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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정치의 구호로 사용한다는 것

이대로 두면 대한민국이 망국의 길로 들어선다는걸, 아주 조금만 정치경제사와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출산율이 0.6명대로 떨어진다는건 하나의 징조에 불과하다. 한국의 인구가 감소해서 더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될 때쯤엔, 오히려 적은 인구가 경쟁력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인구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향후 100년간 어떤 국가적 경쟁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 핵심에 과학기술이, 그리고 그 기저에 국가 연구개발비의 핵심이 있다. 윤석열은 그 씨앗을 죽이고 있는 셈이다.

정치권 여기저기서 과학기술을 구호로 사용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이 글은 어떤 주장을 위함이 아니라, 내가 이미 10여년 넘게 주장해 왔고, 내 책 <과학의 자리>를 통해 자세히 논구한 새로운 국가철학으로서의 과학이라는 명제를,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나열하고, 내가 그동안 써왔던 글들과 강연 등을 병기함으로써, 혹여나 이 주제를 가지고 향후 한국의 미래를 위해 과학기술을 적확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과학기술을 정치의 구호로 가장 먼저 가지고 들어온 정치인은 의사이자 과학자 출신의 정치인 안철수다. 나는 트위터와 블로그를 시작하던 2008년 경부터 안철수와 한국 벤처기업 1세대들의 모임인 브이소사이어티가 한국 정치의 지형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최태원, 정용진, 이찬진, 이재웅 등이 주축으로 참여했던 브이소사이어티는 해체되었고, 안철수는 그저 그런 정치인이 되어버렸다.

대덕연구단지는 서울을 제외하고 한국 과학기술의 중심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터를 잡고 과학기술계를 대변한다고 주장해온 국회의원은 5선의 이상민이고, 그는 과학기술계를 위한 꽤 많은 입법을 추진해왔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최근에 국민의 힘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이상민 의원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유선진당에서 활동했던 이력이 있는 대표적인 철새 정치인이다. 참고로 이상민은 과학기술자가 아니라 변호사 출신이다.

한국의 희망이라는 정당을 만든 삼성전자 임원 출신 양향자 국회의원도 대표적으로 과학기술을 모토로 내세우는 정치인이다. 최근에 이준석의 개혁신당과 합당을 선언했다. 합당과정에서도 과학기술 선도국가를 내세웠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중소벤처기업부장관을 역임한 박영선 전 의원도 요즘 미국 유학 중에 반도체패권국가를 외치며 책도 출판하고 방송에도 출연중이다. 이 분은 잘 알려져 있듯이 과학기술과는 별 접점도 없는 언론인이며, 삼성과 같은 대기업을 비판하며 유명해져 정치인이 된 인물이다.

이 정도가 아마 유명한 정치인들 중에 과학기술을 일종의 구호로 삼은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에 과학기술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안철수의 정체성은 의사 혹은 기업가에 가깝고, 이상민은 법조인, 양향자는 기업인, 박영선은 그냥 정치인 정도일 뿐이다. 과학기술인을 위한 법안과 정책을 만들기 위해선 과학기술현장에 익숙한 과학기술계 출신의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위에 거론한 이들은 과학을 일종의 정치적 성공의 도구로 사용할 뿐이다. 그들에게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지위와 안정적인 연구개발환경은 그들의 삶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다.

아마 과학자 출신으로 제대로 정치인의 경험을 한 인물을 꼽자면 오세정 현 서울대 총장이 아닐까 싶다. 오세정은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으로 스탠퍼드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던 현장 과학기술인이다. 그는 20대에 안철수의 국민의당 비례대표로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국회의원직을 내팽개치고 서울대 총장이 되었다. 그는 그 나이대의 과학자로는 드물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고 정치적으로도 큰 기회를 얻었던 과학기술계의 기득권이었지만, 그가 딱히 과학기술계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는 건 없다. 오세정 총장은 과학기술보다 한국 대학교육 개혁에 더 큰 관심이 있어 보인다. 한국 대학이 망해간다는것도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오세정 총장이 교수 출신, 즉 대학현장의 과학기술인으로 정치인이 된 경우라면, 이경수 박사는 정부출연연구소 출신 현장 과학기술인으로 정치에 입문한 경우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영입인재로 비례대표를 받았지만, 위성정당 이슈 등으로 뒤로 밀리며 결국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을 1년인가 하고 지금은 창업을 했다고 한다. 과학기술자 몇 년 전에 이경수 전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해서 오세정 총장보다 뭘 더 해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오세정과 이경수의 과학기술인 세대는 한국에서 과학기술이 성장하던 시기의 모든 혜택을 받은 세대이고, 현재 고통을 받는 학문후속세대의 아픔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과학의 자리>에서 현장 과학기술인을 국회나 청와대로 보내는 일이, 한국 과학기술생태계의 구조적 변화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사회의 혁신을 모색하는 일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나는 어느날 갑자기 한국에 과학기술인 출신의 정치인이 나타나 과학기술과 한국을 동시에 구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그런 일을 꿈꾸는 세력과 집단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와 친분이 있는 황정아 박사가 이재명의 민주당 영입인재로 들어갔다는 뉴스를 보고 씁쓸한 이유다. 물론 나는 그의 건투를 빌 것이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아마 내게 물었다면, 만류했을 것이다. 특히 이재명 같은 정치인이 장악한 정당의 추천으로 정치에 입문한다는 것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경수 박사처럼 여기저기 치이다, 길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건승을 빈다.

