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형식 논리학에 있어서 ‘권위’는 그 어디에도 파고들어갈 틈이 없다.
하병학, “논증과 권위.” 철학탐구 18 (2005).
즉, 타당한 논증이란 ‘전제가 참일 때 결론이 필연적으로 참인 논증’을 의미하므로, 형식논리학에서 ‘권위’의 자리는 없다. 권위는 논증의 ‘오류’와 관련해서 한가지 사례로 등장하게 된다.
오류란 일반적으로 “타당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그렇지 않은 논증이다.” 논리학에서는 전제와 결론의 타당한 형식에 의한 논증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의 권위에 의존한 논증을 ‘권위에 호소의 오류(argumentatio ex auctoritate, argumentum ad verecundiam)’이라고 부른다. 합당한 근거가 아니라 어떤 권위에 의거한 논증은 타당한 (연역)논증도 적절한 (귀납)논증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기호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A가 p를 주장한다. 고로 p다.” p가 정당화될 수 있는 합당한 형식적, 내용적 근거가 여기에서 발견되지 않기에 오류라는 것이다.하병학, “논증과 권위.” 철학탐구 18 (2005).
다음과 같은 예들을 보도록 하자. 각각의 항목에서 두 번째 문장은 모두 ‘권위’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그 권위의 수준은 조금씩 다르다. 물론 그것이 합당한 근거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두 권위라는 점은 같다.
1. 나의 주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나의 주장을 이해할 만한 수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2. 이명박의 정책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라캉으로 문화비평을 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창조과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이론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증의 문제를 철학과 과학 그리고 일상에 걸쳐 논의한 학자로 거론해야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다. 퍼스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는데, 그의 삶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그는 하버드대 수학 교수인 아버지 벤자민 퍼스(Benjamin Peirce)의 엄격한 수학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소년 시절부터 자신만의 화학 실험실을 갖고 있었으며, 13세 때 헤이틀리(Whately) 대주교의 「논리학의 기초」(Elements of Logic)를 독파하고, 사춘기 시절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매일 두 시간씩 강독하고 그 내용을 암송했다고 한다. 그 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서 수학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취득하고, 다시 화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 취득과 함께 1863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퍼스는 알기 힘든 인물로서, 방탕한 난봉꾼으로 소문나기도 하고, 편집증 경향에 걷잡을 수 없는 변덕스러움을 보이기도 하며, 자신의 지적 능력들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남들에 대한 경멸을 내보이기도 했다. 그는 1884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종신 교수직을 거의 보장받기 직전에,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정보와 종교적 신앙이 이단적이라는 의심 때문에 오히려 교직에서 쫓겨났다. 이후로 그는 정규 대학 교직에는 자리잡을 수 없게 되었고 수 십 년 동안 근무해온 연안측량국에서 은퇴한 후에는 방대한 집필 활동 및 친구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주선해준 일련의 강연들을 하면서 가난하게 여생을 보냈다.
[사상가] 퍼스
아마도 그의 이단적 신앙의 배경엔 다윈의 <종의 기원>이 놓여 있을 것이다. 퍼스의 저작 이곳 저곳에는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그의 철학적 사상이 배어 있다.
퍼스의 철학 제 2기를 결정지우는 두 편의 논문이 있다. <믿음의 고정화 Peirce, Charles Sanders, “The Fixation of Belief.” Popular Science Monthly 12, no. November (1877): 1-15.>와 <관념을 명석하게 하는 방법 Pelrce, C.S., “How to make our ideas clear.” Popular Science Monthly 12, no. January (1878): 286-302.>이 그것이다. 이 중 <믿음의 고정화>는 우리의 믿음을 형성하는 몇 가지 방법들을 ‘과학의 방법’에 대비해서 다루고 있다. 에세이의 첫 부분은 로저 베이컨에서, 프랜시스 베이컨, 티코 브라헤, 케플러, 길버트 등의 초창기 과학자들의 방법들에 대해 개괄한다. 이때까지도 과학의 방법론이 다른 방법론과 아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라부아지에의 실험법의 성공을 예로 들면서 조금씩 과학의 방법이 성숙해 갔음을 퍼스는 지적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퍼스가 다윈이 통계적 방법을 생물학에 도입하고 있다고 서술하는 부분이다. 기체에 관한 통계역학을 다윈과 동치시켜 비교하고 있는데, 이건 좀 연구를 해볼 만한 사항이다. 퍼스는 도대체 왜 다윈이 통계적 방법을 생물학에 도입시켰다고 생각했을까? 골턴의 업적을 착각한 것인가? 제 1절은 매우 간략한 과학의 역사이며, 근대과학에서의 추론을 논리와 실험이라는 두 축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제 2절에서 추론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추론의 목적은 우리가 아는 무언가로부터 모르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의 역할도 드러난다. 추론을 통한 논증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결론을 받아들이게 되는 ‘충동’이 있다. 결론은 논증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 수용과정엔 ‘마음’이 관여하며, 그것은 자연이 명령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논증이 말해주는 바를 참 혹은 거짓으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믿음의 역할을 분명하다. 우리가 자연이 보여주는 바에 따라 추론한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연일 수 있다. 우리의 믿음 혹은 신념체계는 그런 것이다.
