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후보가 둘 씩이나 낙마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는 것이, 가끔 묘한 상식이 발동되는 역동적인 국가라서 말이다. 지방선거는 비겼다지만, 선거결과를 보면 여전히 민의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승자독식 체제가 확연하고, 거대 정당 둘에게 모든 것이 유리한 체제일 뿐이다. 선거제도를 바꿔야 할 세력들은 정치엘리트들로 구성되어, 그 권력을 절대 놓으려 하지 않고, 체제를 바꿀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길조차 없다. 문제는 경제고, 자본주의다. 잘 안다. 그렇다고 대안도 없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노동자의 시대가 오는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의 대안을 진지하게 논의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경제체제도 그렇고 경제체제를 견인할 정치체제도 논의해야 한다. 순수경제학이란 환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다. 내 말이 아니라, 장하준의 말이다. 이 와중에 한겨레 칼럼을 써야 했다. 꽤 오래전 잠깐 읽고 지나간 이지문 박사의 ‘추첨민주주의’ 논의가 떠오른다. 그는 군대에서 선거부정행위를 고발했던 내부고발자 출신이다. 이제 당당하게 추첨민주주의에 대한 첫 국내 박사가 되었다. 게다가 협동조합과 추첨민주주의를 엮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공선사회를 제시하는 논문까지 써놨다. 나로서는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차근히 따라가며 보완할 구석들을 마련하면 될 일이다. 논문을 읽다보니 ‘하기남’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IT개발자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책 <직접민주주의와 국민중추IT개발자가 보는 대안민주주의>을 썼는데, 인터넷에서 흔적을 찾기 힘들다. 시간이 날 때 찾아볼 일이다. 특히 민영수가 쓴 것으로 보이는 공선사회 논문의 도입부는 과학적 세계관과의 통섭을 모색하는 노력이 있어 반갑다. 언젠가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들이다.
한국전산협동조합의 민영수와 이지문이 공동으로 쓴 논문에서 발췌했다.
자본주의는 이미 한계를 드러냈고 대안체제에 대한 논의가 없지 않지만 뚜렷하게 합의된 개념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시장경 제라는 인류사의 보편적 거래방식에 기반을 둔 경쟁적 효율성을 본성으로 끌어안고 있는데다 정치시스템인 대의제로부터도 강력하게 옹위되고 있어 “과연 자본주의가 한계수명이 있기나 한 것일까?”라는 의문과 회의가 공 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대안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 본주의뿐만 아니라 그 힘의 원천인 시장원리와 대표제시스템을 하나의 결 합체로 놓고 각기 그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논리의 정합성과 함께 완성 도를 얻기 어렵다. 이를 위해 먼저 대안체제의 하나로서 ‘공선사회(共善社 會)’를 제안하고 이 대안체제를 실현해 나갈 선도적 담지자로서 ‘협동조합 공동체’, 그리고 그 작동의 기본원리로서는 ‘추첨민주주의’에 각각 주목하 여 이들이 대안체제의 기본구성요소임을 확인함으로써 대안체제의 완성된 조감도를 제시하고자 한다. 민영수, and 이지문. 2013. “일반논문: 자본주의 대안체제로서의 공선사회 모색: 협동조합과 추첨민주주의를 중심으로.” 사회 이론 44(단일호): 140쪽.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논의의 방법론에 대해 먼저 언급해두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는 ‘비판’보다는 ‘통섭’을 방법론으로 채택하는데 이는 대안체 제가 기존의 봉건제나 자본제와는 달리 계급 간의 피-지배관계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급계층이 망라되는 협치(協治)에 의한 공동체일 것이라는 최소한의 합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비판’은 사물을 나누고 경계지어 범주를 세우는 분석적 방법론으로서 여전히 유용하지만 나눠진 것들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데는 한계를 가진다. 가령 봉건 제는 자본제에 의해 타도되고 폐지되었다는 관점이 상식이지만 그런 관점 이 조망하지 못하는 인식의 사각지대가 있다. 역사에 있어 ‘어제의 것은 있어도 낡은 것은 없다’는 명제처럼 봉건제 또한 어제 지나간 것일 뿐 ‘미 개와 억압의 암흑기’로만 규정하여 진즉 폐지되었어야 하는 낡은 질곡의 역사로만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는 역사의 계승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봉건시대의 오랜 노동과 제도의 축적이 없었으면 근대 자본주의도 태동하 지 못했을 것이라는 관점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도 대안체제에 의해 언 젠가는 대체되겠지만 그 역사적 소임이 다한 것일 뿐 그것이 애초 나타나 지 말았어야 할 ‘신의 실수’이거나 ‘악의 소산’은 아니라는 인식이다. 그러 므로 대안체제에 대한 논의는 ‘어제와 오늘의 합이 곧 내일’이라는 간단한 공식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이 때문에 ‘비판’보다는 역 사의 큰 줄기를 잡아 각 시대의 특성들을 모두 아우르는 ‘통섭’의 방법론 이 본 논의에 더 유용할 것임을 전제한다. 같은 논문, 141쪽.
