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로 일상이 가득하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네이쳐나 그 아래급의 저널에 낸 논문 한편만으로도 한국에서 교수가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젠 그 정도로는 택도 없다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박사학위를 가진 과학자 중 대학에 자리를 잡는 사람의 비율은 채 15%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도 그들중 상당수가 또다시 실적부진으로, 연구비 부족으로 대학을 그만두어야 한다. 조교수가 되었다가 다시 포닥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늘고 있다. 나머지 85%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중 상당수는 과학계를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뒤돌아 과학을 쳐다보려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연좌제라고, 그들의 자식들이 과학자가 되려한다면 기어코 말리고야 말 그런 결심을 한 이들이 대다수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과학자가 너무 많다. 사회에서 필요한 수요가 충분히 존재하는 공학자나 기술자에 비해, 과학자의 수는 너무 많다. 수십년전에 편하게 교수가 된 이들,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과학을 지나치게 과대포장해서 사회가 과학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품게 한 이들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고 말았다. 지금 그들은 배부르다. 이런 지긋한 위계구조와 경쟁구도를 만들어 두고, 그들은 이러한 체계로부터 엄청난 이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또다시 그 오래된 구호를 남발한다. 과학에 더 많은 지원을, 더 많은 장비와 돈을. 과연 그러한 구호가 언제까지 통할 것이며, 또한 정당한 것인가?
잉여의 과학자들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것인가? 그들은 이 역겨운 자본주의의 수렁이 그들의 위치를 점점더 구덩이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모르는 듯 하다. 많은 과학자들은 오히려 그 자본주의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의 전통 속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저질러야만 하는 그 수렁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몬산토로, 거대제약회사로, 것도 아니면 벤쳐로, 또는 퀀트가 되어 맨하탄의 금융중심지로. 자신의 전문분야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이들이 사회를 전체적으로 조감하는 데 있어서는 이다지도 무력하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멍청하다.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뛰어든 과학자들이야 그저 그렇게 잘살라고 내버려둔다 해도, 이 경쟁에서 도태된 그 수많은 이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그들이 각성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종교가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잡상. 2011년 9월 22일.
“수십년전에 편하게 교수가 된 이들”이라고 단순하게 낮춰버리기에는 그 당시 시절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에서 과학이란 것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된 것은 “수십년전에 편하게 교수가 된 이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과학이란 것에 대한 교육체계조차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아니 제대로된 교과서 하나 없던 그 시절에 허허벌판 황무지를 개간해가며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연구에서 손을 놓은 대부분의 이유는 연구할 수 있는 방도가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뭐가 있어야 연구를 하지요. 아시다시피 70년대를 살던 분들은 갖고 있는 실험도구, 실험 시약 안에서만 연구를 할 수 있었고, 논문 하나 얻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 우편으로 받아보거나 미국에 갔다 와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기에 연구에서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지금은 배만 불러 보이는 것입니다. 상투적인 표현입니다만, 지금의 잣대로 그 분들을 단순하게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보다 그 당시 시절에 대해 고민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논리를 ‘박정희의 경제성장’에 그대로 대입해보시면 됩니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으시면 제가 ‘새사연’에 기고했던 글들을 읽으시면 됩니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으시면 최근 네이쳐에 실린 ‘Ph.D Factory’라는 에세이를 읽으시면 됩니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으시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못 읽었을 수도 있지만, “수십년전에 편하게 교수가 된 이들”이란 표현은 앞에서 언급하신 네이처, 사이언스와 어울려, ‘지금은 엄청나게 공부해도 교수되기 어려운데 과거엔 연구도 안하던 사람들이 쉽게 교수가 되었다’라는 식으로 읽힙니다. 이런 의미가 아니셨다면 이우재님의 글을 잘못 읽은 제 탓입니다.
제 분야에서도 과거 7-80년대엔 어지간한 지금의 SCI급 논문 좋은 것 한 두개만 있어도 소위 명문대 교수가 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만으로 과거에는 교수가 되기 편했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우리나라에서 그만한 논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적었으니까요. 그 이유는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할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고 연구를 계속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매우 큰 결단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쓰레기 장에서 얻은 논문 하나 공부하던 분도 있고, 교재 하나 변변한 것이 없어 등사실에서 조교가 복사해 준 교재로 공부했어야 했던 분들도 있습니다. 참고문헌은 꿈도 못꾸었고. 실험할 시약이 없어 학교가 갖고 있는 시약만으로 연구할 수 있는 주제를 잡아 연구하여 박사를 마친 분들도 있습니다. 이렇듯 제가 아는 은사님들, 선배교수들은 대부분 당시의 매우 힘든 현실에서도 그나마 공부에 끈을 놓지 않고, 많은 것을 포기한 후에야 교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수가 된 후에도 앞서 말씀드린대로 연구할 환경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이 7-80년대의 현실이었습니다. 70년대에 차관을 받고 나서야 몇 몇 대학에 겨우 실험도구가 갖추어졌던 것은 잘 아실 겁니다. 80년대만해도 참고논문 하나 얻는 것 자체가 몇 달이 걸리는 매우 힘든 시절이었던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에 대해 “편하게” 교수가 되었다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우리네 학문의 선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수십년전에 편하게 교수가 된 이들”이란 말씀을 쉽게 하시기 전에 수십년 전에는 지금보다 교수 되기가 편했다는 사실에 대해 먼저 근거를 대실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논문이 있네 없네라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들이 그 당시 어떻게 행동했어야 “수십년전에 편하게 교수가 된 이들”이란 욕을 먹지 않을 수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여담이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라면 과학자들이 너무 많아지는 것에 대해 이제는 별로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근 몇년간 이공계열에서는 대학원생들의 수도권이나 카이스트, 포항공대 집중현상이 아주 심해서 지방의 거점국립대에서도 대학원생을 모집하는 것이 매우 힘든 상황입니다. 게다가 이공계열에서는 서울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정도를 제외하면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고 달려드는 박사과정생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취직을 위해 수도권 대학원에 오는 경우가 상당수입니다. 더 나아가 서울대, 카이스트, 포항공대에서도 연구를 계속하려고 맘 먹는 학생들의 비율은 낮아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연구직으로 계속해서 밀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학생들은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십년전에 편하게 교수가 된 이들”의 ‘과대포장’이나 ‘환상’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정도로 학생들은 이미 충분히 ‘각성’하고 있습니다. 영특하지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박사학위는 연구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취직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 정도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 문단을 보면 당신역시 젊은이들이 더이상 학계를 매력적인 직장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공감하는거 같은데요. “근거를 대라”고 하셨는데 매사를 그렇게 다큐로 받으신다면 이렇게 말할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피해본거 있으면 고소하세요.”