The object of reasoning is to find out, from the consideration of what we already know, something else which we do not know. Consequently, reasoning is good if it be such as to give a true conclusion from true premises, and not otherwise. Thus, the question of its validity is purely one of fact and not of thinking. A being the premises and B the conclusion, the question is, whether these facts are really so related that if A is B is. If so, the inference is valid; if not, not.
It is not in the least the question whether, when the premises are accepted by the mind, we feel an impulse to accept the conclusion also. It is true that we do generally reason correctly by nature. But that is an accident; the true conclusion would remain true if we had no impulse to accept it; and the false one would remain false, though we could not resist the tendency to believe in it.
인간은 논리적인 동물이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그런 것은 아니다.
We are, doubtless, in the main logical animals, but we are not perfectly so. Most of us, for example, are naturally more sanguine and hopeful than logic would justify. We seem to be so constituted that in the absence of any facts to go upon we are happy and self- satisfied; so that the effect of experience is continually to contract our hopes and aspirations.
이로부터 퍼스는 의심과 믿음의 차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박우석 교수의 말로 들어보자. 나는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할 능력이 안된다.
퍼스는 우선 의심과 믿음의 차이점들에 주목한다. 먼저 질문을 제기할 때와 판단을 내릴 때의 차이가 의심과 믿음의 차이를 보여준다. 둘째, 실제적인 차이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욕망을 인도하고 우리의 행동을 형성한다. 퍼스에 따르면, 믿는다는 느낌은 다소간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할 어떤 습관을 확립했다는 것을 가리켜 준다. 셋째, 의심은 그로부터 우리가 해방되고 믿음의 상태로 나아가고자 투쟁하는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상태이다. 그 반면 믿음은 우리가 회피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닌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상태이다. (CP 5.370-372)
의심과 믿음은 모두 우리에게 적극적인 결과들을 지닌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태가 발생할 때 어떤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조건지운다. 의심은 그것이 소멸될 때까지 탐구를 계속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CP 5.673)
이러한 관찰을 통해 퍼스는 의심의 자극이 믿음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 투쟁토록 하는 원인이 된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이 투쟁을 그는 ‘탐구’ (Inquiry) 라 이름한다. (CP 5.374) 의심과 더불어 믿음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투쟁이 시작되고, 의심의 소멸과 더불어 그 투쟁은 끝난다. 퍼스는 나아가서 이로부터 아주 흥미로운 명제를 끌어낸다. “따라서 탐구의 유일한 목적은 의견의 정착이다.” 이 명제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그는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참된 의견이라는 예상되는 반론을 검토한다. 그에 의하면 이런 반론은 근거가 없는데, 왜냐하면 확고한 믿음에 도달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이 참이건 거짓이건 간에 전적으로 만족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 지식의 영역 밖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의 목적일 수 없음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어떤 것도 정신적 노력의 동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장될 수 있는 바는 기껏해야 우리가 참이라고 생각할 한의 믿음을 우리가 추구한다는 것이다. (CP 5.375)
퍼스의 실용주의 방법론
의심과 믿음을 이렇게 나누어 놓고, 퍼스는 추론에 있어 과학의 방법과 나머지 세 가지 방법을 대비시키기 시작한다. 과학적 방법을 제외한 나머지 세 방법은 아래와 같다.
‘고집의 방법’ 은 자신의 믿음에 집착하여 의심을 품지 않고, 남들의 의견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방법이다. 여기서 믿음을 결정하는 기준은 그것이 자기가 바라는 바에 맞느냐 하는 것으로, 이런 자기 중심적인 방법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이 전적으로 결여됨으로써 참된 의미에서 믿음을 안정된 상태로 정립시키지 못한다.
