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쩡(1881-1973)은 중국 아나키즘의 혁명파 지식인 그룹이었던 ‘신세기그룹 혹은 신세기파’의 대표적 인물로, 19세기말~20세기 초 중국 아나키스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신채호의 중국 망명과 북경에서의 역사학 탐구 과정에서 당시 신세기파의 주도자였던 리스쩡과의 만남은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당시 북경은 아나키즘의 선전장으로 신세기파를 필두로 해외파 학자들이 귀국해 중국 아나키즘 운동에 활력을 제공했다고 한다. 특히 리스쩡은 자연과학자로 훈련받은 아나키스트로, 크로포트킨과 파이어아벤트, 노엄 촘스키 등의 극히 일부의 예외사례를 제외한다면, 역사에서 찾기 힘든 과학적 아나키즘의 주창자였다. 리스쩡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은데, 한글로 된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그의 사상을 일별할 수 있는 인용구들을 옮겨 둔다. 김명호 선생에 의하면, 리스쩡은 大豆에 대한 연구만 한것이 아니라, 실제로 두부공장을 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역사다.
이석증은 직예 고양 출신으로서, 본명은 욱영으로서 석중은 그의 자이다. 그는 1902년에 프랑스에 유학하여 농생물과 화학을 공부하였는데, 졸업 후에는 파스퇴르학원에서 생물학과 화학을 공부하면서 대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던 즈음 크로포트킨의 사상과 프랑스의 혁명 철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채식주의를 실천하고 육체 노동을 하면서 아나키즘 윤리에 따른 검소한 생활을 했다.
이석증이 프랑스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면서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사회진화론이었다. 자연과학자로서의 이석증이 가지고 있었던 진화론은 자연스럽게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로 발전하여, 생물계의 진화와 인간 사회의 진화가 동일한 이치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에게서 혁명은 곧 진화였다. 혁명은 정치 혁명을 시작으로 하여 사회 혁명으로 완성된다. 정치 혁명에서 사회 혁명으로의 전이를 설정한 것은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한 전술적 방법이었으며, 사회학이 풍미하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그들의 환경적 요인이 반영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과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성증의 아나키즘은 원론적인 아나키즘에 비해 아주 점진적인 실천 방법을 내세웠다. ‘혁명이란 진화의 연속’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진화와 혁명을 동일한 과정으로 이해했고, 더 나아가 개량과 혁명 역시 동일한 것으로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변혁의 일환으로서 청 왕조를 전복하는 것이야말로 중국 아나키즘 혁명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이석증의 행적을 보면 그는 아나키즘의 사상을 가진 역사학자요 문학가였지만, 그보다는 영향력 있는 고위 관료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했다. 이홍장의 형이자 전 이부상서인 이홍조의 아들로서 중국에서의 이석증의 지위는 막강한 것이었다. 무정부주의자가 고위관료였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 무렵에 이석증은 세계학전관이라는 학술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한인 무정부주의자인 유자명과 정화암 등이 자주 참석하여 이석증을 만났는데, 그럴 때면 이석증은 한국은 세계적으로 너무 알려져 있지 못한 나라이므로 한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조선학전관을 만들어 자기의 세계학전관과 협력하여 한국문화의 변천과정을 연구 기록하여 세계에 알리자고 말했다. 신복룡. 2008.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동양정치사상사 7(1): 67–97.
신세기파의 아나키즘은 프랑스의 아나키즘 전통에 영향을 받아 ‘진화의 원리’와 크로포트킨의 ‘호조의 원리’를 결합하여 이론적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적자생존의 진화가 아닌, 상호부조의 진화관을 기조로 하고 있다. 이들에 있어서 이른바 혁명은 진화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불가피한 수단이다. 여기서의 장애물이란 정부, 법률, 종교, 군대 심지어 가정까지도 포함된다. 인류 진화의 실현은 무정부사회이고, 이러한 무정부사회의 실현을 위해 장애물은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무정부사회는 일체의 강권이 해소되어 자유가 확보된 사회를 의미한다. 어떠한 형태의 억압이나 강권이 부재하여야 함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당과 무정부당의 활동상황을 소개하면서 일체의 강권을 뒤엎는 사회혁명을 주장하였다.
