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이 대항하는 것은 강제력을 가지고 민중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통치자에 대해서이다. 어느 시대에나 아나키스트와 국가주의자의 대립이 있었다.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우리가 마음 속에 그리는 사회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거기서는 각 성원간의 관계가 과거의 억압과 횡포의 유산인 법률에 의해서 규제되지 않고, 또한 일체의 권력자(그 권력이 선거에 의하여 얻어졌건 상속권에 의하여 얻어졌건 간에)에 의해서 규제되는 일이 없이, 오로지 자유로 성립한 상고간의 합의에 의하여,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승인된 습관이나 풍습에 의하여 규제된 그런 사회이다. 이들의 풍습은 법률이나 미신의 영향아래 경화(硬化)되거나 고정화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생활의 새로운 여러 가지 요구와 과학 및 발명의 진보에 부응하고 또한 점점 합리적으로 되고 점점 더 숭고한 것으로 되어 가는 사회이상의 발달에 일치하여 부단히 발전해 가는 것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이리하여 여기에는 남에게 자기의 의지를 강제하는 아무런 권력도 없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도 없고, 생활에 있어서의 정체도 없다. 거기에는 자연의 생활 자체에 보여지는 바와 같은, 어떤 때는 빠르게 또 어떤 때는 느리게 진행하는 끊임없는 전진이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각 개인에게 행동의 자유가 허용되고, 각자 타고난 천분을, 그리고 그 개성을―요컨대 각자 자기 속에 갖고 있는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것을 키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해서 여하한 행위도 사회적 형벌의 공포나 초자연적인 신비적 보복의 두려움에 의하여 개인 위에 부과되는 일이 없다. 사회는 개인에 대하여 이 개인이 주어진 시점에 수행하기를 자발적으로 승낙하지 않는 일을 일체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함께 만인에 대하여 완전한 평등의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강제도 없는 평등인의 사회를 추구한다. 더욱이 전혀 강제되는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등인의 사회에서는 성원의 반사회적 행위가 사회에 대하여 중대한 위협으로 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자주인들로 구성된 사회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보다도 훨씬 쉽게 이들의 반사회적 행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사회도덕의 옹호를 경찰, 스파이, 감옥―요컨대 그것은 범죄의 대학이거니와―, 간수, 사형집행인 및 재판관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반면, 자주인의 사회는 무엇보다도 반사회적 행위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논문 제 10절
그의 이름은 피터 크로포트킨, 위대한 아나키스트였다.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이라는 논문을 통해 그는 과학의 발전이 스펜서나 꽁트와 같은 철학자에게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과학이 가진 귀납과 연역의 방법만이 조금씩 인류를 점진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주장한다. 근대과학은 아나키즘의 지지대가 된다. 아나키즘은 철학자들의 독단적인 이론의 형태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실험의 연속이 될 것이다. 그 반대의 의미도 사실이다. 자연과학에 대한 끝없는 연구는 결국 아나키즘적 이상사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연과학이 그리고 지우는 자연의 모습, 그 내면에는 이미 아나키적 모습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자연과학에서의 지적 운동의 불가피한 결론이다”.
아나키즘이란 자연과학의 귀납․연역방법에 의하여 얻어진 종합을 인간의 여러 가지 제도의 평가에 적용하려는
기도(企圖)이다. 그것은 또 이 평가에 입각하면서 인간사회의 각 단위에 대하여 최대량의 행복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유, 평등
우애로 항하여 나가는 인류의 걸음걸이를 전망하려고 하는 기도이다. 위 논문 제 16절
다윈과 같이 집안에 칩거하는 고독한 노인으로 늙는 것을 거부했던 이 혁명가는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집단이 주장하는 ‘질서’의 본질을 까발리기도 했다. 그의 명문 <질서에 관하여>는 아나키즘을 무질서라고 폄하하고 왜곡하던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일갈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질서란, 가난과 기근이 사회의 일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질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일랜드 농민이며, 디프테리아와 열병 그리고 식량 부족에 뒤이은 기근으로 죽어가는 러시아 제3제정의 농민이다. (중략) 질서란, 노예제이며, 족쇄 채워진 사상이며, 칼과 창으로 버텨나가는 인종의 타락이다. 크로포트킨, 질서에 관하여
국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회의 지배집단이 대다수의 민중에게 강요하는 질서란 결국 무질서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압도적인 다수를 탄압하고, 그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적 질서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크로포트킨은 역사로부터 그 사악한 프레임의 정체를 깨달았다. 상류층의 질서란 무질서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더러운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이 내세우는 이상은 ‘무질서’라는 프레임으로 왜곡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무질서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질서 – 그 자들은 무엇을 무질서라 부르는가?