‘권위의 방법’ 은 믿음을 결정하는 어떤 제도를 통해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확정된 믿음을 전체에게 주입한다. 종교, 귀족 정치, 특정한 직업집단이 있는 곳이나 구성원의 이해가 특정의 주의, 주장에 기초하는 곳에서 이 방법이 발견된다. 이 방법은 특정 관념을 주입하기 위해 처벌의 고통을 부과하는 등의 잔혹성이 수반될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에 대해 통제의 역할을 감당하는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불만이 따른다.
‘선험적 방법’ 은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발견되며, 형이상학의 체계는 대부분 관찰된 사실에 근거해 있지 않다는 문제를 지닌다. 결국 체계의 토대적 명제가 이성에 부합하는지 여부가 척도가 되는데, 퍼스는 여기서 “이성에 부합된다” 는 것이 경험과의 일치가 아니라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된다” 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은 고집이나 권위의 방법보다는 훨씬 지적이고 고찰할 만한 가치가 있으나, 퍼스는 그것이 사변적 보편성을 특징으로 삼음으로써 학문의 발전을 일종의 취향의 발전과 비슷하게 보게 된다는 점을 비판한다.
퍼스의 실용주의 방법론
이제 고집의 방법, 권위의 방법, 그리고 선험적 방법에 의존한 이들이 과학사와 철학을 통해 어떻게 오류를 범해 왔는지를 간략히 개관한 후, 퍼스는 과학의 방법 추종자들이 어떤 점에서 특이하고 또 우월한가를 보인다.
결국 의심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고정시키는 새로운 방법이 요구되며, 그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사견들로부터 독립해 있는, 외적인 영속성을 지니는, 공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어야 한다. 퍼스는 그런 새로운 방법으로서 과학적 방법을 제시하며, 그것은 의견과 사실의 일치를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위의 세 가지 방법들에 대해 우월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 방법은 한 개인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안 되고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독창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리고, 비록 이 영향들이 필연적으로 개별적 조건들에 따라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그 방법은 반드시 모든 인간의 궁극적 결론이 같은 그러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한 것이 과학의 방법이다. 보다 친숙한 언어로 다시 진술한다면, 그것의 근본적 가설은 이렇다. 실재하는 사물들이 있고, 그것들의 특징들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견들과 전적으로 독립적이다. 그들 실재들은 규칙적 법칙들에 따라 우리의 감각들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고 비록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들이 다른 만큼이나 우리 감각들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지각의 법칙들을 이용함으로써 우리는 사유에 의해 사물들이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어떠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이건 그가 충분한 경험을 지녔고 그것에 관해 충분히 사유한다면 하나의 참인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에 결부된 새로운 개념이 실재의 개념이다. (CP 5.384)”
퍼스의 실용주의 방법론
의견의 대립과 좀처럼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의 진리, 퍼스는 그걸 분명히 인정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과학이 추구해온 방법을 제시했다.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믿음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본성과, 변화하는 세계가 들어낸 여러 가지 오류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퍼스가 제안한 새로운 의견 정착의 방법이 바로 과학의 방법이다. 낡은 믿음들이 아무런 건전한 기초를 지니지 못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고자 하는 게으른, 멍청한 합리화를 그만두고, 새로운 의견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그 믿음에 대해 잘 고찰해보고, 그 믿음이 정말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반성하여, 기꺼이 기존의 믿음을, 새로운 의견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방법의 핵심이다.
믿어도 될까? <믿음의 고정화>, Peirce
화학실험실에서의 10년, 퍼스에게 그 세월의 경험은 철학에도 반영된다. 논리학자이자 기호학자인 퍼스가 혼란스런 세계에서 일상의 소박한 진리를 구원할 목적으로 과학, 그 중에서도 ‘과학에서 실험의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어 ‘단단한’이란 관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이것은 단단하다”라는 문장을 “이것은 긁어서 흠집을 내려고 해도 여의치 못할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즉 무조건적인 판단을 조건적인 판단으로 바꾸어 본다. 여기서 긁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 혹은 실천적인 상황으로 가져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그 결과를 주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건에 해당되는 부분이 객관적일수록, 그리고 결과로 나타나는 부분이 분명할수록 그 관념의 뜻이 더욱 명확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긁는다는 사실이 제대로 묘사되고 흠집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명백하다면 ‘단단한’이라는 말의 뜻도 그만큼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판단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려면 그것이 실험적인 조작이나 현실적인 환경에서 어떠한 결과를 나타내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퍼스의 실용주의 과학관
그렇다면 퍼스가 다른 방법론에 대비해 과학적 방법의 우위만을 주장했었는가? 퍼스가 그렇게 단순한 철학자였는가? 그렇지 않다. 권위에만 호소하는 논증으로 글의 대부분을 허비해버리는 어떤 철학자에게, 퍼스는 그저 멍청하다고 야단치는가? 그렇지 않다. 퍼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임상에서의 라캉의 정신분석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한다고 해서, 문화비평에서의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이 ‘비과학’을 전제해야 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캉에 대한 비판이 ‘과학’이라는 잣대로 행해진 건 벌써 20여년 전의 일이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게 아니라면, 판을 다시 짜볼 필요가 있다.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얼마나 단순한가. 그렇게 단순하게 사람을 편가르고, 의도를 가늠질하고, 쓰지도 않은 글에 대해 재단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퍼스는 뭐라고 말하는가? 퍼스는 우리의 일상에서, 권위의 방법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가? 아니다.
