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초월적 논증과 과학적 사고의 대비

초월적 논증의 비초월적 성격

‘초월적 논증 혹은 선험적 논증(transcendental argument)’이라는 말은 -내가 제대로 알고 있다면-칸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철학계에서는 ‘선험논증’ 혹은 ‘선험적 논변’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우리가 경험을 했거나 혹은 어떤 종류의 실행을 했다는 사실로부터 이러한 경험이나 실행이 ‘불가능하지 않을(결국 가능할)’ 조건(상태)에서의 진리로까지 추론하는 것”이다. 칸트는 수학과 자연 과학의 종합적인 동시에 선험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보여지는 세계의 특성으로 확립하기 위해 이러한 종류의 논증을 사용했고, 스트론슨은 분석적 선험논증(analytic transcendental argument)으로 비슷한 방식의 추론을 사용했다. 종합적 선험적 판단 (2)
김영건 선생이 선험논증에 관해 정리해둔 페이지를 참고하면 될 듯 한데, 거기서 선험논증에 대한 몇 구절을 옮겨본다.
선험 논증은 비경험적 논증이다. 혹은 개념적 논증이다. 그것은 반회의주의 논증이다. 경험, 지식, 혹은 경험적 내용의 필요 조건을 탐구한다. 그 조건을 부정하는 회의론의 논증도 이미 이 조건을 선제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회의론은 자기파멸적이다. 선험 논증 1
선험 논증이라는 용어는 퍼스와 오스틴에 의해서 사용된다. 그것은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회의론 자체가 그 주장이 표현되기 위해서 회의론이 부정하는 지식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험 논증 2
위와 같은 방식으로 회의주의의 전제를 공격하는 논증은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1) Some proposition Q about our mental life, the truth of which is immediately apparent or presumed by the skeptic’s position.
(2) The truth of some extra-mental proposition P, our knowledge of which is questioned by the skeptic, is a necessary condition of Q.
(3) Therefore P. 선험 논증 3
내가 알기론 존 서얼이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세계의 실재성을 주장한다. 이미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의 나이브한 태도에 대해 몇 번 글을 썼지만, 이런 맥락에서 과학적 회의주의는 철학적 회의주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과학적 회의주의는 그저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강조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회의주의자는 우리가 외부의 사실을 결코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이다. 물론 현대에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일지 모르겠다. 단순한 개념적 유사성으로부터 주장의 근거를 찾는 일이야 흔하고 일상적인 것이지만, 단어의 유사성으로부터 주장의 근거를 찾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 회의주의가 그렇다. 과학적 회의주의와, 철학적 회의주의는 ‘회의주의’라는 단어의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초월적 논증이 회의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단순히 ‘실천’에 관계되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정치평론에서 초월적 논증이 복잡한 현실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실천’을 해야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즉 그것이 요청되는 이유는 ‘논리학’이 아닌 ‘심리학’의 영역이라는 주장이 그렇다. 하지만 굳이 칸트의 ‘초월적 논증’을 현대적 의미로 풀어낸다면, 그것은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무엇이다. 칸트는 회의주의자들의 세계인식에 내재하고 있는 자기파괴적인 모습을 ‘논리적’으로 비판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과학과 수학이 보여주는 ‘과학적’ 세계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마도 정치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이라는 말로 그가 의도하는 것은, 일상어 수준의 이해이거나 초월적 논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는 ‘초월적 논증’이라는 말을 ‘경험적 근거 없이 자신의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불쑥 튀어나오는 주장’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듯 싶다. 무엇이 되었던 간에, 그런 의미의 초월적 논증은 칸트가 제시했던 것과는 다르다.

