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스템은 명백히 미쳤다”는 고백, 그리고 값을 숨기는 대안들에 관하여

초파리를 키우는 일에는 이상한 위안이 있다. 한 세대가 열흘이면 돌아오고, 교배 하나를 걸어두면 결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는 일. 나는 오래전부터 과학을 그렇게 생각해왔고, 그 벽돌 하나하나가 진짜라는 신뢰만이 탑을 지탱하는 유일한 모르타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나는 벽돌을 쌓는 일보다, 벽돌을 쌓기 위해 치러야 하는 통행료에 대해 더 자주 글을 써왔다. 오픈액세스(OA)라는 이름의 통행료 말이다.
이 이야기를 나는 늘 위에서 아래로 해왔다. 네이처-스프링어와 엘스비어사의 38퍼센트 영업이익률에서 출발해, 연 5~10퍼센트씩 뛰는 게재료(APC)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지나, 2002년 부다페스트 선언이라는 순수한 도덕적 요구가 어떻게 약탈적 시장에 포획되었는지를 짚는 식으로, 과학을 지탱하는 구조가 완전히 썩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구조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며 해왔다.
그런데 며칠 전 『PLOS One』에 실린 한 편의 논문은, 정확히 같은 결론에 정반대 방향에서 도달한다. 아래에서 위로. 그것도 지구상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선 연구자들의 입을 통해서. 논문의 제목부터가 어느 응답자의 육성이다. “이 시스템은 명백히 미쳤다(The system is obviously bonkers).”
이길 수 있는 자들이 지고 있다
멜리사 캔트렐과 동료들의 이 연구가 겨냥한 대상은 의외다. 그들은 글로벌 사우스의 연구자도, 자금이 마른 소규모 대학의 연구자도 아니다. 미국의 4개 R1 연구중심대학 — 콜로라도 볼더, 매사추세츠 애머스트, 피츠버그, 테네시 녹스빌 — 에 소속된, 연방 연구비를 받고, 마음만 먹으면 게재료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OA 출판 모델의 최대 수혜자이자 최대 사용자. 저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이 모델이 작동한다면 마땅히 작동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154개의 자유응답에서 무엇을 말했는가. 저자들은 여덟 개의 코드로 그들의 모순을 분류하고, 그 모순 전체를 하나의 이름으로 묶었다. APC 트랩(APC Trap).
여기서 개념 하나를 정확히 구별해야 한다. 기존 문헌에는 클레벨과 로스-헬라우어가 정식화한 ‘APC 효과(APC effect)’라는 것이 있다. 돈 있는 기관이 게재료가 비싸고 명성이 높은 저널에 논문을 몰아넣으면서, 돈 없는 연구자를 그 지형에서 배제하는 현상이다. 부유한 나라의 기관이 평균 42퍼센트 더 비싼 게재료를 낸다는 그 계층화. 이건 ‘배제’의 문제다. 못 가진 자가 문 밖에 서 있는 그림.
캔트렐 등이 말하는 ‘APC 트랩’은 그 그림의 안쪽을 보여준다. 문 안으로 들어온 자들, 즉 낼 수 있는 자들조차 이 시스템 안에서 옴짝달싹 못 한다는 것. 저자들이 포착한 핵심은 두 감정의 공존이다. 하나는 가격 둔감성(price insensitivity) — 낼 돈이 있으니 내긴 낸다. 다른 하나는 가격 분노(price outrage) — 그런데 이게 정당하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둘이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할 때 생기는 인지부조화, 바꿀 힘은 없는데 참여는 강요당하는 그 무력감이 바로 덫이다.
논문의 마지막 문장이 이 모든 걸 압축한다. 가장 쉽게 낼 수 있고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들에게조차 작동하지 않는다면, 이 모델은 그 누구에게도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멈춰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몇 년째 우회적으로 해온 주장을, 저자들이 데이터로 직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늘 못 가진 자의 배제를 이야기했지만, 이 논문은 가진 자의 비명을 들려준다. 그리고 비명은 통계보다 힘이 세다.
응답자들의 육성
질적 연구의 미덕은 사람의 목소리가 그대로 남는다는 데 있다. 이 논문에는 익명 뒤에서 터져 나온 문장들이 박혀 있는데, 몇 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칼럼이다.
