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과학사의 방법
우리 조선 사학의 과학적인 수립을 위한 방법은 곧 특수사의 일부문인 과학사에도 적용된다. 즉 조선사의 연구는 과거에 있어서의 역사적 사회적 발전의 변천 과정을 구체적 현실적으로 구명함과 함께 그 실천적인 동향을 이론화함으로써 임무로 삼게 된다. 여기서 인류사의 보편적인 방법을 요구한다면, 그것의 정당한 파악의 이론은 과학의 역사적 사회적 발전의 변천 과정을 구명함에 욕구된다. 그러나 과학사에 있어서도 단순한 사실의 병렬적인 진열만으로는 그 구체적인 현실성을 실상케 되므로 과학의 발전과 변천에 기축이 되는 민중의 생활과 사회 구성의 발전 도정을 주시하여야 한다.
그러면 과학사의 범주는 어떠한가? 여기서는 자연 과학을 이름이나, 진정한 의미의 과학사의 구성은 기술사와 함께 이루어지므로 그 관계를 2분해서 전기에는 인간의 경험인 기술이 과학의 기초를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과학의 기술에의 응용이 기본적인 것으로 되었다. 말하자면, 먼저 인간은 과학적 기초를 갖지 않고, 자기의 생산 활동에 있어서의 그 원리를 경험적으로 발견하고, 후에 자기의 생산적 실천에 과학적 기초를 두었을뿐더러, 주로 자연 과학의 우연한 기초상에서 생산상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 함에서 본다면 그 도구는 자연을 소재로 하는 이상, 그 제작은 자연 법칙에 좇으며, 거기에서 자연을 정복케 된다. 이것이 경험적으로 발생되어, 그것이 곧 자연 과학의 기초가 되므로 우리 과학사의 서술에 있어서도 자연에 대한 해석=자연 과학사와 그 법칙을 부여한 도구의 제작, 즉 생산 제 관계=기술사의 부문을 조화함으로써 비로소 정당한 과학사의 전모를 방불케 할 것이다.
소위 과학과 기술의 발전 단계는 먼저 말한 바와 같이 기술에서 과학에의 시대와 과학에서 기술에의 시대로 2분하겠으나, 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의 역사적 발전의 변천 단계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으나, 과학사는 사회의 변천과 함께 진전해 온 인류 생활사의 근저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을 인류의 자연 해석의 제 단계와 상호 대응함에서 그 본질적인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이스에 이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로마 인은 그리이스의 과학을 발전시키었다기보다 그것의 실제 응용에 있어 로마 인의 과학은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리이스 사회와 로마 사회를 이해한다면, 즉 로마 인은 그리이스의 과학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분배와 전파에서 그 의의를 찾게 된다.
2. 조선 과학사의 연구 대상과 그 범주
일반 과학사에서 본 조선 과학의 역사적 발전의 변천 과정을 규시함이야말로 제일의적 지표일 것이다. 따라서 조선 사람의 과거의 생활사에 있어 과학하는 면과 기술의 진화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과학 기술의 변천, 발달을 이해함에는 그 가운데서도 특히 그것의 현실적인 요인인 사회/경제와의 연관에서 종합적 전체적으로 보아 정치 형태 내지 관념 형태와의 상호연관성까지도 구명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조선의 과학과 기술을 무조건으로 광휘만을 낼 필요도 없거니와, 과거에 있어 어떤 의도 하에서 당연히 과학적인 가치를 부여하여야 할 것을 무조건으로 말살하여던 것도 배격하고 정당한 비판으로써 이해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부분적인 특수성보다도 보다 일반적인 ‘생활사=과학/기술의 역사’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따라서 원시 사회의 기술에서 구명할 만한 과학의 제 면모를 우선 영세한 고문헌과 수집된 유물에 좇아 복원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오는 고대 사회-고구려/백제/신라의 각자의 발전 내기 통일에 따른 과학/기술의 변천은 출토 유물인 침묵 자료와 역시 영세한 문헌에 의해, 또 중국 과학사와 일본 과학사에서의 자료의 상보로써 구성할 수 있다. 그 후 고려 봉건 사회는 먼저 통일된 신라의 그것을 계승하고, 더우기 당시의 외국 문화의 수입에 따라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 사회에서 전화된 이조 봉건 사회의 과학은 소위 세종조 대를 중심으로 관료적-왕권적인 궁정 과학의 편성을 보이고, 그 후 영/정 2대의 군주에 의한 청조 문화의 수입에 따른 궁정 과학의 재정비와 실사구시 학파(실증학파/실학파)의 실증적인 학풍의 발흥에 따른 서구적(연경을 통한 것)인 과학 사상의 유입을 보았다.
