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오해

인문학의 과학에 대한 오해, 즉 ‘인문학적 제어론’을 다루면서 ‘인문학의 과학에 대한 학문적(내용적) 간섭’을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원문은 여기.
닫아버린 블로그에 누가 찾아오겠느냐마는 누군가는 이 블로그가 죽어있기를 바라시지 않기에 간간히 쓰는 글이나마 그 소식을 알린다.

추신: 요즘 우울할 땐 이 동영상을 보며 스스로를 달랜다.

  1. 오랜만에 이 블로그를 들리는데 포스팅이 이어지고 있는 걸 확인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제 이런 짤막한 언사가 우울함을 약간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다면 더더욱 기쁠테고요^^).

    1.

    ‘인문학적 상상력’은, 바로 그런 말이 무차별적으로 남용되고 있는 필드에 제가 있기 때문인지 더욱 민감한 주제입니다. 다만 저는 이 주제를 다룰 때 인문학->과학 이라는 도식 못지 않게 인문학->경영학이라는 도식을 의식하게 됩니다. 실제로 인문학 비전공자를 위한 강의가 가장 활발하게 열리고 있는 곳이 CEO들이나 기업관련 인물들을 위한 (값비싼)강의라는 걸 생각해볼 때, 저는 곧바로 인문학-> 과학이라는 관계 이전에 인문학->이윤창출 의 구도가 좀 더 우선하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모든 인문학->과학이 여기에 해당되지는 않겠습니다만, 스티브 잡스를 예시로 하는 최근의 ‘인문학적 상상력’ 관련 담론에는 인문학이 어떻게든 스스로를 자본주의 시대의 일부로 증명하고자 하는 몸부림과 이윤창출을 위해서 어떻게든 새로운 유행을 꺼낼 필요가 있는 자본가들의 요구가 맞물리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죠. 한국에서 과학이 자본(기업에 의한 것이든 국가에 의한 것이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고, 따라서 저는 인문학->과학 구도를 포괄하는 인문학->경영->과학/기술의 구도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2.

    ‘교양교육’이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둔갑(?)하는 현실을 개탄하려하다가도 저는 또 다른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데, 실제로 한국에서 ‘교양교육’은 어느새부터인가 ‘인문학’과 사실상 등가인 것처럼 전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교양교육의 전통은 (어쩌면 그 시초에서부터)’돈 안되는’ 인문학과 등치인 한에서만 존재해왔다는 것이죠. 논의가 조금 비약이 심합니다만, 한국에서의 ‘과학의 전통’이라는 걸 감안할 때 단순히 인문학의 섣부른 영향을 배제한다고 해서 그러한 전통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것인가, 이런 의문이 듭니다. 마치 교양교육과 인문학의 차이를 강조한다고 해도 실제로 각 대학에서 교양과목은 거의 인문학 전공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요.

  2. 과학을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작업은 결국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 속에서 인문학과 과학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 드러날 겁니다. 그럼에도 과학의 비판에 있어 인문학자들이 과학자의 윤리라는 개인화 전략을 펴고 있으며, 나아가 인문학을 살리자는 의도로 추진되는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기획들이 대단히 반-인문적이며 반동적임을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