한국의 과학기술인들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의 비전을 만들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한번은 실제로 단체가 조직되었으나, 식민지 시절 발명학회의 김용관이 겪었던 비극의 재방송이 되는 걸 보며 좌절했다. 과학기술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는 이들은, 그의 정체성이 정치인이건 과학기술인이건 상관 없이 과학기술을 오염시키고 사회를 후퇴시킨다. 특히 한국에서 그런 퇴보를 부추기는 이들이 바로 과학대중화 세력이다. 이들은 대중의 과학에 대한 열정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불리는데 몰두할 뿐, 과학기술이 어떻게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과학기술계 관종들의 모임이 되어버린 그 과학동호회 이후에 대전의 현장과학기술인을 중심으로 비형식적인 느슨한 네트워크를 시도했었으나, 그 모임 또한 계기를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사라졌다기보다는 네트워크의 중심이었던 내가 빠져나왔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한국 과학기술계의 일은 한국 과학기술인들이 해결하는 것이 맞다.

이미 <과학의 자리>로 내 생각을 정리해두었지만, 잠시 시간을 내어 과학과 정치, 혹은 과학기술인과 정치, 혹은 한국사회와 과학기술에 대한 내 글과 강연을 한 곳에 모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글을 짬내어 쓰는 이 시간에도 논문을 쓰는게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 과학기술계의 일이 내게는 무덤덤하다. 오히려 지금의 나에겐, 혹시라도 중국 정치지도층이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를 감축할까 그게 두려울 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그런 걱정은 기우로 보인다. 어쨌든, 아래의 글과 강연들이 과학기술로 한국사회의 미래를 갈구하는 누군가에게 이정표가 되길 바랄 뿐이다.

  • 과학과 정치 강연 녹취록 – 2012년 2월 실리콘밸리의 노무현 지지자 모임인 열린사람 좋은세상에서 했던 강연의 녹취록이다. 녹취록이 필요한 분들은 이메일로 연락하면 될 듯 하다. 현재는 파일 링크가 끊어져있다.
  • 과학은 정치에 중립적이지 않다! – 2014년경 블로그에 쓴 글이다. 당시 광우병 사태가 있었다. 내 블로그를 잘 뒤져 읽어 과학과 정치의 철학적 관점을 발견할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에 입문해도 좋을 것이다.

과학적 정치는, 진보와 보수의 진영 논리를 넘어서는 보편적 상식이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길들여진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이 과학적 진실보다 사적 이익에 집착한다면, 진보주의자들은 이념에 지나치게 집착해 과학적 태도에서 벗어난다. <밀려난 과학>의 저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이 과학과의 전쟁을 선포했다면, 진보주의자들은 과학과의 아마겟돈을 선포”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핵폐기물을 이유로 원자력을, 지구온난화를 이유로 화석연료를, 생태계를 파괴하는 댐을 이유로 수력을, 새들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풍력을 반대”한다. 그들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전기 없이 살아가야 한다. 모든 자연적인 것은 선하고, 인공적인 것은 악하다는 극좌파의 이념 속에 과학적 태도가 스며들 공간은 없다.

  • 과학사상으로서의 정치 – 2020년 6월 30일 이로운넷 칼럼. 이로운넷에 연재했던 글들은 향후 내 책의 소재가 될 내용들이다. 그 연재들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과학기술자가 있다면 아마 그는 정치를 해도 될 것이다.

