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아나키스트의 도시

영화 ‘남쪽으로 튀어’는 아나키스트 부모를 둔 아이의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나키스트인 아버지는 결국 딸을 두고 전설의 섬 파이파티로마로 향한다. 아버지가 딸에게 해주는 마지막 대사를 여전히 기억한다.

비겁한 어른은 되지마.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양영수에 따르면, “대륙에서 격절된 외딴 섬이라는 제주도의 지정학적 환경은 ‘작은 정부’와 ‘최소의 권력’이라는 아나키즘적 지향과 부합된”다. 그는 4.3사건 당시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실질적 통치기간에 나타난 아나키즘적 이상사회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타진하고 있다. 복잡한 제주 4.3 사건을 모두 아나키즘의 시각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주라는 섬을 아나키즘의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은 흥미롭다.1

이호룡은 제주에 어떻게 아나키즘이 유입되었는지, 그리고 제주의 아나키스트 운동의 흐름은 어떠했는지를 개괄하고 있다. 제주의 아나키즘은 반도의 운동 뿐 아니라, 일본 오사카의 아나키스트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중심에 제주도 출신 아나키스트 고순흠이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세 깃발 아래에서>를 통해 19세기 후반, 이미 아나키스트들은 이른 세계화를 이루어냈으며, 국제주의적 가치 속에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19세기 후반, 조선이 망하고 근대가 유입되는 그 해방공간에서 많은 조선인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권위와 위계가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물론 세상은 그 순진함을 비웃었지만.2

동아시아 아나키즘에 대한 세계적 전문가인 조세현은, 최근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 교류와 연대 -적자생존에서 상호부조로>를 통해 이미 19세기 후반 초국가적 세계주의적 지향성을 가지고 활동하던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을 다루면서, 아나키즘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동아시아의 고유한 문화와 사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1907년 동아시아 최초로 설립된 반제국주의 단체인 ‘아주화친회’가 소개된다. 일본, 중국, 인도,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그리고 조선 등이 참여한 국제적 연대인 아주화친회는 넓은 이념적 포용성을 보여주며 상호부조의 가치로 탈 위계적 조직성향을 표방했다. 이 책을 소개하는 서평논문에서 김성국은 이렇게 말한다.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꿈은 지속가능하므로 실현가능하다!”

아나키스트에게 과학과 기술이 거부의 대상이 된다면, 그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미 그의 저작들을 통해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아나키즘의 만민평등주의를 진전시켰는지 자세히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이미 인쇄자본주의(print-capitalism)를 통해 인쇄 기술이라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민족주의 사상 발전의 배후에 있었음을 주장”했고, <세 깃발 아래에서> “그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 ‘철사’(wire, 전보의 발명과 해저 케이블 등)에 의한 통신수단의 발달과 1876년 만국우편연합의 출범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아나키즘의 국제적 연대를 조명한다.

한국 최초의 인터넷 기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다음이 제주로 본사를 이전했을 때만 해도 제주가 어떤 희망이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건 여전히 마찬가지다. 하지만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가 제주에서의 모임을 시작으로 그 첫 걸음을 내딛었을 때, 나는 한국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꿀 어떤 일을 한다면, 그 곳을 제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남쪽으로 튀어>를 보며 미국의 군사기지 건설과 싸운 오키나와의 아나키스트를 떠올렸고, 오키나와에 놀러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제주라는 섬이 우리 곁에 아나키즘과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제주, 아마 그 곳에서 한국사회를 완전히 바꿀 변화가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미래는 알 수 없지만.

  1. <양영수. (2016). 제주 4.3 사건에 대한 아나키즘적 해석. 제주도연구, 45, 39-67>
  2. <이호룡. (2017). 제주도 지역의 아나키스트 운동. 제주도연구, 47, 4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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