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대학의 생명과학 학부교과서 자문을 돕고 있다. 생명과학 교과서에 발견의 맥락과, 철학적 사유, 그리고 과학과 사회가 연결되는 지점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다. 느리지만 정밀하게 틈틈히 글을 쓰고 있다.
이두갑의 논문 “이두갑. (2013). 아서 콘버그(Arthur Kornberg)의 DNA 연구 제도화와 공동체적 구조의 건설, 35(1), 131–149.”은 학부생들에게 분자생물학의 역사 속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을 알려주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귀한 논문이다. 이두갑 교수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과학사회학을 전공했고 박사학위 논문으로 “Yi, D. (2008). The recombinant university: Genetic engineering and the emergence of biotechnology at Stanford, 1959–1980.”을 썼다. 이 논문은 시카고대학 출판부에서 2015년 출판되었다. 스탠포드 대학이 어떻게 생명공학의 메카로 떠올랐는지를 다룬다. 아서 콘버그가 스탠포드에 재직하면서 생화학과 생명공학 연구가 활성화되었으니, 이두갑의 한글논문은 졸업논문의 일부를 확장발전시킨 작품일 듯하다. 그는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와 과사철 협동과정 교수로 동시재직중이다. 꽤 많은 논문을 썼고, 영어로 된 논문도 계속해서 발표하고 있으니, 김경만 교수의 틀에 따르면 글로벌 지식장에서 열심히 연구 중인 성실한 학자다.
아서 콘버그는 DNA중합효소를 발견한 공로로 1957년 노벨상을 받은 생화학자다. 그는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NIH에서 생화학자로 훈련을 받은후 워싱턴 대학교를 거쳐 스탠포드 대학교에 생화학과를 설립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콘버그를 생화학자로만 기억해서는 안된다. 이두갑의 논문이 말해주듯, 콘버그는 DNA 연구를 제도화시키고, 연구공동체의 구조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행정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철학: 효소 냉장고
NIH에서부터 콘버그 실험실은 머튼이 말한 과학의 공유주의의 전범이라 부를만 했다. 콘버그는 효소클럽 enzyme club을 운영하며 자유롭고 열린토론이 가능한 문화를 만들었고, 그의 동료 히펠의 냉장고는 ‘열린 냉장고’라 불리며 당시로서는 구하기 어려웠던 여러 효소들을 모두와 공유했다. 막스 델브뤽의 파지 그룹 phage group과 비슷한 문화가 콘버그의 주변에 펼쳐졌던 것이다.
제도: 신임교수 지원
그는 NIH를 떠나 워싱턴을 거쳐 스탠포드로 옮겨가는데, 이 과정에서 워싱턴과 스탠포드에 그가 정착시킨 문화는 더욱 놀랍다. 그는 신진교수들이 안정적으로 학과에 정착해, 선배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연구비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는 콘버그가 신임교수에게 쓴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예전에 한 번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지닌 대부분의 재원(resources)들을 공유합니다. 이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우리의 실험활동에 유연성(flexibility)을 제공해 줍니다. 일례로 당신과 같은 신임교수들은 실험에 필요한 재원과 화학 물질들, 그리고 기기들을 다소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당신과 같은 신임교수들에게 실험 조수나 학생들이 필요할 경우에도 학과에서 공유 되는 재원을 통해 부가적인 지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두갑. (2013). 아서 콘버그(Arthur Kornberg)의 DNA 연구 제도화와 공동체적 구조의 건설, 35(1), 131–149.
콘버그는 DNA연구를 위한 공동체적 구조를 건설했다. 그것은 과학의 공유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 덕분에 가능했다. 콘버그가 일군 DNA연구의 제도화와 공동체적 구조의 건설은, 과학연구현장의 ‘도덕경제’라는 개념으로도 다루어진다. 도덕경제(Moral Economy)란 영국의 역사학자 톰슨(E. P. Thompson)이 그의 저서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제안한 유명한 개념이다. Thompson, E. P. (1971). The moral economy of the English crowd in the eighteenth century. Past and Present, 76–136. 모건의 초파리 유전학과 천문학의 사례와 함께 콘버그의 생화학 그룹은 과학사에서 도덕경제가 작동한 대표적인 방식으로 기억될 것이다. DNA 연구의 제도화를 도덕경제라는 개념을 사용해 과학자들의 경쟁과 협력을 재조명한 연구는 다음을 참조. Angela N. H. Creager and Gregory J. Morgan, “After the Double Helix: Rosalind Franklin’s Research on Tobacco Mosaic Virus,” Isis 99 (2008), pp. 239-272; and Bruno J. Strasser, “The Experimenter’s Museum: GenBank, Natural History, and the Moral Economies of Biomedicine,” Isis 102 (2011), pp. 60-96.
사회: 산업화에 대한 반발
만약 한 분과학문에 공유주의의 학풍이 자리잡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과학자는 자연스럽게 사회를 바라보는 정의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콘버그의 생화학 그룹이 1980년대 생물학의 특허활동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이다.
독특한 공유의 도덕경제에 기초해 과학 활동을 수행해온 스탠포드의 생화 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생물학에서의 특허활동에 대한 반대를 시작으로 생물학의 상업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들의 상업화 비판과 과 학자 공동체 침식에 대한 우려의 기저에는 그들 고유의 공유의 문화가 존재 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두갑. (2013). 아서 콘버그(Arthur Kornberg)의 DNA 연구 제도화와 공동체적 구조의 건설, 35(1), 131–149.
콘버그는 1918년 철물점을 운영하던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인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자란 동네는 교육열이 높았으며 사회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도 뉴욕 퀸즈에서 나고 자랐다. 사회에 깊이 관여했던 두 과학자 모두 뉴욕에서 태어나 교육받았으나, 그것이 뉴욕이라는 문화의 산물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가 썼던 짧은 글 “과학은 대단하지만 과학자는 민중일 뿐이다”에서 단초를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짧은 사이언스지의 편집자 서문에는 20세기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목도하며 과학이 변모하는 과정을 몸으로 부딪혀 겪으면서도 공유주의라는 과학의 전통적 규범을 실천한 한 과학자의 모든 세월이 녹아 있다. 과학을 연구하려는 학도들은 반드시 일독해보기를 권한다. 탁월한 문장들은 다른 지면을 빌리기로 하고 (일부는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그의 공유주의 규범이 녹아 있는 단락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기로 한다.
With regard to the support of science,the major flaw is the demand that the scientist justify a project on the basis of its goals.The more limited the resources of a nation or its agencies for funding science,the more stringent is the requirement that the research be visibly directed to solve some urgent problem of society. This philosophy is misguided in a fundamental way. The truly major discoveries that have altered the face ofmedicine for example, x-rays, penicillin, recombinant DNA-have all come from the pursuit of curiosity about nature without relevance to medicine. The same can be said of great industrial inventions, which were haphazard at the outset and only later recognized for their commercial value. Kornberg, A. (1992). Editorial: Science Is Great, But Scientists Are Still People. Science, 257(5072), 859. doi:10.2307/2877548
그의 아들 톰 콘버그는 UCSF에서 초파리 유전학을 연구했고, 원래 잘 나가던 첼리스트이기도 했다. 같은 층에서 연구했었는데 얼굴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남궁석 박사가 콘버그가 왜 뮤지션에서 생화학자로 변신했는지를 재미있게 정리해뒀으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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