It is not to be supposed that the first three methods of settling opinion present no ad- vantage whatever over the scientific method. On the contrary, each has some peculiar convenience of its own.
The method of authority will always govern the mass of mankind; and those who wield the various forms of orga- nized force in the state will never be convinced that dangerous reasoning ought not to be suppressed in some way. If liberty of speech is to be untrammeled from the grosser forms of constraint, then uniformity of opinion will be secured by a moral terrorism to which the respectability of society will give its thorough approval. Following the method of authority is the path of peace.
Such are the advantages which the other methods of settling opinion have over scientific investigation. A man should consider well of them; and then he should consider that, after all, he wishes his opinions to coincide with the fact, and that there is no reason why the results of those three first methods should do so.
Yes, the other methods do have their merits: a clear logical conscience does cost some thing—just as any virtue, just as all that we cherish, costs us dear. But we should not desire it to be otherwise.The method of authority will always govern the mass of mankind; and those who wield the various forms of organized force in the state will never be convinced that dangerous reasoning ought not to be suppressed in some way….
이것이 퍼스가 데카르트를 비판하면서 철학계에 등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직관과 사유만으로 철학 혹은 추론을 구성하는 것은, 그것이 물리적 세계에 관한 진술인 한, ‘실험’이라는 절차 없이 설명력을 확보할 수 없다. 그것이 퍼스의 실험실 생활이 그에게 준 경험적 지식이었다. 퍼스는 그 경험을 형이상학으로 완성시켰다. 그 곳에서 퍼스의 과학은 확실성 추구에 관한 절대적인 지식체계가 아니다. 그곳에서 퍼스의 과학은 오히려 언제나 변하는 지식체계가 된다. 열린체계로서의 과학, 퍼스는 이미 포퍼보다 30년전에 반증가능성의 개념을 담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과학적 지식도 확실성의 추구보다는 설명력의 확보를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과학적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은 기존의 확실성에 새로운 확실성을 부가한다는 뜻이 아니라 낡은 설명을 더 나은 설명으로 대체한다는 뜻일 뿐이다. 그에 의하면 “과학에서 바뀌지 않는 것은 없고 바뀌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퍼스의 실용주의 과학관
이러한 시도의 연장선에서 합당한 논증의 틀을 실천논리학 혹은 일상생활에서의 논증이라는 방식으로 정초한 사람이 툴민이다. 그런 의미에서 툴민은 수사학을 강조했다. 그것이 툴민의 <논변의 사용>이 논리학의 전통 속에서 반동적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주요한 구별은 분석적인 논변과 실질적인 논변 사이의 구별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식론 논쟁에 깔려 있는 습관적인 애매함으로 해소시킬 수 있기 전에, 이런 구별을 할 수 있고, 이는 고수되어야 한다.
이런 인식론적 난점에 대한 탈출구는 분석적 이상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분석적 기준들 -그것이 결정저임, 논증적임, 필연성, 확실성, 타당성 혹은 정당화이건 간에- 은 우리가 실질적 논변을 다룰 때에는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바로 우리가 실질적 논변의 각각의 영역을 그 자체에 관련된 기준에 의해 판단해야 함을 의미한다.
스티븐 툴민, “논변의 사용.”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3). pp. 362
그렇다면 툴민에게 이것이 끝인가? 형식논리학이 일상에서의 실질적 논변을 구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것은 완전히 포기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지성의 도서관에서 오래된 ‘논리학’과 ‘인식론’이란 부분을 내던져 버리고서 어떻게 우리는 흩어져 있는 책들을 모아 좀 더 새롭고 실질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을까? 그 완전한 대답을 위해서는 아주 오랜 작업이 요구될 것이다. 하지만 재조정을 지배할 원칙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은 여기에서도 가능하다. 특별히 세 가지가 언급될 필요가 있다.