그것은 치욕스러운 질서를 거부하고자 속박을 끊고 족쇄를 부숴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인민들의 봉기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이다.
그것은 임박한 혁명 전야에 닥친 사상의 반역이며, 수세기 동안 변함없이 인정되고 있던 가설들의 전복이다. 새로운 사조 혹은 과감한 발명이 봇물 터지듯 밀려오는 것이며, 과학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무질서는 고대 노예제의 폐지이다. 코뮨이 생성되고, 봉건 농노제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이며, 경제적 노예상태를 철폐하려는 시도이다.
무질서란 왕을 전율케 하고, 일할 권리를 선포했던 1848년이다. 새로운 사상을 위해 투쟁하였던 파리 인민이다. 그들은 학살당하면서 인류에게 자유코뮨의 사상을 남겼으며, 우리가 다가갈 수 있다고 느끼는 자유코뮨의 혁명 즉, 사회혁명을 향한 길을 열어젖혔다.
그 자들이 무질서라고 부르는 무질서란, 과거 노예제를 철폐하는데 전 세대가 중단 없는 투쟁을 벌여 인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앞장서 몸을 바쳤던 시기이다. 민중의 천재성이 자유 비행을 감행하여, 불과 몇 년만에 장족의 진척을 보였던 시기이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고대 노예상태에 머물거나 가난에 찌들어 허리를 펴지 못했을 것이다.
무질서는 엄청났던 열정과 이루 말할 수 없었던 희생과의 단절이며, 지고지순한 인간애의 서사시이다. 크로포트킨, 질서에 관하여
이러한 무질서의 영광을 질서라는 이름으로 압제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다. 그것은 국가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수 백년을 존속해왔다. 그리고 그 모든 배후에는 정부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의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명목 하에 의회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억압해 온 국가주의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인류가 추구해온 이상에 어긋나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의 코스모폴리스적 사회에서 정부와 같은 민중에 대한 압제 조직은 거부된다. 그리고 의회가 더이상 민중을 대변하지 못하는 국가의 테두리에 속한다면 그것도 존속의 이유는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정부의 수중에 중앙집권화 됨으로써 전능(全能)으로 될 국가자본주의가 닥쳐오도록 방치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국가의 테두리 밖에서 새로운 조직형태를 희구하는 진보의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다시 한 걸음 나아가 이렇게 주장한다. 즉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중앙집권국가의 수중에 노동수단의 사회화를 꾀한다고 하는 망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국가의 수립으로 향하여진 그들의 기도가 필연적으로 몰고갈 결말은 곧 공상(空想)의 파산이요, 또한 군사독재 뿐이라고.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수백만명이 노동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아이들이 굶고 있다.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생계를 요구할 권리마저 박탈당했고, 학벌로 계급을 나누는 관념은 등록금 때문에 자살하는 대학생들을 양산하고 있다. 국회는 민생을 돌보기 보다는 차기정권 창출의 핵심인 미디어법에 목을 매고 난투극을 벌인다. 미디어법을 통과시키려는 한나라당과 이를 저지하려는 민주당의 목표는 같다. 그들의 관심사는 정권창출뿐이다. 그곳엔 민중에 대한 어떤 사랑과 애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당은 총사퇴를 선언했지만 그들에겐 그런 용기가 없다. 더이상 의회는 민중의 대변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를 위한 정치, 개인의 배를 불리기 위한 자리싸움의 장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다. 그것은 국회 해산이다. 국회의원의 자격이 국민의 선거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들을 해산시키는 것도 국민의 권리에 속하는 것이다. 국회의 해산이 자유롭지 않은 사회는 민주주의의 이념이 사라진 곳이다. 그 곳엔 더 이상 최대다수에 의한 최대행복 따위의 기본적인 룰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은 그런 국회를 바라지 않는다.
