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인물이 쓴 <비트코인: 개인-대-개인간 전자 화폐 시스템>을 읽어보자[note]Nakamoto, Satoshi.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2008): 28.[/note]. 이 논문의 초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의미가 통하게 임민철의 한국어 번역을 좀 손봤다).
순수하게 개인 대 개인간에 이루어지는 전자 화폐가 있다면,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직접 전달되는 온라인 결제가 가능해질 것이다. 전자 서명이 이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해법을 제공하지만,이중지불 (double-spending)을 막기 위해 여전히 신뢰받는 제3자가 필요하다면, 개인간 거래의 이점은 사라진다. 이 논문은 개인 대 개인 네트워크를 사용해 이중지불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을 제안한다. 이 네트워크는 거래를 해싱해 타임스탬프를 찍어서 해시 기반 작업증명(proof-of-work)을 연결한 사슬로 만들고, 작업증명을 모두 다 재수행하지 않고서는 변경할 수 없는 기록을 생성할 수 있다. 가장 긴 사슬은 목격된 사건의 순서를 증명할 뿐아니라, 그것이 가장 광대한 CPU 파워 풀에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한다. CPU 파워 과반을 통제하는 노드가 네트워크를 공격하기 위해 협력하지 않는 한, 이들은 가장 긴 사슬을 만들어내며 공격자를 압도할 것이다. 이 네트워크는 최소한의 구조로 기능한다. 메시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퍼져나가고, 노드는 의사에 따라 네트워크를 떠나거나, 최장의 작업증명 사슬을 그들이 없는 사이에 벌어진 일의 증거로 채택해 재합류할 수 있다.
비트코인이라는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하나의 시스템 때문에 유명해졌지만, 비트코인은 블록체인의 하위개념이다. 왜 블록체인의 첫 응용이 비트코인이라는 화폐시스템인지를 추론하려면, 몇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비트코인 논문이 출판된 해다. 2008년,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고, 금융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내적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금융자본주의가 초래한 불평등은 2011년 금융자본의 중심, 뉴욕 맨하탄에서 월가점령시위로 나타나고, 2013년에는 토마 피케티라는 인물에 의해 <21세기 자본>으로 정리되었다. 9년의 시간 뒤에야 촛불로 나타났던 민심처럼, 민중은 느리고, 학문은 더욱 느리다. 2008년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디지털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해커그룹이었다. 여전히 사토시 나카모토가 누군지 모르지만, 금융자본주의가 잠식해온 화폐 시스템을 대체하려는 그 의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화폐를 통제하는 국가, 국가로부터 권리를 양도받은 중앙은행, 그들은 사악하고 심지어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나카모토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아나키즘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 사토시 나카모토를 디지털 아나키스트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아나키스트라면 그는 인간은 위계가 없어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녀야 하며, 따라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하는 인본주의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만약 이 누구인지 모를 해커 혹은 혁명가가 2008년의 금융위기에 반응했다면, 그는 아나키스트가 맞다. 언제나 자본주의의 극단에 아나키스트가 위치해왔기 때문이다.
20세기 이념의 전장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 양쪽에서 공격당해, 결국 스페인 내전을 축으로 힘을 잃었다. 냉전이 시작되었고, 반세기 동안 세계가 자본주의자 진영과 공산주의자 진영으로 나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아나키즘이 스페인 내전에서 산화해 세상으로 스며들었다고 생각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이념에 충실했고, 공산주의자들처럼 집단과 위계에 기대 대다수의 군중을 억압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나갔다. 20세기 후반이 되면 수많은 시민운동이 싹트고, 이념에 경도되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권위와 위계에서 자유로운 시민의 자율적인 운동을 펼쳐나갔다. 권위가 직접민주주의 진로를 가로막을 때마다, 위계가 우리 생활에 불평등을 초래할때마다, 아나키즘은 그 반작용으로 나타난다. 스페인에선 포데모스가, 이탈리아에선 오성운동이, 한국에선 촛불이 일어났다. 협동조합으로, NGO 운동으로, 그리고 디지털 혁명을 통한 직접민주주의로, 아나키즘은 우리 곁에 있다. 블록체인과 비트코인은 가장 최근에 등장한 아나키즘의 한 갈래일 뿐이다.
한국에서 아나키즘은 시인의 아나키즘이다[note]궁금하면 구글학술검색에서 아나키즘을 검색해보라[/note]. 하지만 내가 언젠가 말했듯, 아나키즘은 시인에서 프로그래머로 옮겨갔다. 더이상 아나키즘은 문학의 영역에 머무는 한가로운 이념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해커들에게 옮겨가 세상을 직접 변화시키며, 권위와 위계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나키즘을 처음으로 이론화했던 인물은 과학자였다. 크로포트킨을 지금 이해하려면, 현재에 벌어지는 이 모든 아나키즘에 얽힌 사건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아나키즘은 가장 과학적인 이념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가치를 찾는, 고정되거나 독단적인 이념이 아닌 유일한 사상체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집단은 과학기술인이다. 그들이 다루는 학문의 특징이 아나키즘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 진리 앞에선 남녀노소 따위의 위계와 권위는 설 땅이 없다.
나는 돈 탭스콧 (Don Tapscott)이 TED에서 한 이 강의가 블록체인이 가져올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note]그는 캐나다인이다. 캐나다가 인공지능을 비롯한 한국이 원하는 4차산업혁명분야에서 세계최고의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note]. 블록체인은 인공지능도, SNS도, 빅데이터도 아니다. 하지만 아마도 향후 10년간 세상을 가장 불가역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아나키즘의 본질을 시인에게서나 찾는 한국의 아나키즘 연구자들처럼, 한국정부는 4차산업혁명이라는 단어에 집착해 비트코인을 규제할 생각이나 하고 있다. 정당한 방식으로 권위를 부여받지 못한 집단에겐 실력이 있을리 만무하고, 그런 집단은 합당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다.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을 다루는 방식이, 향후 한국의 항로를 결정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비트코인 논문의 마지막 구절을 옮기는 것으로 마친다.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이 이제 누구에게 가야하는지 모두 깨닫길 바란다.
우리는 신뢰에 의존하지 않는 전자거래용 시스템을 제안했다. 강력한 소유권 통제를 제공하는 디지털 서명으로 만든 화폐(coins made from digital signatures)는 유력한 프레임워크가 될 수 있지만, 이는 이중지불 방지수단 없이는 불완전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정직한 노드가 CPU 파워 대부분을 제어하는 조건에서, 공격자가 전산적으로 변경해봐야 금방 비현실적이 되는 작업증명을 사용한, 공개된 거래 이력을 기록하는 개인 대 개인 네트워크를 제안했다. 이 네트워크의 견고함은 그 정형화되지 않는 단순성(unstructured simplicity)에 있다. 노드는 아무런 조정(coordination)없이도 한 번에 모두 작동한다. 이들은 메시지가 경로를 지정받아 어떤 특정 위치로 가는 게 아니라 단지 최선의 노력을 다해 전달되면 그만이기 때문에, 전혀 식별될 필요가 없다. 노드는 의지에 따라, 네트워크를 떠났다가 그가 없는 동안 벌어진 일의 증거로 작업증명 사슬을 받아들여 재합류할 수 있다. 이들은 CPU 파워를 사용한 투표를 통해, 유효한 블록을 연장하는 작업을 승인의 표현으로 쓰고, 유효하지 않은 블록에 대한 작업 거부를 기각의 표현으로 사용한다. 어떤 종류의 필요 규칙도 인센티브도 이 합의 기제(consensus mechanism)를 통해 집행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