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하는 과학을 하지 말라 Don’t do fashionable science” 막스 델브뤽이 한 말이자, 현재의 내 스승 유넝이 신조처럼 따르는 말이다. 델브뤽이 어떤 맥락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유넝은 Current Biology와의 인터뷰에서 최고의 조언으로 이 말을 꼽았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What advice would you offer a prospective biologist? I would pass on Delbrück’s advice not to do fashionable science. Perhaps it is useful to keep in mind that one way to judge a scientist is to do a ‘gedanken loss-of-function experiment’ (I believe this is how HHMI judges their investigators). Imagine that, instead of entering biology, scientist X had chosen a different career, say as a lawyer or a rabbi, how might biology have been affected? If there were no discernible effect, it would suggest the person’s work is either non-essential or redundant. It would be very hard to make a distinct contribution in a very crowded field. Besides, it is no fun to have discovered something and then find out six other labs have done the same.
유넝은 일종의 사고실험을 제안하는데, 어떤 과학자 X가 과학자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졌다고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만약 역사가 그렇게 바뀌었을 때, 생물학에 어떠한 영향도 없을 것 같다면, 그 과학자의 작업들은 중요하지 않거나 잉여작업일 것이다. 물론 나는 유넝의 이러한 영웅주의적 과학사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유넝이 바로 그 다음에 하는 말은 실용적이다. 유행하는 학문엔 많은 유능한 학자들이 몰려든다. 그런 분야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여러 다른 실험실이 같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로서는 참 재미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한가지, 아마도 델브뤽은 이 말을 통해 유행하는 과학을 ‘따라’가지 말고, 유행을 ‘생산’하라는 조언을 의도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델브뤽 스스로가 분자생물학이라는 꽤나 유행하던 학문을 쫓아간 인물임을 유념한다면, 단지 유행하는 과학을 하지 말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어느 분야에 속하게 되던 인생을 걸고 자신이 풀고 싶은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진정한 과학자로 사는 방식임을 의미하는 것일게다. 하지만 델브뤽이 다시 지금 태어난다면, 이 말을 생존투쟁중인 젊은 대학원생에게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그렇다면 나는 그를 꼰대라고 부를 것 같다.
‘인문강단 樂’이라는 프로그을 본다.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침몰하는 한국에서 이나마 어디냐고 위안을 해본다. 우리말로 세계 석학들의 저술과 연구들이 번역되어 나오고, 그걸 번역하고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은 오파상으로서의 역할만은 매우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국내 학술지의 논문들은 매우 충실하게 외국 학자들의 연구를 번역하고 있다. 그 충실성에 매우 감사한다. 초파리 유전학자에게 인문사회과학의 생소한 분야들에 대한 접근성을 많이 낮춰주었다. 그 성실한 번역작업이라도 계속 해준다면, 조선 성리학의 부흥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다시 돌아와, 인문강단이라는 그 곳에는 현장의 과학자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인문강단이라는 울타리 때문일까. 하지만 과학의 주변학문들, 과학학 혹은 메타과학, 그리고 대중교양서적 시장을 통해 과학자로 인식된 그들이 대거 등장한다.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하는 왕따현상을 비롯해서, 무려 현대판 이외수로 거듭나고 있는 다윈, 유행하는 학문이다. 통섭을 유행시킨 학자의 제자들이다. 유행하는 학문은 대중에게 사랑받는다. 대중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학적 엄밀성과 양심을 어느정도 희생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시대 한국에서 학자란 모름지기 대중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학자의 의무다. 동의한다. 하지만 학적 엄밀성을 포기하지 않고 대중적일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는 불가능한가?
유행하는 학문을 잘 따라잡는 것도 하나의 기예다. 동의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잘 할 수는 없는가. 진화심리학은 1980년대 등장한 이후, 이제 연구프로그램의 한계에 봉착한 학문은 아니었던가? 그래서 진화심리학이란 그렇게나 그 진영의 학자들이 비난하던 정신분석학처럼 인문사회과학자들의 저술에서 친근하게 등장하는 레퍼런스 학문이 된 것은 아닌가? 그런 학문 이후를 소개하는 것이 좀 더 유행하는 학문을 따르는 것은 아닐까? 다윈은 어떤가? 창조과학 대 진화론의 구도를 상황론적 고려 없이 한국에 그대로 들여와 <종교전쟁>이라는 프레임을 잡는 학자의 분석은 옳은 것일까? 우리가 다윈을 더 알게 되면, 대중의 과학화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사이언스데이 이후 수십년의 과학대중화 운동이 다윈을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소개해 왔을까?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과학대중화 세력의 오류는 아닐까, 아니 한국에서 과학대중화란 이미 그들만의 리그, 그것도 엘리트 대학 특수대학원 패거리들의 밥그릇이 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야, 이렇게 방향을 잘못 잡고 인문강단에서 락을 하고 있을 수 있는가. 樂은 落을 잘못 쓴 것인가?
현대의 과학자들처럼 유행에 민감한 학자들은 없다. 요즘은 모두가 신경과학자라고 속이고 다닌다. 나는 그런 유행이 싫어 도망치고 싶지만, 현실과 이상을 조율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 유행하는 과학을 하지말라는 신조를 품고사는 스승의 밑에서 훈련받아, 적어도 가슴에 그런 말 하나는 품고 살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문제는 과학의 주변학문들이 유행에 종속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제 과학학 수입국의 수준은 넘어설 때가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외국학자들의 논의에 매몰되어 있는 듯 보인다. 한국의 과학학, 이젠 충분히 한국 내에서 소재를 찾을 수도 있고, 외국의 논의들을 한국적으로 소화할 능력도 갖추었을 듯 싶다. 그런 변화를 지켜보고 싶다. 유행하는 과학학을 하지 말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추신: 인문사회과학자들의 저술과 자연과학자들의 저술을 직접 비교할 수 없다. 전자는 그게 직업이고, 후자는 부업이며 도움이 되지도 않는 과외활동이다. 특히 과학학자들의 저술을 과학자들의 저술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전자는 과학을 연구하는 인문사회과학이므로 저술이 생업이자 직업이며, 후자의 저술은 본업과 함께 병행해야 하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점에서 한국 자연과학자의 이름으로 쓰인 교양서를 본다면 무조건 사면 될 일이다. 그게 닥치고 과학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손에 기름 한방울 묻혀보지 않고 과학자인척 행세하는, 과학을 팔아 장사하는 사기꾼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