 깨달으신 분이라 사료됩니다. 과학이 가치중립적이 아니라는 명제에서 과학이 가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명제가 뒤따라나오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명제놀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원래 가치지향적인 활동입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믿는 이들에게 제가 해주고 싶은 말은 없습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도 세상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습니다. 제가 꿈꾸는 세상은 멀게는 베이컨이, 가깝게는 크로포트킨과 버날이 꿈꾸었던 코스모폴리스입니다. 그게 오독이던 아니던 제가 알바 아닙니다. 그런 세상이 단 한번도 온적 없기에, 그리고 그런 사건들의 주체가 단 한번도 과학자였던 적이 없기에, 전 그런 코스모폴리스를 꿈꿉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과학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고 싶으신 이야기는, 과학은 가치지향적이지 않다 입니까, 아니면 그래서는 안된다 입니까. 전자라면 그 증거를 보여주시면 되고, 후자라면 그 당위를 논증하시면 됩니다. 글 기대학하겠습니다. 되도록이면 트랙백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트랙백까지 걸만한 내용은 아닌것 같습니다.
앞서 전 이미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믿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의 가치지향성을 주장하는것과는 맥이 다른건데, 이 두 명제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생각하신다면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을것 같군요.
우재님의 주장을 일반화시키면 우생학도 정당화됩니다. 권력자들을 위한 과학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과학이 수구보수라는 이념에 봉사할때-이 역시 과학이 가치지향적으로 나올때 그 결과일 수 있습니다-) 과학의 가치지향성은 믿지만, 이런것엔 반대입장이시라면 “좋은가치관”에 봉사하는 그러한 과학만을 나는 믿는다는 식이거나 혹은 과학의 가치지향성이 “상식”에 들어맞을때의 과학만을 받아들이겠다는 반론밖에 별로 생각할게 없는데 이런식이면 A 가치관 vs B 가치관 중에 어떤것이 옳다/그르다 이런식의 그릇된 공방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여기엔 정답이 없거든요.
이렇게 될 때 방어해야 하는쪽은 제가 아니라 우재님이 됩니다. 여기선 제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다는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우재님의 견해가 너무 강하다는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뭔가를 밝히기보단 우재님이 뭔가를 밝히셔야 될줄 압니다. 당장 위에서의 “과학의 가치지향성”과 우생학, 수구보수 이념에 봉사하는 과학간의 관계를 밝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부분이 해명되어야 제가 뭔가를 써도 쓸 수 있겠죠.
관련 내용을 포스팅해주시면 읽어보도록하겠습니다.
어디다 대고 말을 하라는 건지요. 글 하나 쓰는게 쉬운 일도 아니고, 블로그의 글들을 읽어보면 대충 감이 잡힐만한 내용인데도 새로운 글을 쓰라는데 글 쓰는게 제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게다가 어디다 대고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니 답답하고.
우생학이 정당화되지 않을 이유는 또 뭐랍니까. 무슨 과학이론이 사회이론이 되기만 하면 학을 떼는데 그건 과학이론이 강력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과학은 그래서는 안된단 말입니까. 전자라면 과학은 다른 학문들보다 더 진리에 가깝다는 자기고백이며 그 논리로부터 과학이 사용되어도 된다는 당위도 따라나올 수 있습니다. 후자라면 이미 저는 그런거 것 따위 미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형태의 과학도 가능합니다. 왜 정치학과 경제학이 저지르는 일을 자연과학은 하면 안됩니까. 뭐가 그걸 가로막는 건가요. 왜 과학에만 그런 엄격한 기준을 내세웁니까. 뭐가 문제인가요? 응?
왜 이리 흥분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황우석 사건과 리센코 사건을 잘 아실건데, 그럼 여기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그렇게 해도 아무 상관없다”라는 생각이신듯.
만약 그렇다면 더 대화의 여지가 없는듯 합니다.
그럼 이만….
정체를 드러낼 용기도 없으면 이제부터 안와도 좋습니다. 댁을 위해 글을 하나 썼으니 읽으려면 읽고 말려면 말고. 리센코 이름은 들었지만 그 정확한 분석도 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모르면 말을 하지 말라는 김병만의 말은 말이죠..진리를 좀 내포하고 있는 것 같죠.
의미없는 소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