피츠버그의 한 연구자(#52)는 이렇게 썼다. 합법화된 갈취처럼 느껴진다고. 자신은 붙잡힌 청중이고, 승진을 위해서도 연구비 경쟁을 위해서도 논문을 내야만 하니 그저 잘못된 일처럼 느껴진다고. 볼더의 한 응답자(#165)는 더 건조하다. 우리가 제품을 만들고, 남의 제품을 공짜로 심사해주고, 그 제품을 출판하려고 돈까지 낸다고. 참 대단한 세상이라고. 애머스트의 누군가(#254)는 이 전체를 “현금 젖소(cash cow)”라 불렀다.
압권은 여섯 개의 코드가 한꺼번에 붙은 피츠버그의 응답(#36)이다. 그는 게재료를 면제해주는 저널이 있어 그리로 갔다고 고백한다. 삼천 달러가 넘는 다른 저널들 대신에.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묻는다. 이 돈이 대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내 문서를 템플릿에 넣고, 웹사이트에 올리고, 데이터베이스 몇 개에 추가하는 일에, 이렇게 큰돈이?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내 실험실을 생각했다. 나 역시 논문 한 편을 낼 때마다 이 계산을 한다. 이 게재료면 초파리 배지를 몇 달치 살 수 있는데. 학생 인건비 한 달치인데. 논문 안에도 그런 응답이 있다. 대학원생 월급 한 달치를 OA에 쓰는 게 역겹다(stinks)고, 그 돈은 후학을 키우는 데 쓰고 싶다는 볼더의 응답자(#139) 말이다.
주목할 지점은, 이 비명들이 결코 “돈이 없다”는 하소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들의 분석에서 가장 날카로운 대목이 여기다. 응답자들의 관심사는 자신의 지불 능력에 따라 스펙트럼처럼 갈렸다. 낼 여력이 빠듯한 사람일수록 관심은 개인적이고 국소적이다 — 재정적 우려, 선택의 제약. 반면 쉽게 낼 수 있는,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위치의 사람일수록 관심은 체제 전체로 향한다 — 다양성과 형평성, 심사 노동의 착취, 출판사의 이윤율. 특권이 커질수록 시야가 넓어진다는 이 역설. 자기가 이 부당한 게임의 승자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게임 자체의 부당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데이터가 그렇게 말한다. 게재료를 내기가 남들보다 ‘더 쉽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다양성·형평성을 걱정하는 코멘트를 남길 확률이 올라갔다(그림 7). 편하게 낼 수 있다는 자각과 형평성에 대한 죄책감이 정비례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계로 포착된 양심의 가책이다.

여덟 개의 매듭
저자들이 뽑아낸 여덟 개 코드는 그 자체로 이 덫의 해부도다. 재정적 우려, 다양성·형평성, 합리성의 한계선, 선택의 제약, 연구비로도 부족함, 학문적 의무·기대, 학문 노동, 그리고 질과 엄밀성. 154개 응답 중 90퍼센트가 이 중 최소 하나 이상을 드러냈다.
이 코드들이 서로 얽히는 방식이 흥미롭다. 가장 자주 함께 나타난 짝은 ‘재정적 우려’와 ‘선택의 제약’이었고(37퍼센트), 그다음이 ‘재정적 우려’와 ‘다양성·형평성'(36퍼센트), 그리고 ‘재정적 우려’와 ‘학문적 의무·기대'(27퍼센트)였다. 이 마지막 짝이야말로 덫의 작동 원리 그 자체다. 개인적 재정 부담과 직업적 압박이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하는데, 의무가 재정적 고통을 압도할 만큼 강력할 때, 사람은 감당 못 할 값을 알면서도 지불한다. 애머스트의 한 응답자(#257)는 연 1~1.5만 달러를 게재료로 쓰고 있으며, 학생들을 경쟁력 있게 만들려면 어쩔 수 없고, 완전히 지속 불가능하지만 어떻게 계속 낼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여기서 나는 몇 가지 학문 분야별 결을 덧붙이고 싶다. 인문사회(HSS) 연구자들이 이 덫을 가장 강하게 겪었다는 대목이다. 이유는 명료하다. 이들은 연구비 자체가 적고, 대안적 자금원이 빈약하며, 게다가 인문사회 분야의 OA 저널은 하이브리드 저널일 확률이 높은데 하이브리드의 평균 게재료가 더 비싸다. 반면 자연과학·공학(NSE)과 의학(HM)에서는 ‘합리성의 한계선’이나 ‘다양성·형평성’ 같은 체제적 관심이 더 두드러졌다. 못 가진 쪽은 “어떻게 참여하나”를 걱정하고, 가진 쪽은 “이 참여가 정당한가”를 걱정한다. 같은 덫인데, 걸린 위치에 따라 아파오는 곳이 다르다.
