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김우재 (2014-), 발췌록

미주한인사회의 역사: 여전히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반공이념의 탄생

동네친구들과 벌린 일 때문에, 상항(샌프란시스코에 이주했던 대한제국인들은 이 곳을 그리 불렀다)의 항일운동사, 재미한인의 이민역사 등을 공부하고 있다. <100년 전쟁> 등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는 이승만이 얼마나 악랄하게 이주노동자 출신의 동포들이 모은 독립자금을 등쳐먹고, 독립운동을 사적욕망으로 분열시키는데만 앞장섰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게다가 이승만이라는 인물은 자신과 대립하던 박용만, 안창호 등의 국민회 인물들의 입국을 거부함으로써, 향후 남한의 이념지형을 친미, 반공주의로 단일화시킨다. 즉, 남한건국의 정통세력이라고 자부하는 이승만 계열의 재미한인세력들이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종북좌빨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다. 보수정권과 맥을 함께 하는 기독교 국가론도 이승만이 끌고 들어온 당시 재미한인사회의 이념이었으니, 이승만은 실상 한국 불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나미. (2007). 일제시기 재미한인의 정치이념. 평화연구, 15(2), 96-122. 라는 논문과, 崔震(Choi, and Jihn). 2003. “初期 在美僑胞社會가 大韓民國 建國에 미친 影響 – Early Korean Immigrants to America : Their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백산학보 (66): 139–74. 라는 논문에서 인용해 둔다. 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 2003. 미주한인의민족운동: 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논집. 혜안. 이 책은 소장할만 하다.


3.1운동을 계기로 1920년대에 들어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인들은 자신의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만들면서 그 위상이 크게 흔들렸다. 더욱이 상해임시정부는 국민회의 애국금 수합제도를 폐지하고 공채발행의 전권을 구미위원부로 위임했고 이승만과 국민회 간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일제시기 미주지역 한인사회가 중요했던 이유는 이곳이 한국독립운동의 주요병참기지라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자금의 보고였기 때문이다… 미주지역을 둘러싼 독립운동단체들 및 지도자 간의 갈등은 사실상 이들 독립운동자금의 관리와 운영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국민회의 주요 지도자는 박용만, 안창호였는데 이승만은 국민회와 갈등하다가 이후 동지회를 만들게 된다. 국민회와 동지회는 재미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양대조직이었다…. 이들 간의 갈등은 앞서 언급했듯이 노선차이를 반영하기보다는 대체로 한인사회의 주도권과 재정권 장악을 위한 갈등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박용만이 사망하고 안창호가 중국으로 간 후 국민회의 지도자가 없어지면서 두 단체 간의 갈등은 ‘친이승만 대 반이승만’의 구도로 나아갔으며, 그로 인해 해방 후 이승만은 자신이 집권하는 동안 국민회 계열은 좌익이라는 딱지를 붙여 고국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되었다. 또한 반이승만 파는 이승만이 미워서 여운형이나 공산정권을 지지하는 경향도 가졌다… 소수이긴 하나 미국에도 사회주의자들이 있었고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안창호와 국민회, 흥사단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배출한 인물이며 단체이다. 이나미(2007), 97-98쪽.

 재미한인의 사회주의관을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의 사상-특히 첫 번째 대응 방식인 반공주의-이 대한민국 건국이념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세력은 미주/하와이의 임시정부 중진들과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으로 주장되었다. 재미 한인지도자인 박용만은 새로운 국가의 건설은 재미 한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들이 새 정체를 조직하여 조선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9년 4월 워싱턴에서는 대한민국이 미국의 제도와 정신 하에 독립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처럼 이들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지향을 갖고 있었으므로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하였기 때문에 이들 세력의 영향력으로 좌우익통합운동이 좌절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좌우합작의 운동이 벌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재미한인들은 김구에게 편지를 써서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데 반대한다는 뜻을 명백히 밝히고 만일 공산주의자들과 단일당을 이룬다면 김구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미국 유학생 출신 지식인들은 해방 후 남한 우익 지도층의 일각을 형성하면서 미군정통치기구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남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후에 정권이 바뀜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부 요직을 차지하면서 중요 정책과 정치변화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연구는 일제하 한국 정치사상뿐 아니라 해방 후 국가건설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연구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나미(2007), 99쪽.