민주당이 거리로 나서겠다 했을때, 그들은 이미 아나키스트임을 선포한 것이다. 정당정치 수 십년의 결말은 이러한 허무뿐인 셈이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오래전 아나키즘의 견고한 이론을 만든 크로포트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거리로 나선 아나키스트들은 대의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거부해야 하고, 결국 그것은 국회의 해산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미친 세상에서 국회 따위가 사라져도 아무런 지장이 없으리라 장담하겠다. 민주당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총사퇴뿐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오래된 지혜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민중이 거리에서 저 배부른 침팬지들의 배에 비수를 꽂을 것이다. 나아가 그런 상황에서던 아니던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엔 인류에 깊이 각인된 본능이 있다. 그것이 아나키즘이다.
폭력에 의하거나 또는 선거의 결과로 수립된 정부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40년대의 프랑스에서 이름붙여지고 아직까지도 독일에서 호칭되고 있는 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이건, 혹은 환호성으로 영접되고 선출되어 성립한 ‘임시정부’이건, 그리고 또 ‘국민공회’이건, 우리는 일체 그런 것에다 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러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미리부터 단언해 둔다.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 그리고 그 때 비로서 소녀시대가 거리에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아.. 지식이란 것은 이렇게 멋있는 것이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더불어 하나 부탁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하여서도 그렇고, 그보단 더욱 게을러서 그렇겠지만..
어디부터 공부를 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초보가 읽을 만한 책으로 하나 추천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님께서 추천해주신 ‘들어라 침팬지들아’를 정독하며 잘 읽었습니다. 경험이 다르고 독서가 달랐을텐데도 님과 제가 비슷한 인식을 공유한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저는 아직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제가 맑스주의자였을 때의 선입견이 남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국가나 권력이 이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써 봉사하는 사회가 곧 올 것이라는 희망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자유주의와 아나키즘이 어떻게 다른지 핵심만 간단하게 코멘트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본문의 크로포트킨의 주장을 살펴봐도 극단으로 밀어붙인 자유주의와 무엇이 다른것인지 잘 구분이 안가는군요.
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다시 들어봐야겠습니다. 소덕후와 아나키즘이 여기서 접합되는 군요.(엉?)
매트 리들리의 ‘게놈’은 시작으로 좋습니다. 그의 책들을 읽으시면서 깊이 나갈 수 있는 문헌들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만 리들리에 천착하지 마십시오. 정신을 버립니다.
자유주의와 아나키즘은 국가와 같은 거대 권력을 해체하기 원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아직 그 차이를 논한 책을 본적은 없습니다만, 그 어떤 아나키스트 사상가들이 현세에 태어나도 하이에크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나키스트들에는 여러분파가 있고, 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건 크로포트킨이고, 그에게 기대어 말하자면 자유주의와 아나키즘의 차이는 경쟁과 상호부조의 차이입니다.
그게 제 가장 원대한 목표.
하이에크가 자유주의자이면, 스탈린이 맑스주의자이겠지요^^. 경쟁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독점, 담함의 반대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후자의 의미로서의 경쟁은 당연히 권장되어야 하겠지요.
제가 무식해서 하이에크나 미제스 떨거지들을 헷갈리곤 합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anarchism에 관한 많은 자료가 널려있더군요. 원하시는 자료쯤 쉽게 찾으실 수 있을 듯 합니다. 제가 아는 바, 경쟁과 상호부조의 강조점의 차이에서 둘에겐 다른 냄새가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