값을 숨기는 기술 — 어제의 이야기가 여기서 만난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 나를 가장 오래 붙든 것은 데이터도, 육성도 아니었다. 결론부의 한 단락이었다. 저자들이 APC 모델의 대안들을 하나씩 호명한 뒤 내리는 판정 말이다.
그들은 열거한다. 플랜 S는 게재료 상한이라는 가격 통제를 시도했고, 전환계약(transformative agreements)은 구독을 OA로 잇는 다리를 놓았으며, SCOAP3는 3천 개가 넘는 기관의 집단 거버넌스로 개별 저자에게서 비용 장벽을 걷어냈고, 구독전환(Subscribe to Open, S2O) 모델은 일정 수의 구독 기관이 모이면 모두에게 연구를 개방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해 한 문장으로 선고한다.
이 대안들 대부분은 OA 출판의 가격을 실질적으로 낮추지 않는다. 다만 저자로부터 그 가격을 숨길 뿐이다. 새롭지만 별로 다르지 않은 행정적 겉치장 뒤로.
나는 이 문장을 어제 내 손으로 다른 방식으로 쓴 적이 있다. 어제 나는 다이아몬드 오픈액세스에 관한 글을 썼다. 저자도 독자도 한 푼 내지 않고 공동체가 소유하는 저널이라는, 그 아름다운 이상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상이 세 겹의 벽에 부딪히는 과정을 짚었다. 첫째, 시간이라는 특권 — 저널을 맨바닥에서 세우는 무급 노동을 전업 연구자가 떠안아야 한다는 것. 둘째, 숨은 노동 — 개방적일수록 보이지 않는 노동에 더 깊이 기생한다는 역설. 셋째, 변방의 현실 — 색인되지 않은 다이아몬드 저널은 스코퍼스 등재를 실적으로 요구하는 글로벌 사우스 연구자에게 그림의 떡이라는 것.
내가 어제 다이아몬드에 대해 내린 결론과, 캔트렐 등이 오늘 S2O와 전환계약에 대해 내린 결론은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비용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누가 그것을 보느냐만 바뀐다.
이 지점이 결정적이다. 저자들은 통찰의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 APC의 유일한 미덕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값을 눈앞에 들이민다는 점이라는 것. 저자가 직접 카드를 긁기 때문에, 이 시스템의 부조리가 살갗에 닿는다는 것. 전환계약과 S2O가 그 값을 도서관과 컨소시엄의 회계장부 뒤로 숨기는 순간, 개별 저자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아프지 않으면 아무도 이 시스템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고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신경이 잘려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의 마지막 물음은 서늘하다. 이 값들을 새로운 구독과 전환계약과 집단 기금 속으로 밀어 넣으면, 덫은 잠시 보이지 않게 될 뿐 풀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윤리적·재정적 부담을 도서관 같은 다른 주체에게 전가하며 기존의 불평등을 고착시킨다. 그들은 이렇게 끝맺는다. 학자와 기관이 마침내 이 덫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때, 우리는 이미 너무 단단히 묶여 빠져나올 수 없게 되어 있지 않겠는가.