agsg 님은 우재님이 소위 선배에 대한 ‘예의’를 차리지 않은거에 발끈하신 것 같은데.. 이 글은 그 부분이 영향을 줄 내용을 담고 있는게 아니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볼 때 이 글에 드러나고 있는…가장 심각한 문제는..우재님이 현직 과학자들에게 과학자가 아닌, 현실 변혁을 위한 활동가/운동가/정치인의 역량을 요구하고 있다는거…
이렇게 표현하면..정치/운동이 과학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받아치실지 모르지만.. 현실은 엄연히 자신이 속한 세계와 자신이 맡은 role에 맞게 자신의 행동을 조율하는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는거..
대개 이게 어긋나 버리면 나도 고생하고 주변 사람도 고생한다. 비판적 사고는 기성 종교인에게 필요한 자질은 아니다. 또 말싸움이 영업사원에게 필요한 자질은 아니다.
평소 말싸움을 즐기는 이가 영업직을 지원한 다음에.. “아니..왜 다른 영업사원들은 고객들에게 옳은걸 옳다고 쏘아 붙여주질 못하는거야?” 하고 말해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왜냐하면…영업직이라는 role자체가 시비를 가리는 말싸움과 과감히 일별해야 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다른 영업직 사원이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기 전에 자신이 영업이란 분야를 잘못 선택하지 않았는가를 되물어야 한다.
촘스키나 굴드와 같이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고자 한다”라면, 뭐 그런 선택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자신이 지닌 정치-사회적 문제의식을 왜 다른 과학자들이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본인이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한…이 분은 자신이 추구해야 할 분야를 잘못 선택한 것이란 결론밖에 나오지 않을거라 말 하고 싶다.
경험과학을…그것도 실험을 한다는 사람이 왜 현실인식은 그리도 “형이상학”적인가? 정신세계의 내적 일관성이야 어떻든 상관 없다는건가?
자본주의를 괴물로 보는건 좋은데, 모두가 그렇게 보는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자. 하다못해 같은 가족끼리도 주어진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서로 남남인 사람이 같은 관점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해 주길 바라나? 전체주의가 아니고선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자아 비판을 권한다…그러나 본인의 신념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길 바란다. 실험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염두에 두고 과학, 과학자, 사회에 대해 자신이 취하는 태도가 정말로 “적절”한 것인지를 되 물어 보길 권한다. 만약 본인의 신념이 이 기준을 넘어서 있을 때 해당 부분을 잘라내 버릴 수 있는지를 검토해보시길…
그렇지 못하다면, 아마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포기하고 시민 사회단체의 활동가로 나서는게 더 낫지 않을까…?
어려운 철학적 정치적 논의는 잘 모르겠고, 그저 ‘편하게 교수가된 이들’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이건 교수가 십수년 먼저 되고 아니고 문제가 아니고, 그분들이 어떻게 편하게 자기업적을 쌓아가는 전략을 이어나가셨는지인데. 실험과학쪽에서는 어떻게든 학생들을 꼬드겨 대학원생으로 만들고 그들의 값싼노동력으로부터 어떻게던 많은 데이터를 얻어내고 그걸로 어떻게던 논문을 만들어서 연구비를 타내고 또 그 연구비로 더 많은 대학원생을 고용해서 더 많은 업적을 내는 선(?)순환을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서 그 많은 ‘잉여’들이 만들어진다는 것.
내가 구체적으로 제안하건데, 연구재단은 이론적인 발전없이 다수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연구들에 감점을 주던지 하고 (지금은 오히려 대학원생 많이 쓰는 연구가 ‘인력양성’ 점수를 더 많이 받는 것 같음), 정 실험인력이 많이 필요한 연구라면 일정 비율 테크니션(또는 연구교수)을 고용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대책없이 과학자과 학위라는 미끼로 값싼 실험기술자로만 이용해 먹는 (황우석 같은) 연구는 다수의 젊은 한국인을 결국 미국의 길거리로 (10년 포닥하다가 세탁소라도 차려보려) 내모는 역할 밖에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