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사생활> 원고를 위해 자료들을 정리 중이다. 우연히 한국 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김웅진‘이라는 인물을 마주하게 됐다. 사회과학과 정치학의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지난 20여년간 꾸준히 해온 인물이다. 그 논문 목록에 기가 질릴 지경이다. 사회과학, 특히 정치학의 방법론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학자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들이 묵직하고 진지하다. 단지 쿤, 라카토슈, 파이어아벤트, 포퍼의 과학철학을 인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말로 된 연구방법론을 고민하며, 나아가 사모아, 피지의 정치를 분석하는 실천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웅진에게 파이어아벤트는 해방의 출구와 같은 역할을 하는 듯 싶다. 아직 김웅진의 저술들을 다 읽지 못했고, 다 읽을 수도 없겠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과 인간의 비밀을 깨닫기 위해 모든 엄정한 전통의 보편적 기준들을 부정”함으로써 “이념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그리고 과학 자체로부터 과학을 해방”시킬 것을 강조한 파이어아벤트야말로 과학 민주주의의 진정한 주창자라고 볼 수 있다. 휴리스틱의 분석규준을 위배하여 논리적 결험에 빠진 모형은 있을 수 있으나 예측에 실패하는 모형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다. 모든 모형은 결코 현실세계를 예측하지 않는다. 모형은 단지 과학자의 고유한 인식과 일단의 방법론적 전제에 따른 가능성과 기대를 예시할 뿐이다. 이러한 기대는 비록 현실세계와의 구조기능적 조응성(structural-functional isomorphism)을 상실한다 해도 과학적 가치를 상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가 갖추어야 할, 혹은 갖출 수 있는 다양한 모습에 대한 의망은 그 자체로서 과학적 행위의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모형은 특정한 현실의 잠재적 도래가능성을 가늠한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과학자들을 모두 같은 세상으로 몰아넣는 것은 그들을 휴리스틱의 수인(囚人), 곧 창조적 역동성을 모두 상실한 채 획일화된 지식을 반복적으로 생간하는 단순조립공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김웅진. 2004. “방법론적 실존 – The Methodological Reality.” 社會科學論集 21(2): 79–91.
김웅진의 말을 요약하자면, 파이어아벤트가 말했던 “무엇이든 괜찮다 Anything goes”의 정교한 재판이다. 물론 김웅진이 파이어아벤트를 오독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의 진의를 잘 대변하고 있다. 파이어아벤트는 단일한 과학의 방법론을 믿지 않았고, 역사의 사례들과 논리로 단일한 과학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나가던 포퍼와 쿤에게 저항했다. 그것이 AM(Against Methods)의 핵심사상이다. 아나키스트이자 과학철학자였던 그의 사상은 과학적 상대주의자들, 즉 쿤 이후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은 끝장났으며 과학적 지식과 종교의 도그마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오용되곤 했다. 하지만 파이어아벤트는 말년에 이런 학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나는 새로운 과학의 이론을 찾자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론을 찾는 것이 합당한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결론내리고 있을 뿐이다. 즉, 과학을 이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지식은 이론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참여에서 비롯된다. 그런 이유로 위에 언급한 사례연구들은 ‘실상’을 누락할 수 있거나 누락해야 할 만큼 세부적이지 못하며 그 사례들은 실상 그 자체이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내가 지식과 과학을 규명하는 이론이 있을 수 없음을 확신하고 있다고 믿는데 이는 내 주장의 일부만을, 더구나 그 외 나머지 부분에서 얘기한 내 생각을 엉뚱하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적 반박이 늘 실패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소위 나의 ‘무엇이든 허락돼야 한다’는 구호를 지지하고, 그 구호대로라면 연구를 쉽게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지적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게으른 ‘무정부주의자’ 또한 내 의도를 오해하고 있다. 분명히 그들에게 반론하지만 ‘무엇이든 허락된다’는 구호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가 아니라 원칙을 존중하지만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올바른 연구 성과 도출의 절차와] 단계를 필요 이상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합리주의자들에게 요구하는 ‘규범’이다. 한편 더 중요한 대목은 과학행위의 적절함을 평가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말은 적당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과학자는 철학자들과 널리 인정받는 과학자들이 과학의 고유한 특성으로 간주하는 방법 외에도 그들 사이에 통용되는 모든 접근방식을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더 이상 “우리는 이미 젖ㄱ합한 연구방법과 규준을 알고 있으며 그저 배운 대로 적용하는 일만 남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나 또한 AM에서 강조했던 바지만 마흐, 볼츠만, 아인슈타인 그리고 보어에 의해 주창된 과학자의 윤리에 대한 견해를 다시 얘기하고자 한다. 과학자들은 다른 곳에서 차용해온 각종 규준들을 연구과정에서 올바르게 준수할 책무뿐 아니라 그 규준 자체[의 타당성]에 대해서도 책임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는] 논리규범의 타당성까지 검증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때로 일부 수정되기도 했다(양자이론에서의 몇몇 사례를 참고하라)..” Feyerabend, P., & Feyerabend, P. K. (1987). Farewell to reason. Verso. 283-284
“김웅진, 김윤정, 김윤환, 김치호, 박상현, 박신영, 양일국, 이미나, 최별, and 황수환. 2011. 과학의 진보와 창조성. 파주: 한국학술정보.”에서 재인용.
언제나 그렇듯, 아직은 파이어아벤트의 말이 내 사고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 언젠가 그에게서 모자름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하며.
추신: 김웅진 교수의 홈페이지 대문에 걸린 문구가 인상적이다. 번역해둔다.
“사회과학자들은 언제나 두 세계의 왕래자일 수 밖에 없다. 두 세계란 그들이 만든 세계와 그들이 묘사하려는 세계다. 전자는 추상적 모형의 세상이며 후자는 그들이 거주하는 경험적 세상이다. Social scientists always are commuters between two worlds: the world they make and the world they mirror – the world of abstract models and the empirical world they inhabit.” H. Gudmund, Real Virtuality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