값이 보이지 않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여기서 나는 내가 오래 견지해온 입장을 다시 확인한다. 나는 스톡홀름 선언 같은 도덕적 구호가 이미 초토화된 학술출판 생태계를 바꿀 수 없다고 써왔다. 부다페스트 선언이 그러했듯이. 순수한 윤리적 호소는 경제적·구조적 메커니즘이 없으면 반드시 시장에 포획된다. 2002년의 그 선언이 결국 8천 개의 약탈적 저널과 엘스비어의 38퍼센트 마진으로 귀결되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캔트렐 등의 논문은 여기에 대칭적인 경고를 하나 더 얹는다. 도덕적 구호가 무력한 만큼이나, 값을 숨기는 행정적 해법 또한 위험하다는 것. 전환계약과 S2O는 도덕이 아니라 기술이고 회계다. 그것들은 선언보다 훨씬 세련되고 실용적으로 보인다. 바로 그 세련됨이 함정이다. 값을 낮추지 않고 숨기기만 하는 해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척하면서 문제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전할 뿐이다. 둑이 무너지는데 페인트를 덧칠하는 일. 그런데 이번엔 무너지는 둑 앞에 커튼까지 치는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나는 이 논문이 어떤 완결된 처방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들도 그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 연구는 진짜 개혁의 최소 조건 하나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비용은 보여야 한다. 개별 저자에게든, 기관에든, 사회에든, 이 지식 생산에 실제로 얼마가 드는지가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평가 체제 자체 — 논문을 화폐로 만들고 명성을 통행료로 만드는 그 인센티브 구조 — 를 건드려야 한다. 값을 숨기는 개혁은 값을 낮추는 개혁의 적이다. 왜냐하면 아프지 않은 사람은 결코 뛰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과학원이 지난해 서른 개 남짓한 값비싼 OA 저널에 대한 게재료 지원을 끊었을 때, 나는 그것이 불완전하고 심지어 산업 정책적 의도가 섞인 결정임을 알면서도 무겁게 받아들였다. 세계 최대의 연구기관이 “이 값은 합당하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발화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PLOS One』 논문은 다른 방식으로 같은 발화를 한다. 다만 이번엔 기관이 아니라, 그 기관에 소속된 개개인의 목소리로. 지구에서 가장 편하게 값을 치를 수 있는 사람들이, 그 값이 미쳤다고 증언한 것이다.
다시, 초파리 앞에서
나는 초파리 유전학자다. 내 실험실의 규모는 세계적 기준으로 크지 않고, 나는 오래전 대형 연구 프로그램을 향한 부러움을 내려놓았다. 그 대신 나는 보통 과학자로서, 벽돌을 한 장씩 쌓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본다.
보통 과학자의 자리에서 보면, APC 트랩은 추상적인 정책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배지값과 학생 인건비와 게재료 사이에서 매번 벌이는 실제 계산이고, 좋은 저널과 감당 가능한 저널 사이에서 내려야 하는 실제 선택이다. 논문 속 볼더의 한 응답자(#170)가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재량 자금이 있는 잘 굴러가는 실험실인데도, 가장 영향력 있는 저널이 가장 비싸기 때문에 가치 있는 지면과 낼 수 있는 지면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고. 이것이 승자의 자리다. 그리고 승자조차 이렇게 말한다면, 이 게임의 규칙이 잘못된 것이다.
과학은 본래 공공의 것이어야 했다. 지식은 담장 없이 흘러야 하고, 그 흐름을 막는 통행료는 오래전 우리가 부수자고 약속했던 바로 그 담장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담장을 부순 자리에 요금소를 세웠고, 이제 그 요금소가 요금을 숨기는 법까지 배우고 있다. 캔트렐과 동료들의 논문은 그 요금소 앞에 선 사람들의 표정을 기록한 문서다. 낼 수 있는 자들의 얼굴에서마저 지워지지 않는 그 곤혹.
한 응답자의 문장으로 이 글을 닫는다. 우리가 제품을 만들고, 남의 것을 공짜로 심사하고, 그것을 출판하려 돈을 낸다. 참 대단한 세상이다. 나는 여기에 한 문장만 덧붙이겠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우리가 얼마를 내는지조차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려 한다. 담장을 부순 자리에 커튼을 치는 일.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다음 국면은, 바로 그 커튼이다.
Cantrell, M. H., Caldwell, R., Mezick, J. A., Estill, M. & Collister, L. B. “The system is obviously bonkers”: The APC Trap and the bind of scholarly publishing across four research intensive institutions in the U.S. PLOS One 21, e035143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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