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아무도 읽지 않을 그런 지면에 실리는 글이겠지만, 과학기술이 야기하는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이 그저 ‘과학기술자들의 의식을 전환’하는 나이브한 윤리학적, 그것도 규범윤리학적 강령으로 흐르는 것을 비판하던 중이었다. 그러한 지적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규범윤리학적 해결책은 나이브한데다 보다 근본적인 구조의 모순을 가린다. 예를 들어, 과학사회학자들이 윤리학자인냥 지껄이는 말들은 대기업 사원들에게 “대기업이 얼마나 썩었는데 왜 너희들은 내부고발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냐. 대기업의 뿌리 깊은 비리는 다 너희들의 썩은 양심과 의식수준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기업 사원이 부족하다면 이걸 대한민국 국민으로 바꿔 읽어도 된다. “너희들은 왜 이명박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느냐”로 질문을 바꾸면 된다.
좌파가 규범윤리학적 해결책에서 만족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저주하는 우파의 본질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한국이라는 곳에서 좌파란 규범윤리학자여야만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걸 이해하기 위해선 툴민의 <코스모폴리스>가 도움이 될 거다), 그런 규범윤리학적 강박은 좌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곧 잃게 만들 것이다. 이상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게 그린 자신의 주관적인 이상향을 대중들에게 강요할 때, 그는 더이상 좌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주어진 맥락 속에서 좌파의 스탠스를 견지하고 있는 잠재적 보수주의자일 뿐이다. 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결국 다시금 국가는 깊은 독선의 나락에 빠지게 될 것이다.
희망버스가 오고 간다. 한진중공업과 김진숙이라는 존재에 대한 민중의 공감이 움직이고 있다. 한국에서 극좌에 속한다는 어떤 지식인은 그 희망버스에게 마치 6.8 혁명의 분노한 대중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싶은 듯 하다. 자신의 이상에 희망버스의 민중이 미치지 못하므로, 그들은 못난 것이다. 그들은 부족하고 고비인 셈이다. 나는 이런 지식인을 좌파라 불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조세혁명도 아니다.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과는 거의 무관하게, 어떤 공감만으로 부산까지 달려가는 만 여명의 사람들에게, 투사의 자질을 요구하는 그런 좌파는, 그냥 솔직하게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학문이 규범윤리학이요, 자신이 다중을 말했던 것은 다중에게 규범윤리학자로서의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순서일 듯 하다.
‘고비의 희망버스’라.. 좁은 식견으론 ‘고비의 한국 먹물좌파’가 맞을 듯 싶다.
오옹… 저는 그 글을 말씀하시는 “민중의 공감”이나 혹은 분노를 체계적으로 박탈하는 방식의 운동권 지도부들의 ‘지도’ 혹은 ‘기획’에 대해 비판하는 글로 읽었는데요…
저도 위의 김강님의 생각과 비슷합니다만….
“게다가 이러한 탈시위적인 문화제(집회) 방식의 방법적 선택이 ‘부산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때, 이미 경찰 논리와 자본논리가 시위 논리를 압도하는 것이다. 시위는 합리적 이성의 게임인 언론이나 의회와는 달리 다중의 수와 힘을 물리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제도적 행정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돌파하는 것인데 경제생활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물리적으로 조심하는 방법은 스스로를 무력하게 하는 족쇄를 스스로 차는 격이기 때문이다.”
설사 조정환님이, 물리적 힘을 행사하는 걸 피한 것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라 하더라도.. 그 글 자체는 어디까지나 기획단이나 지도부 내지는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이지 일반 대중들에 대한 비판은 아니지 않은가요? 그 글은 오히려, 시민들이 그 ‘방법적 선택’의 주체가 되지 못한 상황을 아쉬워하는 글이라 여겨지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