재미한인들은 이승만, 서재필, 박용만, 안창호 등 대표적인 지도자를 포함하여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그 중에서 특히 이승만과 서재필은 미국인의 기독교 신앙을 자극하여 독립운동에 도움을 얻고자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미국기자들과의 회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한국에 동양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려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3.1운동은 기독교 뿐 아니라 천도교, 불교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참여한 운동인데 그는 한국에서 새로 탄생할 국가가 기독교 국가가 될 것임을 공언함으로써 미국 언론과 기독교 단체들의 주목을 받고자 한 것이다. 이나미(2007), 100쪽.

일제 강점기 이전 개화파 지식인들은 대체적으로 민중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서재필, 이승만은 특히 그러한 견해를 공공연히 밝혔는데 이러한 입장은 미국에 와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회 입장을 대변하는 ‘신한민보’는 제1차 한인회의를 이끈 서재필과 이승만의 민주주의 유보론을 비판했다… “…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영수(이승만, 서재필)나 추종자들은 물론 그전 군주시대에 성장하여 군주시대의 구습을 못 면한 노인 측들이라”고 비판했다. 이나미(2007), 102쪽.

재미한인의 진보운동은 공산주의자의 영향보다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진보운동의 핵심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기독교사회주의자들이었다. 기독교사회주의란 용어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이대위로서 그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공통점을 강조하였다. 이나미(2007), 115쪽.

재미한인 중 사회주의자들은 해방 후 주로 북한으로 갔으며 국민회나 반이승만 입장을 가진 인사는 남한에 들어오지 못했다. 따라서 해방 후 남한에 들어온 한인들은 주로 반공주의적 인사들로써 남한 정계 및 사회 내의 우익 지도층을 형성하면서 남북한 분단 및 한국전쟁까지 불러온 한국사회의 비극적 좌우익 대립을 야기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나미(2007), 120쪽.


한국인의 초기 미국이민은 1903년의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의 勞動移民 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2003년 1월은 한국인의 미국이민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를 맞아 초기 미국교 포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어떤 기여를 했 는가를 살피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1902년 12월 22일 수민원총재 민영환등이 배웅하는 가운데 하와이행 첫 이민선이 121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했다. 이들중 일부가 일본 고베와 하와이 현지에서 행한 신체검사에 불합격되어 1903년 1월 13일 97명이 하와이에 상륙하였다. 최진(2003), 139-140쪽

1905년에서 1907년사이 1,003명이 하와이의 사탕농장을 無斷離脫하여 캘 리포니아지방의 쌀농장의 노동자로 進出했다. 1916년까지 美洲本± 이주자 는 1,136명이었다. 1910년부터 시작된 사진을 통한 한인처녀들과의 결혼을 통해 한인사회는 점차 안정되어가고, 그중에는 근검절약으로 돈을 저축하 여 1922년에 이르러서는 수천불의 자본금을 가지고 상업을 하는 사람도 수 십명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의 월급도 26불로 인상되었다. 최진(2003), 141쪽

당시 하와이에는 10여개 국가의 국민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는 데, 모두 자국 정부에서 파견된 영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오로지 한 인 노동자들만 領事保護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와이의 한인사회 (7천여명)은 대한제국정부에 領事派遺을 要請하면서, 만일 재정적인 이유로 파견치 못한다면 영사관 운영비와 영사의 월급을 자신들이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미 한국정부는 일본의 영향하에 놓여있던 때라, 일본정부의 압력으로 호놀노루주재 일본총영사 ‘사이토 간’(齊藤 幹) 을 대한제국의 명예영사로 1905년 5월 5일 위임했다. 그러나. 新民會를 비 롯한 한인사회는 ‘사이토’를 한국영사로 인정하지 않고 명실상부한 한국영 사의 파견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최진(2003), 142쪽

