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주의자들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서구 선진국의 역사와 또한 우리의 역사에서 직접민주주의는 지속적으로 대의제의 약점을 보완하는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지방자치사전에 따르면 직접민주주의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英]direct democracy [獨]Unmittelbare Demokratie
국가의 중요한 정책결정이 국민표결(referendum), 국민제안(initiative) 등 국민의 직접적인 정치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 아니라 국가의 고급관직이 모두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이들 선출된 고급공무원들은 언제든지 국민에 의해 소환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주권이 직접적인 통치권의 형태로 나타나는 민주주의 유형을 말한다. 이것은 국민이 직접 국가의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대신 선거를 통한 대의기관으로 하여금 통치권을 담당케 하고 이 대의기관의 통치권행사를 여론이나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통제 내지 정당화시키는 간접민주주의와 구분된다. (중략) 이러한 전통의 원형에 가깝게 직접민주주의가 지속되고 있는 대표적 예로 스위스의 주(canton), 미국의 타운(town)이나 타운십(township) 등 소규모 지역단위에서 보여지는 주민총회를 들 수 있다. 위와 같은 기원을 갖는 직접민주주의가 현대에 활용되는 제도적 유형으로는 국민투표(국민표결), 국빈발안, 국민소환(recall), 국민거부(veto), 신임투표(인민투표 : plebiscite) 등이 있다.직접민주주의는 고전민주주의 또는 참여민주주의의 입장에서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민주주의 이상적 형태로 간주되어 왔으나 현대에 와서는 국가공통체규모의 증대, 국가정책결정에서의 전문성의 필요 등으로 인해 제한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새롭게 주목을 끌고 있는 참여 민주주의 시각에서는 시민참여 등의 직접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제도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직접민주주의는 비교적 규모가 적고, 공동업무에 대한 이해가 비교적 쉬운 지방수준에서 실현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한편 최근 정보통신의 발달로 통신망을 통한 전국민의 투표참여 및 컴퓨터에 의한 투표결과 집계 등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짐에 따라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가 조망되기도 한다. [ref] 한국지방자치학회. 2010. “직접민주주의(直接民主主義).” [/ref]
직접민주주의는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성이 기술적(technological)인 것인지, 실질적(practical)인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뒤로 하고, 직접민주주의로의 여정이 인류의 보편적 시대정신이라면, 현실적 장벽으로 인해 선택된 대의민주주의의 선거제도는 직접민주주의의 원칙을 최대한 흡수하는 방향으로 보완되어갈 필요가 있다. 그 제1원칙이자 모든 원칙이 되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주어진 상황에서 모든 유권자의 의사가 최대한 반영되어야 한다”
이 원칙으로부터, 최대한 사표가 방지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뒤따라 나올 수 있다. 즉, 부산의 한 지역구에서 어떤 후보가 49%의 지지를 받고도 51%의 지지를 받은 후보에게 패한 경우, 이 49%의 민의는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라도 최대한 선거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독일식 정당명부제’, ‘중선거구제’, ‘광역비례대표제’, ‘결선투표제’ 등등의 난해한 용어들은 바로 이 원칙을 최대한 반영하려는 대안들의 일종에 불과하다.
한국은 1위 대표제 지역구 선거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비례대표제가 확대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모두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 중 1위가 득표율에 상관 없이 승리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를 광의로 ‘단순다수제(single member plurality)’ 혹은 ‘1위제(first past the post)’ 라고 부른다. 가장 단순하고 전근대적인 선거방식이다. 왜냐하면 승자독식이라는 봉건왕조시대의 잔제가 스며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1위제 하에서는 다수 유권자의 의사는 전혀 반영될 수 없고, 유권자의 의사가 반영되는 정도가 낮아지므로 당연히 시민들은 자신의 주권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ref] 48%의 국민이 지지하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더 높은 지지율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 시기에도 촛불로 정국이 위태로웠다. 현명한 지도자라면 과반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 이외에 다른 방식의 회유책을 강구했어야 한다. [/ref] 1위제는 거대 정당의 과대 대표, 소수 정당의 과소 대표, 지역주의에 기초한 획일적 정당 경쟁 구도, 투표율 저하, 유권자들의 정치적 효능감 저하로 인한 탈정치화 등의 모든 부정적 효과의 원흉이다.
이러한 인식은 오래되었고, 한국사회에서도 선거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끊임없는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막상 선거제도를 개혁해야 하는 국회의원들이 현행 선거제도의 최대수혜자들이라는 딜레마는 풀 방법이 없다. 장선화는 한국 뿐 아니라, 대의제 민주주의를 체택하고 있는 국가들에서 등장하는 이러한 현실을 ‘불편한 진실’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은 ‘선거’라는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적 제도가 대다수를 만족시키는 명백한 승자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근원적 아이러니다. 또한 국민의 의사를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수립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ref] 장선화. 2013. “선거제도의 불편한 진실.” 시민과세계 (22): 62–73. [/ref]
일상에서 합리적 선거의 현실적 불가능성은 캐네스 애로우에 의해 수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애로우는 ‘불가능성 정리’로 197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 모두가 A보다 B를 원하면 사회의 선택도 A가 아닌 B여야 한다.
- A>B이고 B>C이면 A>C 여야 한다.
- A와 B를 비교할 때 이와 무관한 C가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
- 모든 현상을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모든 사람의 선호가 반영돼야 한다.
- 사회적 의사결정이 한 사람에 의해 결정돼서는 안 된다. [ref] 조가현. 2010. “[Culturemath] 선거제도 수학으로 파헤치다.” 수학동아: 118–23. [/ref]
따라서 합리적 선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으로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무기력에 빠지기보다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향해 끝없이 이 장벽과 같은 제도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바로 그러한 싸움을 통해 스웨덴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점철시킨 인물이 비그포르스다. [ref] 링크를 클릭하면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비그포르스와 스웨덴 사민주의에 대해 개최한 포럼자료를 읽을 수 있다 [/ref] 홍기빈의 책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는 우리보다 더욱 비참한 상태에서 잠정적 유토피아를 탄생시킨 스웨덴의 이야기를 다룬다. [ref] 홍기빈. 2011.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책세상. [/ref]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박민영의 말처럼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비화나 맹목적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그 허위성을 간파해야 하며,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과 의식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 [ref] 박민영. 2008. “선거는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가.” 인물과사상: 55–69.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