1) 장차 두 개의 주제가 아니라 단 하나로 묶이게 될 논리학과 인식론 간의 친밀한 교류의 필요성
2) 논리학에 있어서 비교하는 방법의 중요성 -모든 분야의 논변들을 동등한 관심과 적절함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며, 한 분야의 논변이 다른 분야의 논변보다 ‘우월하다’는 전제 없이 그 구조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 그리고
3) 철학자들이 선험적 논변을 제외한 그 어떤 논변도 제거해 버렸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철학분야보다 더한 자부심을 갖는 분얄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나아가-어떤 의미에서-인류학적인 고찰을 재도입하는 것.
스티븐 툴민, “논변의 사용.”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3). pp. 390-391
이제 툴민은 조금 더 확실하게 자신이 이 책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주제를 밝힌다.
논리학은 좀 더 경험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만, 그 뿐만은 아니다. 논리학은 불가피하게 좀 더 역사적인 경향을 띠게 될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좀 더 새롭고 나은 논변 방식을 생각해 내는 것은 비단 논리학에서만이 아니라 그 실질적 분야 자체에서 주요한 진전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논리학의 위대한 혁신은 과학, 도덕, 정치 혹은 법률적인 위대한 혁신의 일부이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에서 케플러, 뉴턴, 라부아지에, 다윈과 프로이드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의 신념뿐만 아니라, 논변의 방식 그리고 적절성과 증명의 기준 역시 변화시켰다. 그로티우스와 벤담, 유클리드와 가우스는 다른 분야에서 우리에게 그와 동일한 이중적 업적을 이루었다. 우리는 어떤 분야에서든 이룩된 논변 방식들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면서 연구해야 한다. 그것들이 교체될 수 있지만 오직 우리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혁명적인 진전의 결과로써 그럴 수 있음을 인식하면서 말이다. 어떤 경우들에서 이런 방법들은 -어쨌든 논변에 의해서- 더 나아가 정당화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이 실천 속에서 정립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은 논리학으로부터 심리학과 사회학으로 뿐만 아니라 이념들의 역사로도 열려져 있다. 우리는 철학에 대한 콜링우드의 다음과 같은 견해에 새로운 동감을 표하며 접근 할 수 있다. 즉 철학은 어떤 역사의 순간이든간에 서로 다른 지적 학제들 간의 최종심급으로 쓰여 왔던 논변 방법들에 대한 연구라는 것이다.
스티븐 툴민, “논변의 사용.”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3). pp. 396
퍼스도 툴민도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으로부터 벗어나 있었지만, 그것을 그냥 떨쳐내지 않았다. 추론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부터 의심과 믿음의 차이를 밝히고, 조심스럽게 과학의 방법을 제안하는 퍼스. 형식논리학과 일상의 논변 사이의 괴리를 인식하고, 일상을 형식논리로부터 구출하려는 시도를 통해 각 학문분과들이 실천적으로 추구해왔던 방법들에 경의를 표하는 툴민. 여기 어디에도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논증을 새롭게 해석했던 툴민과 라캉과 지젝이 문학비평의 영역에서 함께 다루어지기도 하는것이다. 오형엽, “현대문학비평과 논증의 수사학.” 어문논집 56 (2007). 오형엽, “가라타니 고진 비평의 비판적 검토.” 한민족어문학 55 (2009). 이병주, “퍼스의 기호학과 라클라우 · 지젝의 담론이론을 통해서 본 툴민의 논증 이론.” 스피치와 커뮤니케이션 2 (2003).
