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Flyandbee, 김우재 (2014-)

무료였던 논문이 1,800만 원이 되기까지

졸업을 앞둔 학생의 논문이 마침내 받아들여졌다는 메일을 받던 날, 나는 잠깐 웃었고 곧 계산기를 두드렸다. 데이터를 모으는 데 삼 년, 리뷰어 셋과 씨름하는 데 반 년이 걸린 그 논문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우리가 마지막으로 치러야 할 값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초파리를 키우고, 행동을 찍고, 유전자를 잘라내는 일에는 늘 돈이 들어간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끝난 연구를, 이미 심사를 통과한 논문을, 그저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일에 또 한 번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는 매번 같은 자리에서 멈칫하게 된다. 과학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는 지식을 공개하는 일을 돈을 받고 파는 상품으로 바꿔버린 걸까.

며칠 전 존스 홉킨스의 한 역학자가 쓴 짧은 글을 읽었다. 그는 2025년에 네이처 메디신에 논문 한 편을 무료로 실었다고 했다. 엄격한 동료 심사를 거쳤고, 편집진이 손을 봐주었고, 단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2026년, 같은 저널에 같은 방식으로 NIH 지원 연구를 실으면서 그는 12,850달러를 내야 했다. 협상의 여지조차 없는, 출판사가 정해 통보한 금액이었다. 한 해 사이에 0달러가 1,800만 원이 된 것이다. 논문의 질이 그만큼 좋아진 것도 아니고, 출판사가 새로 해준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 규칙이었다.

그 규칙의 출발점은 선의였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2024년에 새 공공 접근 정책을 만들고 2025년 7월부터 시행했다. 세금으로 지원한 연구라면 그 결과를 누구나 즉시, 공짜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보다 더 옳은 말이 있을까. NIH의 지원을 받은 연구자는 심사를 통과한 원고를 퍼브메드 센트럴이라는 공개 저장소에 올려야 하고, 그러면 그 논문은 저널에 실리는 즉시 엠바고 없이 풀린다. 실제로 많은 비영리 출판사들은 이 흐름을 받아들여 엠바고를 없앴고, 그들의 논문은 정말로 누구나 즉시 무료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꿈꾸던 오픈 액세스의 모습 그대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스프링거 네이처, 엘스비어, 와일리처럼 7,500종이 넘는 저널을 쥐고 있는 영리 출판사들은 셈법이 달랐다. 그들은 저자에게 최종 원고의 저작권과 통제권을 자기들에게 넘기라 요구하면서, 퍼브메드 센트럴 공개에는 여전히 6개월에서 12개월의 엠바고를 걸어두었다. 그러니 NIH 정책을 지키려는 연구자에게는 길이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엠바고를 없애려면 출판사의 ‘오픈 액세스 옵션’을 사는 것. 그 값이 와일리의 어느 암 저널은 4,840달러, 엘스비어의 란셋은 9,550달러, 그리고 스프링거 네이처의 네이처와 네이처 메디신은 12,850달러다. 공공 정책이 명령한 ‘무료 공개’가, 영리 출판사의 계산서 위에서는 가장 비싼 청구서로 둔갑한 셈이다.

여기서 나는 오래전부터 해온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다. 오픈 액세스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오픈 액세스라면 무조건 옳다’는 교조는 좋은 것이 아니다. 지식을 모두에게 열겠다는 이상이, 어느새 저자에게 천만 원이 넘는 돈을 받아내는 가장 세련된 명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개’라는 단어에 너무 쉽게 고개를 숙인 나머지, 그 공개의 비용을 누가 내고 누가 챙기는지를 오래 따져 묻지 않았다. 독자에게 돈을 받던 구독료의 장벽을 허물자고 시작한 운동이, 이번에는 저자에게 돈을 받는 출판료의 장벽을 새로 쌓아 올렸다. 장벽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그 사이에서 돈을 거두는 손은 똑같다.