한편, 1902년 도미하여 샌 프란시스코에 거주하던 安昌浩는 동포들의 상 부상조를 목적으로 1903년 9월 李大爲, 朴善謙, 朴永淳, 金成武, 張景과 함 께 미국 본토내 한인단체의 효시인 桑港親陸會를 조직하였다…이때 국내에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한인들 사이에 강력한 항일 정치결사 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안창호는 이러한 여론을 배경으로 1905년 4월 5일 친목회를 政治結社인 ‘共立協會’로 바꾸고, 그 회장에 취임했다…. 1907년 1월 초순 安昌浩, 李剛, 林俊基등 공립협회 지도부는 켈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에서 ‘大韓新民會’를 발기한 후, 국내에 新民會를 창립키 위하 여 1907년 1월 安昌浩를 한국으로 파견하였다. 安昌浩는 당시 기독교세력이 왕성하여 先進意識이 가장 높았던 평안도 지역을 방문, 미주지역의 ‘대한 신민회’발기를 소개하고 항일세력들의 통일연합기관 설치의 필요성을 역설 하였다. 최진(2003), 143쪽

미주동포들의 이니시아티브로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세계 全地域에 걸쳐 항일통일연합기관이 조직된 것이다. 이같이 國民會가 일취월장하자 1910년 5월 10일 그때까지 미가입 상태이던 大同報國會가 국민회에 참가, 합동하게 되었다. 이에 국민회는 그 명칭을 ‘大韓人 國民會’로 고쳐 부르고, 4개의 地方總會와 地方會들도 ‘大韓人 國民曾’로 이름을 바꾸었다. 미주한인 들이 결정하면, 다른 지역에서 이의없이 따를 정도로 미주지역 한인들의 주 도권은 완벽했다.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등 4군데에 지방총회를 갖게 된 大韓人 國民會는 1912년 11월8일 4개 地方總會 대표자들이 샌 프란시스 코에 모여 대표회를 열어 ‘대한인국민회 中央總曾’를 정식으로 설립하였다… 박용만이 기초한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과 결의문을 보면, (1) 왕정을 폐 지하고 共和制를 주창하고, (2) 民主主義 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3) 대 한인 국민회 中央總會를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자임, 한인 自治機關으 로 기능할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 기구는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이 분리되어 입법기관은 일반회원의 대표로 조직된 代議會이고, 행정기관은 중앙총회와 지방총회, 지방회가 있었다. 이 대한인 국민회의 기본정강은 후일 1919년 4월 大韓民國 臨時政府와 1948년 8월 大韓民國 建國의 기본골격이 되는 기틀을 제공한다. 최진(2003), 146-7쪽.

미주지역의 군사훈련과 만주지역의 독립기지 창설운동이 동시에 일어나게 되는 것은 1910년 3월 국내에서 新民會가 그러한 독립전 쟁전략을 택했기 때문이고,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은 또한 미주 大韓人 國 民會의 目標였기 때문이다. 미주지역의 군사훈련에 있어서 가장 主導的 인 물은 朴容萬이었다. 그는 1909년 6월 네브라스카州 커니地方에서 韓人少年 兵學校를 창설하였다. 이 학교는 1910년 4월 네브라스카州헤이스팅스 大學 構內로 옮겨, 현재의 ROTC방식으로 여름방학을 이용, 입소하여 한인청년들 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학교는 1914년까지 약 100여명의 한인 장교후 보생을 배출시켰다. 이 韓人少年兵學校출신들은 1920-30년대에 만주, 노령 지역에서 직접 獨立軍에 가담하기도 하고, 柳一韓(유한양행 창설자)같은 졸 업생은 1945년도 미첩보부대 OSS (CIA의 전신)의 한반도침투공작 Napko공 작에 참가하기도 한다. 최진(2003), 150쪽.

1931년경에는 임시정부의 재정은 거 의 재미교포들에게만 의존하고있었다. 당시 本國의 聯通制도 붕괴되고, 滿 洲도 일제의 통치하에 들어가 만주와의 연락도 이미 끊겼으므로 임시정부 와 김구는 하와이교포들의 1천불 資金支援으로 李奉昌의 日皇폭탄투척사건 이나 尹奉吉의 上海폭탄투척사건을 꾸밀수 있었다. 최진(2003), 1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