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오래된 기억. 긴장이 풀리고 여유로운 오후에, 좋은 음악과 한권의 책과 나의 실험. 그렇게 낭만적인 오늘.
사랑이란 인간의 감정이 놓일 수 있는 여러 상태 중 하나일 뿐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언제부터인가 양성생식이 출현한 그 이래로
남성과 여성은 서로 만나 탐색하고 후손을 낳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과정을 좀 더 쉽게 해주는 감정. 그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랑이 만들어낸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가?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대가 어느날 “내게 사랑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하고 나를 떠나버린 그 이후에, 언젠가는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제야 당신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4년이 조금 안되었을 겁니다. 당신이 나를 버린 것이. 하지만 당신에겐 그토록 오랜 과거처럼 느껴지는 그 4년의 시간이 내겐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난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났을 당시에도 난 사랑은 허영일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과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잔인하지만- 호르몬에 의해 지배받는 생리학적 감정상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스스로의 감정상태를 관찰하며 희열을 느꼈던 기억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식으로 사랑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또다른 해탈의 길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란 아무리 그것이 육체에 의해 지배받는 감정적 속성일지라도 실재하는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합리적인 과학자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감정에 메말라가고 있었어도 인간의 육체에서 감정을 제거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내게 당신이 했던 말들은 칼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강하다고 자부했던 한 남자의 마음이 도려내어져 허공에 뿌려짐을 느낍니다.
세상엔 알게 되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함을 그대는 내게 일러주었습니다. 철학자들의 말장난을 빌리자면 “사실”과 “가치”는 분리되는 것이지만 현실은 그 두가지를 확실히 나눈 채 살아갈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인간의 현실에서 사실과 가치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당신을 “사랑한다는 기쁨”은 제대로 느끼지 못한 바보였으며, 당신을 기다렸지만 왜 기다리는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회피한 겁쟁이였습니다. 나는 사랑이라는 과학적 대상과 당신에 대한 사랑을 혼동한 바보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야 독백을 합니다. 나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당신의 얼굴이 희고 고와서 당신을 사랑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양미간 사이의 거리가 나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웃음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혀 당신에게 사로잡혔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던간에 내가 당신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했습니다. 4년간 나의 꿈속에서 웃던 그대의 얼굴을 보며 느낀 감정들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본 것들이었습니다. 당신을 생각할때마다 느껴지던 가슴속의 뭉클함은 대할때마다 새로운 매우 슬픈 감정이었습니다. 눈물을 잃은 냉혈한의 가슴속에 알면서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함을 일깨워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서 커다란 교훈을 배웁니다. 앞으로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사실과 가치를 분리할 때에는 반드시 보다 좋은 가치에 힘을 싣고, 사실이 좋은 가치로 해석될 수 있도록 전달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겠습니다. 무책임하게 사실을 전달하며 스스로 해탈한 자라고 자만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은 내게 그런 깨달음을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제 단한번을 사는 세상에서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지만, 다시 당신을 만나게 될때에는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겝니다.
그 후 나의 신념은 항상 다음과 같이 표현되곤 한다.
Politics Abuses,
Humanities Negates.
So I will Posit the Facts.
어 저사진 히로스에 로쿄 아닌가?
뻘플. 음악으로는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 현악사중주 추천. 요새 이 양반 음악 듣는 재미로 산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