프랑스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였던 이석증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는 생물진화와 같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생물계의 진화와 인간사회의 진화가 동일한 이치라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혁명은 곧 진화이다. 혁명은 정치혁명을 시작으로 하여 사회혁명으로 완성된다… 이처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과 유물주의 과학관 그리고 호조론에 기초하는 실천론이 초기 중국아나키즘 운동의 또 하나의 흐름인 재일 천의파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박철홍. 2003. “중국 아나키즘의 수용과 전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7: 109–37.
민족주의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서구의 사상 중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던 과학, 민주주의, 그리고 진화론 등의 사상과 대단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신세기파도 이러한 사상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들이 과학에 대해 절대적이라고 할만큼 신뢰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그들의 과학에 대한 인식과 그것이 그들의 사상의 체계에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하자.
그들은 19세기와 20세기의 특징을 과학공리의 발명과 혁명풍조의 팽창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과학공리란 곧 다른 말로 ‘眞理公道’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자연과학에 의해서 해명된 진리라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과학적으로 확인된 것 이외에는 어떠한 기준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당시 최신의 과학이라고 이해한 것에는 뉴턴식 물리론, 라마르크와 다아윈 내지 크로포트킨의 진화론, 콩트의 사회학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이들의 과학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근대 중국지식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과학주의적 특징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이러한 과학주의적 태도는 당시 서구의 지적 경향과도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 당시 중국의 위기가 물질문명에서 서구보다 낙후된 것에서 유래하였고 그 서구 문명의 기초가 과학이라는 인식하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주의적 경향은 오치휘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신세기파에게 공통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세기파가 혁명을 통해 실현하려고 한 진리공도를 과학공리라고 하였던 것에서도 과학만능의 과학주의적 사고를 기초로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과학도가 아니었으므로 과학적 방법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과학이 독특한 방법을 기초로 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음도 분명히 확인된다. 이석증은 과학의 분석방법에는 정성분석과 정량분석이 있다고 하면서 심지어 ‘德’이라고 하는 것도 과학적 방법인 계량적 방법을 통해 측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석증의 사상도 전형적이 과학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주의적 태도는 단순한 과학숭배로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과학주의적 태도가 그들의 철학적 체계의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석증은 덕과 과학은 철학(哲理)의 원소인데 덕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고 과학은 물질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라고 하여 양자 사이의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양자의 근원은 물류라고 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 도덕은 바로 의식을 의미하였고 다름아닌 물질의 덕을 축적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 생리학자 다스터의 ‘생물은 물질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고, 생물의 의식 역시 물질의 의식을 축적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따라서 그가 유물론적 입장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들의 이러한 우주 인식은 기계적 유물론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들은 물리학을 기초로 유물론적 철학체계를 받아들였으며 생물학을 기초로 유기체론을 받아들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그들이 유물론적 철학체계를 형성하게 된 것은 단순히 과학주의적 경향과만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즉 그들이 당면 과제라고 생각한 중국의 혁명을 위한 사상으로 수용했던 무정부주의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크로포트킨이나 바쿠닌의 사상이 다름아닌 과학을 기초로 한 우물론과 유기체론을 기초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주의자로서 신세기파가 중시한 것은 진리탐구의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적 방법이었다기 보다는 과학에 의해 발견된 진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체계화한 것이 유물론적 철학으로 나타났음을 앞에서 지적했지만, 기존의 발명된 과학적 진리 중에서 신세기파가 특히 중시한 것은 진화론이었다. 그들이 당시 최신의 과학적 성과로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리의 하나로서 인정한 것은 바로 진화론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의해서 그들은 그들의 유물론적 철학체계를 개인과 사회의 조직과 윤리도덕문제, 역사관, 그리고 나아가 혁명의 당위성을 포함하는 나름대로의 체계적 사상체계를 수립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박제균. 1996. “춘암 (春庵) 송태호 (宋台鎬) 교수의 정년기념 특집호 : 논문 ; 신해혁명 (辛亥革命) 전 (前) ’ 신세기파 ‘ 의 무정부주의사상.” 19(0): 51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