공동선으로 덮어내지 못하는 범주의 여백은 무 엇일까? 어떤 방법론으로 접근해야 이 여백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위에서 공동선의 개념의 역사를 간단히 짚어보았는데 거기에 해답이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루소→벤덤→밀→롤즈로 이어지 는 공동선의 계보에서 밀과 롤즈 사이에 커다란 과학적 인식론의 도약이 있는데 밀은 「공리주의」를 1861년 출간하였고 롤즈는 「정의론」을 1971년 에 출간하였다. 이 110년 사이에 자연과학은 대전환기를 맞는데 상대성이 론(1905)과 양자역학(1927)이 그것이다. 이 두 이론은 그 이전을 고전물리 학, 이후를 현대물리학으로 나눌 만큼 자연과학의 대전회를 이룬다. 자연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 철학과 문학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베르그송과 화이 트헤드, 카프카와 조이스, 보르헤스, 그리고 칼비노가 그들이다. 이런 변화 에도 불구하고 공동선 개념은 나름대로는 발전하여 정교해지기도 하였지 만 이들 과학혁명의 ‘세례’는 받지 못한 채 롤즈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학문의 영역에서 2천3백년이 넘도록 동일범주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통시대적인 진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는 여타분야(자연과학)와 같은 질적 발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 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물리학이 인식방법론의 영역에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시간’개 념과 ‘확률’개념이다.4 ‘시간’개념은 상대성이론의 성과이고 ‘확률’개념은 양자역학의 성과이다. 본 연구에서도 ‘어제의 것이 있을 뿐 낡은 것은 없 다’는 언급과 봉건제⋅자본제 계승론은 시간개념을 도입한 인식방법이고, ‘틀린 것은 없고 단지 정답으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서로 다를 뿐’이라는 언표는 확률개념을 반영한 인식이다. 최적화이론에서 탈락한 마르크스주 의적 대안론들을 폐기하지 않은 것도 확률개념에 의존한 것이었으므로 현 대물리학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시간’과 ‘확률’ 가운데 공 동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시간개념이다. 데카르트(1637)와 뉴턴역학 (1665)이 펼쳐낸 근대합리주의는 공간중심적이어서 그 이전에는 ‘공동의 이익(아리스토텔레스)’, ‘공동선(아퀴나스)’으로 이어지던 추상영역의 개념 이 루소(1762)나 벤덤(1789), 밀(1859)에 의해 ‘공동체’라는 공간개념으로 확장⋅진화하게 되는데 이후 롤즈(1971)의 시기에 이것이 시공간개념으로 진화를 했어야 하는데 벤덤과 밀로부터 물려받은 공간개념으로서의 ‘공동 체’에 공백(공리와 개인자유의 충돌)이 있어 이를 ‘정의론’으로 덮느라 그 진화를 놓치고 만 것이다. 사르트르(앙가주망)가 그랬듯이 이는 20세기 중 반의 전체주의적 정치형태(파시즘, 프롤레타리아독재)로 인한 인류사적 재난이라는 불가피하고 긴급한 상황 때문이었음을 감안해야겠지만, 그 이후 샌델(2006)시기까지도 진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체주의자들의 ‘정의론’으로 그들이 시도한 목표조차 만족 스럽게 달성되지 않았다. 이는 문제의 공백이 공동체 개념의 ‘공간성’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시공간’ 개념으로의 진화를 통해서만 애 초 해결 가능한 문제였던 것이다. 같은 논문, 150-152쪽.