논리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의 구별

통속적으로 사용되는 ‘과학적’이라는 개념에는 ‘객관적’, ‘논리적’, ‘확실성’ 등의 의미가 녹아들어 있다. 과학적인 것의 논리성과 확실성에 대한 연구는 과학철학의 주제다. 과학적인 것의 객관성과 확실성에 대한 연구는 과학사회학의 주제다. 특히 과학적인 것을 논리적인 것과 혼동하게 만드는데 가장 일조한 이들이 비엔나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이다.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시키려고 했다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을 논리학으로 환원시키려고 했다. 그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비엔나 학단의 등장 이후, 과학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은 구분 없이 남용되고 있다.
형식논리학의 연역 논리와 귀납 논리에 대한 구별 없는 사용도 이러한 혼란에 일조한다. 연역과 귀납에 대한 통속적인 정의와는 달리, 연역과 귀납은 실제 추리과정에서 혼재되어 사용된다. 물론 연역과 귀납은 모두 훌륭한 논증이다. 순수하게 연역적인 논증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익한 동시에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의 전제는 대부분 귀납적인 방법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연역과 귀납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더욱 실용적이다.
전제가 결론을 기대되도록 해주는 논증을 귀납적으로 타당하다고 말한다. 전제가 결론을 보장해 주는 논증은 연역적으로 타당하다고 이야기한다. 프레드 R. 버거, 김영배 역,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서광사 (2005). pp. 27
과학적인 것이 반드시 논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는 두 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대부분의 관찰이나 실험의 논리적 구조는 ‘후건 긍정 오류(fallacy of affirming the consequent)’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 사실의 대부분은 논증의 전제가 모두 옳을지라도 결론은 항상 그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헴펠이 이러한 측면을 젬멜바이스의 산욕열 실험의 사례로 <자연 과학 철학>에서 잘 설명해놓았다. C.G.헴펠, 곽강제 역, “자연 과학 철학.” 서광사 (2010). pp. 21-33.
두번째 근거는 과학철학이 구분하는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중 전자와 관련되어 있다. 보통 그것을 과학적 창의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바로 이론이 과학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과정에 논리적인 어떤 규칙이 있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물론 퍼스는 이 발견의 맥락에도 논리적인 성격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가추법이다). 이처럼 ‘발견의 맥락’의 비논리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잘 작동하는 이유를 헴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위의 이야기 가운데 마지막 말(벤젠 구조를 졸다가 발견했다는 케쿨레의 사례)은 과학의 객관성에 관한 중요한 암시를 함축하고 있다. 과학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완전히 자유스럽게 상상해도 좋으며, 창조적으로 생각해나가는 과정에서는 과학적으로 의심스러운 생각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예컨대 행성의 운동에 대한 케플러의 연구는 수에 관한 신비 사상에 대한 흥미와 천체들의 음악을 실증하려는 정열에 의해서 고무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과학적 객관성은 -가설과 이론이 아무리 자유스럽게 발명되어 과학에 재안된다 할지라도- 가설이나 이론에 대한 비판적 음미, 특히 그로부터 끌어낸 적절한 시험 명제가 주의 깊은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서 검사받는 과정을 포함하는 비판적 시험을 통과했을 때에만 과학 지식의 체계 속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원리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다. C.G.헴펠, 곽강제 역, “자연 과학 철학.” 서광사 (2010). pp. 45.

즉 ‘초월적 논증’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것을 ‘과학적 사고’ 혹은 ‘과학적 세계 인식’과 대비시키려는 것은 부당하다. 만약 초월적 논증이라는 것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과학적 사고’가 아니라, 데이터가 말해주지 않는 어떤 이념 혹은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비약적으로 등장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과학적인 주장들에도 과학자의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들이 곳곳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데이터에 기반하는 것을 과학적 사고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와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을 따지는 일이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검사를 멈추지 않는 일이다. 그러한 작업을 위해 현실이 보여주는 경험적 자료들이 아무리 불충분하다 하더라도,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지속적으로 타당성을 검증하려는 태도, 굳이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과학적 사고’라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초월적 논증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실천’을 요구받을 때 나올 수 있는 인간적인 반응”이라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과학적 논증이야말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실천을 요구받을 때 나올 수 있는 인간적 반응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한에서 -만약 대비시킨 과학적 사고를 비인간적인 반응이라고 여기는 것이라면- 오히려 초월적 논증이야말로 비인간적인 반응이다. 만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방법론이 초월적 논증이라면, 그것이 ‘과학적 세계인식’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과학적 세계인식’이기 때문이다. “섬세한 정치평론에 있어, 초월적 논증만이 난무하는 것이 유일한 길인가 하는 의구심은 든다”라는 글쓴이의 결론을 고려해본다면 이미 그는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을 굳이 초월적 논증과 대비시키려는 이유를 알기 힘들다.