그 손이 거두는 액수를 보면 이것이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의 문제임이 분명해진다. 스프링거 네이처 한 곳이 2025년에 보고한 수익이 6억 3,500만 달러다. 그 수익의 바탕에는 세금으로 연구비를 댄 납세자가 있고, 무보수로 밤을 새워 논문을 심사하는 과학자가 있고, 교수와 학생이 논문을 읽게 하려고 출판사에 해마다 수백만 달러를 바치는 대학 도서관이 있다. 연구하는 사람도 우리고, 심사하는 사람도 우리고, 읽으려고 또 돈을 내는 사람도 우리다. 그런데 그 모든 노동과 세금의 끝에서 이윤을 가져가는 것은 주주들이다. 망가진 동료 심사 시스템이라는 말은 많이들 하지만, 정작 망가진 것은 심사가 아니라 그 심사 위에 올라탄 회수 구조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정책 아래에서도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저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역학자는 미국당뇨병협회가 내는 한 비영리 저널의 부편집장이기도 한데, 그 저널의 운영 예산은 약 130만 달러다. 정규직 직원이 심사와 편집을 맡고, 부편집장은 논문 한 편을 처리할 때마다 100달러를 받으며, 광고 수익과 한 면당 250달러의 소액 게재료로 살림을 꾸린다. 연방 기금으로 지원된 연구라면 최종 논문이 저자를 대신해 엠바고 없이 자동으로 퍼브메드 센트럴에 올라간다. 천만 원이 넘는 오픈 액세스 비용 같은 건 없다. 저널을 운영하는 데에 돈과 수고가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비용은 1,800만 원이 아니라 250달러로도 감당된다. 1,800만 원과 250달러 사이의 거리는 운영비의 차이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저널을 굴리는가에 대한 답의 차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우리 과학을 떠올린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논문을 어디에 실을지 고를 때, 그 선택의 무게중심은 거의 언제나 저널의 이름값과 영향력 지수에 가 있다. 더 비싼 게재료를 내고 더 화려한 표지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좋은 연구를 했다는 증거처럼 통용된다. 정부와 연구기관은 그 비싼 청구서를 평가 점수로 되갚아주며, 영리 출판사의 가격 정책에 사실상 보조금을 대고 있는 셈이다. 기초과학을 한다는 거대한 기관들조차, 새로운 질문을 던졌느냐가 아니라 어느 저널에 실렸느냐로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려 한다. 셀빈이 네이처의 심사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며 “출판사가 더 공정한 가격 정책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제 시간을 내어 그 저널을 지원할 수 없다”고 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저널의 이름이 아니라 과학의 원칙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런 거절이 가능한가. 거절했을 때 우리의 평가표는 그것을 용서하는가.

오해는 말자. 나는 지식을 닫아두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세금으로 지은 연구의 결과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데에는 한 치의 이견도 없다. 다만 그 열림이 반드시 출판사의 비싼 통행료를 거쳐야만 한다는 믿음, 오픈 액세스라는 이름표만 붙으면 그 값이 얼마든 정당하다는 교조, 바로 그것을 의심하자는 것이다. 퍼브메드 센트럴에 원고를 올리는 일에는 사실 돈이 거의 들지 않는다. 1,800만 원은 공개의 비용이 아니라, 공개를 인질로 잡은 자가 부른 몸값이다. 우리가 정말 지켜야 할 것은 오픈 액세스라는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가 원래 가리키던 것 — 지식이 가난한 연구실에도, 돈 없는 나라에도, 누구에게나 가닿아야 한다는 그 단순한 약속이다.

결국 과학에는 두 종류의 공개가 있다. 하나는 지식을 모두에게 돌려주기 위한 공개고, 다른 하나는 그 공개를 다시 팔기 위한 공개다. 앞의 것은 약속이고, 뒤의 것은 청구서다. 12,850달러라는 숫자는 그 둘이 같은 단어 아래 얼마나 멀리 갈라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좋은 과학자라면, 자기 논문이 어느 쪽 공개 위에 실리는지를 한 번쯤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따져 물어야 한다. 나는 오늘도 학생에게 그 계산기를 건넨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인다. 이름값이 아니라 원칙을 사는 법을 익히라고.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단 하나의 자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