그러나 이조 봉건 사회의 최후의 절대적 왕정주의자 이하응 대원군에 의해 모든 것은 국제적인 연관성에서 유리되고 고립화됐다. 다단한 전환기인 근대적 개방에 의해 수축하려던 서구적인 교육, 즉 구한국 시대의 극히 단시일의 신학문의 수립에의 정열은 이미 역사적-정치적 기초가 없는 것으로 되고 말았다. 이어 온 것은 한일의 강제적인 통합인 일본의 침략으로써 이조 사회는 해체됐으므로 그의 봉건적인 과학은 지양되고 말았다. 여기서 말하자면, 우리들의 연구 대상은 현대 과학사의 선행적인 과제로서의 ‘고전 과학사’의 기도에 불외한다.
동양적 봉건 사회의 일원이었던 조선 사회가 가진 과학은 유럽 사회의 그것과는 현격한 차가 있었으며, 충분히 이론적인 체계도 갖추지 못하고, 그 진로는 사회적으로 제약을 받고는 있었지만, 전혀 자연 과학의 특수 부문에 있어서는 유럽의 근대 자연 과학의 선구이었던 빛나는 업적도 남기고 있다.
봉건적인 권력과 그 사회 구조로써 신분적인 제약이 있어 과학의 시민적인 발전을 억제한 점이 있었고, 또 중국에의 예속적인 관계로써 그에 종속됨에서 일부 과학의 정체도 있었으며, 유학적인 관념에서 비실용적-비현실적인 가례론의 방대한 이론적 성과는 오히려 당파의 투쟁과 함께 초해되었을 뿐이고, 우리 과학 지식의 발달에는 기여함이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조선 과학의 연구는 소재와 자료는 풍부하나, 그것은 한갓 고전적인 자료에 그치고, 이론적인 전개가 없음에서 과학으로는 정체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자료의 수집, 그 체계화에서 이론적 전개를 구명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학계(근대적인 문화에 접촉한 우리들은 곧 식민지의 노예적인 신분에 종속해 있었으므로 학계라고 운위할 수도 없지만, 미숙한 식민지적인 그것을 구태여 확언한다면)에는 과학사의 전저가 없다. 오직 조선 사학의 몇 개의 저작들에서 과학사 연구에 원용할 수 있는 것을 추출함에서 소재의 판단을 도울 것이다.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발췌록, 아카이브 (2002-2013)
in조선 과학사 서문: 홍이섭
홍이섭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조선과학사> 서문을 옮긴다. 특이한 점은 그가 과학과 기술을 나누어 서술한다는 점이다. 강조는 내가 했다. 다음 논문에서 참고했다. 홍이섭, ‘서문: 조선 과학사’, 나라사랑, 18 (1975), 210-213.
우재횽이 강조한 부분과 봉건 사회들에 대한 소묘에서 역사유물론 느낌이 나는군요(음, 스멜~). 홍이섭이라는 이름을 여기서 처음 보네요-
홍이섭이 살던 시대에 역사유물론은 상당히 널리 퍼진 관점이었으니까. 이 당시 역사학자들이 억지로 조선을 봉건사회에, 대한제국을 근대로 짜맞춘건 도올이 잘 파악해서 비판했고. 바로 이 시점부터 근대화 논쟁이 시작되는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