결론

칸트의 초월적 논증은 경험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아니며, 철저히 논리적인 바탕위에 서 있다. 글쓴이의 ‘초월적 논증’은 칸트의 ‘초월적 논증’의 반대편에 가 있다. 만약 이 새로운 ‘초월적 논증’이 단순히 비경험적인 주장의 남발을 뜻한다 해도 그것은 ‘과학적 사고’와 대비되어 사용될 수 없다. 과학과 논리학은 다르며, 과학적인 것이 곧 논리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적 세계인식에도 글쓴이가 주장하는 방식의’초월적 논증’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현실의 경험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은채, 주장과 현실 사이의 타당성을 검증해나가는 태도다. 굳이 ‘초월적 논증’의 반대급부로 ‘과학적 사고’를 주장하려 한다면, 이러한 태도를 주장하는 것이 ‘과학적’이라는 개념의 의미에 좀 더 가깝다. ‘초월적 논증’이라는 글쓴이의 새로운 개념과 대비되는 ‘과학적 사고’는 없으며, 따라서 이 글에는 굳이 ‘과학적 사고’나 ‘과학적 세계인식’과 같은 거창한 개념이 대비되어 사용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글쓴이가 ‘과학적’이라는 개념을 지극히 통속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만이 이러한 의문을 푸는 유일한 길이다. 물론 여전히 르상티망을 끌어들이는 것은 좋은 전략이다.
추신: “특히 최근 한국사회의 큰 화두인 대북정책 영역에서 초월적 논증을 벗어나는 태도가 아쉽다.”는 오타로 보인다 “벗어나는-> 벗어나지 못하는”이 되어야 따라오는 문장 “초월적 논증의 성을 쌓아 올리는 것만 반복한다면 정치평론의 역할이 의심스럽다”와 아귀가 맞는다.
자연 과학 철학10점C. G. 헴펠 지음, 곽강제 옮김/서광사
논리학이란 무엇인가10점프레드 R.버거/서광사
정신, 언어, 사회10점존 설 지음, 심철호 옮김/해냄
  1. 한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초월적’이란 것은 transcendent(de. transzendent)에 대한 번역어로 생각됩니다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transcendental(de. transzendental, 초월’론’적, 선험적)을 염두에 두고 사용하신 개념이라면 약간 논란의 소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후자의 경우 경험사용의 형식적 가능조건을 탐구하는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의 탐구방식에 한정된다고 생각됩니다. 이 때에는 객관적 실재성을 주는 감각경험과 ‘괴리’되는 내용을 배격한다는 의미가 또한 포함될 것이라 여겨지고요. 반면 전자는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대상’의 ‘실재’에 대한 주장을 비판하는 수식어로 사용되는 게 일반적이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제가 이해하기로는 heterosis님께서 쓰신 글도 한윤형님 글에 있어서 저와 같은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여겨지네요. 아마도 변증론과 선험적 변증론의 차이를 염두에 둔다면 명확해지는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蟲-

  2. 제가 알기론 ‘초월적 논증’이라는 말은 칸트적 의미가 아니라면 (글쓴이가 철학과라는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튀어나오기 어렵습니다만,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과학적 사고’와 대비해 보려고 하는 그 지점에 다시 문제가 터집니다. 저는 그것을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초월적 논증이 칸트의 그것을 완전히 반대로 이해한 것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따져주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건 공부가 부족한 탓일테니까요. 정치평론에서 좀 막나가는 주장, 즉 경험에 전혀 속박되지 않는 이념적인 주장들이 제시될 수 있다는 건 상식에 속하는데, 굳이 그것을 실천이네, 인간적이네, 과학적이네 하는 개념들과 함게 제시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정치평론이 과학이 아니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거니까요. 게다가 은근히 정치평론가는 ‘과학적 사고’를 안하는게 아니라, 데이터가 없어서 못한다는 게으름을 표현하는 것 같아, 더더욱 비인간적인 향취를 느끼게 됩니다. 참 게으른 사고방식입니다. 정치평론은 원래 이러니까 엄밀함으로 요구하지 말라는 주장으로 들리니 말입니다.

  3.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일단 이 글의 내용에 동의되지만, 칸트가 실천의 문제나 신의 요청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어느 정도 한윤형 씨가 주장하는 면과 통할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4. 그걸 과학적 사고 또는 과학적 세계인식과 대비시키는 것이 못마땅하는 겁니다. 그 글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리가 없지요. 엄밀한 정치평론이 필요하다는 단순하고 상식적인 주장 아닙니까.

  5. 저는 평론이란 활동 자체를 어떻게 정의할지 좀 조심스러워서(사실 잘 모르겠기도 하고;) 칸트 이야기를 다루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합니다만, 허허; 뭐 칸트입장 그대로라도 ‘실천의 이념에 속하는 주장’의 특징을 형식성, 보편성에 둔다는 점에서나 그러한 형식들은 여전히 현상계와 정당하게 종합되지 않고서는 의미나 실재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실천’과 ‘과학’의 대비 부분도 비판 가능하다고 보이고요. 흐, 전 아직 공격속성이 약해서 이 이상 진전시키진 못하겠습니다;; -蟲-

  6. 둘 중에 뭘 주장했다 하더라도, 둘다 틀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쓴 글입니다. 공격속성은 천천히 발달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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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nEitherSide 2011/01/18

    (존칭생략) 1. 한윤형이 <정치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에서 처한 딜레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언’은 불가피하지 않느냐”인 것 같다. 여기에 칸트가 어설프게 개입되는 바람에 개념의 혼동이 온 것 같다(이 지적이야말로 어설픈지 모르겠다). 김우재는 초월적 논증과 과학적 논증 사이의 대립 구도는 순진할 뿐 아니라 무지의 소산이라고 비판하는 듯한데, 이 지점에 대해서는 김우재가 옳다. 그러나 한윤형은 여기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2. 한윤형이 논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