과학과 사이비과학, 과학과 인문학, 과학자와 인문학자, 그 대립은 스노우의 나이브함으로 끝났어야 옳다. 선동하지 않고 조용히 그 경계를 탐구해온 학자들도 있다. 그런 문제 의식 속에서 이상하 박사는 <상황윤리>를 썼다. 아직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은 이들이 믿음을 고정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론들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고민과 배경은 배제된 채, 그리고 이 땅의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상황의 요인들이 그 이론들 에 의해 가려진 채 윤리 담론이 진행된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 로 우리가 져야 한다. 그것은 이 시대 ‘자기 사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하, “상황윤리: 현실세계 속의 공학 담론.” 철학과 현실사 (2007). 543
권위라는 개념은 어차피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적 정당성의 문제에서 다루어지는 것일 터이고, 그나마도 간접적인 인식방법에 그치니 학문적 영역에서 크게 의미를 갖긴 어려울 듯합니다. 특정 전문가, 혹은 전문가 집단, 혹은 상식적 대중의 그 권위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결국 그러한 권위는 그들이 가진 믿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정당성이 확보되는지를 그 권위에 호소하는 사람이 ‘직접’ 스스로 확인하지 않는다면 다만 편의를 도모하는 이외에 아무런 역할도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논증과 추론을 통한 필연성(확실성)과 실험/관찰을 포함한 경험적 실재성을 통해 확보되는 정당성이 어떻게 결합되어야 할지가 문제 아닐까 싶네요. 앞서 올리신 포스트에서 언급하셨던 과학에 있어서 정량화의 방법이 우선 한 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겠으나, 다만 인식의 한계나 소여로서의 객관에 대한 문제 등은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이 어렵다는 난점이 남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피상적으로나마 제가 이해하기로는 퍼스나 툴민의 접근방법도 후자보다는 전자에 관련된 노선을 따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형이상학을 ‘해체’해 나아가는 건전한 상식의 입장이 옳다, 라고 한다면 더 논의하기 어려운 일이 되겠습니다만;;
그런데 본 포스트에서 논리와 인식의 두 분야(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가 언뜻 약간은 불분명하게 중첩되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드네요. 아마도 퍼스가 논의에 도입되는 부분부터 엇갈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 위까지는 형식(논리)문제였는데 거기서부터 내용(인식)문제로 전환된 것 아닐까 싶네요. 뭐 중요한 얘긴 아니겠지만 말씀입니다;
늘 흥미로운 문제의식을 내비치시는 것을 보면서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 뵙겠습니다. 허허; -蟲-
퍼스와 툴민 모두 인식론과 논리학을 넘나드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지적하신대로 권위에서 퍼스로 넘어가는 부분은 그런 비약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여기서 인용된 퍼스와 툴민은 인식론의 수준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은 완전히 정리된 생각들이라기보다는 노트같은 것이니까, 그 안에 듬성듬성 틈이 있다 해도 용서해주시길.
음, 사소한 것이지만… 저는 오형엽, “가라타니 고진 비평의 비판적 검토.” 한민족어문학 55 (2009). 이 논문이 좋은 실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라타니를 읽으면서 국내의 연구자료들을 찾을 때 이 글도 읽어보았는데, 의도의 거창함에 비해 결과물이 그렇게 충실하지는 않다고 느꼈거든요.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이해 자체는 어느 정도 되어있지만, 본격적으로 ‘논증’을 분석하는 작업은 사실 기대를 갖고 읽어본 사람에게 굉장히 실망스러울 정도의 수준이라…(수사학으로 가라타니를 검토한다고 하는데, 오협엽의 해당 글에서 보이는 ‘분석’은 사실 그런 이름들을 전혀 갖고 오지 않아도 가능한 정도의 수준이라…) 툴민의 경우도 각주 한두개에서 언급할 뿐 제대로 활용되고 있지 않구요.
물론 그러한 ‘시도’ 자체에 의의를 부여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좋은 예시가 되기엔 좀 아쉬움이 남는 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예. 맞는 말씀입니다. 아직 툴민과 같은 배경 속에서 문학이론에 대해 논하는 글은 없습니다. 그 반대편에서 툴민을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는 시도들 뿐이지요. 적어도 국내의 연구에선 그런 시도를 찾을 수 없습니다. 국내 논문을 읽고 실망을 하는 것이 어디 하루이틀의 일이던가요. 물론 가끔 좋은 논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논문들은 훌륭한 참고문헌 리스트의 기능을 하긴 하지요.
다시 생각해 보면 퍼스와 툴민에 대해 제 이해가 부족한 탓에 그 부분에서 위화감을 느꼈던 듯도 싶습니다. 논리학과 인식론의 결합(종합?) 가능성을 낮게 보는 편견도 어느 정도 제 안에 있다고 여겨지고요. 친절히 확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용서라니 공짜로 배우고 가는 부족한 사람에게 당찮은 말씀이십니다, 하하;; -蟲-
블로거닷컴으로 이사했더니 트랙백 기능이 없네요. 그래서 손 트랙백 날립니다. ;;
http://wagnerianwk.blogspot.com/2010/12/v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