당대의 관점, 즉 공간공동체적 관점에서만 보면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심하고 세계화는 그 폐해의 세계적 확대재생산 및 강화 과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반대되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시공공동체적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세계화는 인류역사의 불가피한 발전도상의 한 단계적 현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공동체의 의지가 개입해야 하는 지점은 자본주의와 세계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흐름의 주도권에 대한 교체가 되 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실행계획에서도 나타난다. 세계화를 반대하는 입 장에서는 반대운동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와 실행계획이 없다. 있다면 일 부 진보주의자들의 구호와 산발적인 가두시위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도 권 교체의 문제로 파악하면 다국적자본과 미제국주의를 세계화의 헤게모 니로부터 분리해내기 위해 공동체자본의 축적과 증대에 진보세력의 역량 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실행 가능한 계획이 바로 도출될 수 있는 것 이다. 이처럼 공동선의 가치만으로는 기존의 문제들을 헤쳐갈 수 없고 운 동의 벡터값을 상실하여 의미 있는 대항운동을 끌어낼 수가 없지만 공선 의 가치를 도입하면 운동의 방향성을 명료하게 획득하여 빠르든 늦든 그 방향으로의 전진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선’의 가치가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사회를 ‘공선사회’라 부 르고 이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에서 자본이 점하는 최상의 지위가 ‘공선’에 의해 대체된다. 같은 논문, 153-154쪽.
협동자본(협동조합+노동조합+공공자본)의 총량이 사적자본을 능가하 게 될 때 사회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공선사회로 자연적으로 이행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의 전후를 지배할 운동 원리로는 신직접민주주의의 범주를 제시했다. 그런데 자본과 시장이 폐지되지 않고 ‘공정자본’ 및 ‘공정시장’ 으로 진화해 나가듯이 운동 원리에 있어서도 기존의 ‘대의제’는 폐절되지 않고 새롭게 변모하며 발전해나갈 것이다. 이 대의제와 신직접민주주의 양 자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추첨제인데, 신직접민주주의에서 는 전자민주주의의 결정인 선정에 추첨원리가 기능하고, 대의제에서는 ‘선 출’ 중심에서 ‘선출+추첨’ 혼합형으로의 진화를 추첨제가 주도할 것이다. 같은 논문, 162쪽.
지금 상황에서는 추첨대의제가 미래 어느 시점에 공동체의사결집의 주요수단이 되리라는 상상이 지 성과 상식에 대한 도전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상황을 좀 더 객관화하여 사고실험을 반복해보면 추첨제의 미래가 낙관적임을 알 수 있다. 대의제의 폐지보다는 추첨제 도입을 통한 발전적 계승과 신직접민주주의(국민권력체)와의 양립이 가장 유력한 미래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스위스의 직접민 주주의에서도 국민투표시스템은 대의제를 보완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고 미국의 주단위 직접민주 주의에서도 대의제의 고유한 영역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선출대의제 가 공동체의 존립자체를 위협하는 ‘폭주자본주의’의 기관사역할을 한 ‘거대책임’ 때문에 자본주의의 극복과 함께 어떤 형태로든 대대적인 외과수술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이로 인해 추첨대의제의 공간 은 현재의 상식에 반하여 크게 확대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같은 논문, 166쪽.
자본원리에서 공선원리로 지배적인 원리의 교체 가 이루어지며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은 공동체의 존영을 위협하지 않도록 제어되는 것이 특징이다….추첨제의 도입은 공선사회 초입의 일대유행이 되어 자본제와 공선제를 가르는 가장 상징적인 정치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초입 부터 대의제의 대표성이 논란거리가 되었듯이 공선사회의 추첨제 또한 공 산주의적 평등논리에 포섭된 채 재생산구조로부터 괴리될 경우 논란을 초 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첨제가 공선사회의 일반적인 작동원리의 하나로 서 승인되어야 하지만 지배적인 모든 것들은 동시에 위험하기도 한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 속성과 원리를 잘 이해하여 위협요소로 성장하지 않도록 미리부터 범위와 기능들을 나누어 자리매김하는데 연구역량을 모아 나가야 할 것이다. 같은 논문, 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