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가끔 보는 스포츠가 축구다. 개인의 취향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시도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만, 현대의 축구는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역사가 일반적이고, 그 조직화에 노동계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도 프리미어리그를 자주 보는 이들이라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관련된 논문들이 꽤 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당대비평은 축구에 대한 특집호를 낸 적이 있다. 그 논문들과 김세기, 하남길의 <영국 축구의 사회사: 사회 계급적 통제와 지배>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옮겨 둔다.
19세기 후반에 축구가 노동 계급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발전했다는 사실은 거꾸로 그것이 노동 계급을 기존의 사회 구조 안에 끌어들이고 사회적 통합을 이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와 함께 축구는 넓게 보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지역 정체성은 물론, 대 브리튼 국민이라는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1860년대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지역에 연맹 조직이 나타났고, 프로 리그 또한 1890년 경에 결성되었다. 이영석. 2002. “[특집2:월드컵에의 열광: 동원의 공학과 자발적 참여 사이에서]노동 계급, 축구, 국민 정체성: 19세기 영국 사회와 축구.” 당대비평: 178쪽.
영국 축구의 역사는 기묘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민중 문화의 유산을 간직한 이 민중적 놀이는 중간 계급의 후원과 관심 속에서 근대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다시 근대 스포츠로서의 축구의 성장은 무엇보다도 노동 계급의 적극적인 참여에 힘입었던 것이다. 축구가 특정한 계층과 지역을 넘어 영국의 국민적 스포츠로 자리 잡은 것은 역시 19세기 영국의 경제적 번영과 이를 토대로 한 사회 안정 때문이었다.
축구는 역사적으로 신분 구별과 차이가 강한 영국 사회를 하나의 국가로 만든 사회적 접착제 중의 한 요소였다. 그것은 또한 여러 지역과 민족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나라가 갈등을 넘어 통합으로 나아가는 데도 어느 정도 기여한 것처럼 보인다. 축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사람들에게 각기 지역 정체성을 환기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대 브리튼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는 사회적 의식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축구라는 한 문화적 현상을 통해서도 우리는 특정한 시대의 사회상과 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영석. 2002. “[특집2:월드컵에의 열광: 동원의 공학과 자발적 참여 사이에서]노동 계급, 축구, 국민 정체성: 19세기 영국 사회와 축구.” 당대비평: 180-181쪽.
박정희는 한국에서 최초로 대중적 욕망에 주목하여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인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박스컵’은 대한민국이 주최하는 최초의 세계 축구 대회로, 1970년대에 그 열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황병주. 2002. “[특집2:월드컵에의 열광: 동원의 공학과 자발적 참여 사이에서]박정희 시대 축구와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동원과 국민 형성.” 당대비평: 147쪽.
아래로부터의 반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은 이른바 ‘조기 축구회’다. 1970년대에 국가 대표가 국가적 차원의 상상의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했다면, 조기 축구회는 구체적 일상의 국가/민족주의적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부터 일기 시작한 조기 축구회 붐은 1978년경이 되면 전국에 걸쳐 1천여 개가 넘는 팀과 회원 수 5만여 명을 웃돌게 되었다. 그 결과 조기축구연맹의 결성과 전국 대회 개최가 가시화되었다. 황병주. 2002. “[특집2:월드컵에의 열광: 동원의 공학과 자발적 참여 사이에서]박정희 시대 축구와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동원과 국민 형성.” 당대비평: 159쪽.
민족주의는 무의식 수준에서 작동할 때 진정한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의식의 민족주의는 현실의 다양한 이벤트와 매개를 통해 주기적으로 반복 경험되어야만 한다. 국가간 축구 경기는 바로 이러한 무의식의 민족주의가 현재화할 수 있는 유력한 통로가 된다. 물론 ‘애국심’의 형태로 드러나는 민족주의의 강력한 힘은 전쟁을 통해서 최대화되지만, 축구는 바로 평화 시기의 전쟁에 다름 아니다. 근대 사회 최고의 스펙터클로서의 전쟁은 월드컵을 통해 평화적 전쟁 스펙터클로 재현/표상된다. 박정희는 바로 그 평화적 전쟁 스펙터클로 총력전 체제로서의 대한민국을 주조해 내고자 했다. 황병주. 2002. “[특집2:월드컵에의 열광: 동원의 공학과 자발적 참여 사이에서]박정희 시대 축구와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동원과 국민 형성.” 당대비평: 166쪽.
첫째, 중세의 민중축구는 지배계급의 탄압을 받아왔으며, 그것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사회적 통제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둘째, 근대 축구는 신사 계급에 의해 조직화되었고, 명문학교 출신의 엘리트들이 축구의 문화적 진화를 주도했다. 셋째, 서민 문화에서 신사 계급 문화로 재탄생한 근대 축구는 1880년대부터 다시 노동계급 문화로 정착되었으며, 그 과정의 계급적 갈등은 계급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넷째, 19세기 축구는 노동계급 스포츠로 정착되었으나 노동계급 축구에 대한 상류층의 지배는 계속되었다. 결국 축구의 진 화과정은 놀이 문화에 대한 사회 계급적 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김세기, and 하남길. 2012. “영국 축구의 사회사: 사회 계급적 통제와 지배.” 체육사학회지 17(1): 1쪽.
결론적으로 축구의 역사는 사회 계급적 통제와 탄압, 갈등과 투쟁으로 이어진 측면이 있다. 축구의 문화적 뿌리는 서민 사회에 있었으나 끊임없는 지배계급의 통제가 따랐다. 신사계급은 근대 축구를 창안 이후에도 지배계급은 축구를 그들만의 문화로 인식하고, 강한 계급적 배타성을 보였으며, 지배권도 계속 상류층이 장악하는 양상을 보였다. 지배의 양상은 금지, 통괄단체와 클럽의 장악, 프로화의 제 동, 임금상승규제 등 다양했다. 근대 이전 지배계급 의축구금지령과그에맞선서민의참여, 신사계 급의 축구 창안과 지배력 강화와 노동계급의 참여, 축구 프로화에 대한 신사계급의 배타적인 자세와 노동계급의 프로화 수용,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 널리즘의 이념적 대립, FA나 축구클럽 구단주의 선 수에 대한 감시와 이동의 통제에 맞선 노동계급의 선수조합의결성.이 모든 것은 축구에 사회계급적 지배와 투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김세기, and 하남길. 2012. “영국 축구의 사회사: 사회 계급적 통제와 지배.” 체육사학회지 17(1): 20쪽.
그외 당대비평에 함께 실렸던 논문들도 읽어봄 직 하다.
레스백. 2002. “[특집2:월드컵에의 열광: 동원의 공학과 자발적 참여 사이에서]유니언잭 아래의 흑인: 아이덴티티의 구경거리, 월드컵, 그리고 축구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 당대비평: 182–97.
이동연. 2002. “[특집2:월드컵에의 열광: 동원의 공학과 자발적 참여 사이에서]’붉은 악마’와 서포터즈 문화.” 당대비평: 198–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