”과학적 태도는 지극히 평등한 것이다. 과학이 각기 가는 길은 비록 하나로 일정치 않고 길 위에서 보는 대상도 일치하지 않지만, 출발지점이 서로 같고 길을 가는 방법도 서로 같아서 각자 길을 벗어난 만큼 더욱 가까워져 피차가 서로 더욱 도움을 줄 수가 있다. 과학적 태도는 지극히 겸허하고 온화하다. 과학의 지식세계와 공간은 서로 같아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은 한계가 있고 미래 알게 될 지식은 끝이 없다.”

콜린스는 과학자사회가 구축해온 여러 가치가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의 가치와 중첩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관찰과 실험에 대한 존중, 정직성, 진실성, 무사무욕, 보편주의, 조직된 회의주의, 반증과 개방성, 재현 가능성, 전문가에 대한 존중 등의 규범은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으로 추락하지 않은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로 구현돼야 한다. 이런 과학의 모더니즘적 가치를 사회와 문화의 핵심가치로 선택하는 철학적 입장을 콜린스는 ‘선택적 모더니즘’이라고 불렀고, 이런 과학적 가치들이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실천규범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을 나는 ‘과학적 삶의 양식’이라고 부른다.

물론 과학에 대한 마오쩌둥의 생각은, 과학으로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것을 파괴하고, 철저히 중국을 구국하는데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한 국가의 지도자가 조지프 톰슨과 막스 플랑크의 책을 읽으며 새로운 국가의 형태를 구상했다는 건 한국의 대통령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큰 차이임에 분명하다. 20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사회진화론의 바람이 똑같이 불었고, 조선에도 과학은 분명히 큰 변화의 동력으로 다가왔었다. 도대체 중국에선 사상의 위치를 점유했던 과학이, 왜 조선과 대한제국에선 그렇지 못했었는지를 이해하는 작업은 한국사회에서 과학의 지위와 역할을 이해하고 이를 직조하는데 아주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출처 : 이로운넷(https://www.eroun.net)

‘망둑어과 어류의 진화’, 일왕 아키히토가 1984년 발표한 논문 제목이다. 일왕은 어류학자다. 취미나 정치적 쇼가 아니다. 그는 궁에 사는 너구리의 배설물을 연구해 2008년에도 논문을 발표했다. 일왕은 과학을 사랑한다. 1992년에는 <사이언스>에 ‘일본의 과학자를 육성한 사람들’이라는 과학사 에세이를 발표했다. 일본 왕실 전체가 과학을 사랑한다. 그의 아버지 쇼와도 어류학자였고, 첫째 누이도,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딸 구로다 모두 생물학을 연구했다.

  • 사회주의로서의 과학과 과학지식인 – 2022년 7월 22일 더칼럼니스트 칼럼. 더칼럼니스트에 썼던 글들에는 내 정치적 관점이 녹아 있다. 그 글들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1920년대 등장한 마르스크주의 지식인들은, 어쩌면 이런 세계사적 흐름의 일부로서 한국의 지식인사회와 학술생태계를 구성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 비극이 왜 여전히 한국사회가 진보적 과학적 지식인이라는 집단의 확보에 실패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한국 경제의 기둥, 반도체 산업이 건곤일척의 위기에 놓인 이때,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는 정치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건 심각한 일이다. 한국 정치는 대장동과 고발사주에 오염됐다. 생각해보면 구한말 대한제국의 황제와 민씨 일족이 그랬다. 누군가는 그 비참한 역사의 재현을 막아야 한다.

국정원 해킹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 이준행은 저항시인이 아니다. 그는 독립 개발자의 길을 걸으며 조용히 한국 인터넷 지형을 변화시키고 있다. 오바마 캠프 엔지니어들의 선택은,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으며 사회의 변화에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집단은 누구인지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윈도10은 액티브 엑스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구글 크롬도 그런 방향을 따르기로 했다. 21세기 한국의 시인은 바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일 것이다. 우리는 엔지니어와 과학자가 움직이는 사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실험 가능하고,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정부와 사회 전반에 걸쳐 기술의 사용을 지원하고 전파하는 데에 일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연구개발을 위한 자금 제공, 사업계와 연구기관과의 파트너십 설립, 새로운 기술 채택을 유도하는 정책 지원 등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정치인들은 챗GPT 같은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개 소개 활동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 새로운 기술의 잠재력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이준석 너머 – 2021년 5월 한겨레 칼럼을 떠난 계기가 된 글. 꽤나 뉴스가 되었다. 오철우 과학전문기자도 한겨레를 떠난지 꽤 되었다. 한국 보수진영이 과학기술을 도구화한다면, 진보진영은 악마화한다.

정치는 함께 꾸는 꿈이다. 우리가 꿈꾸어야 할 한국의 모습은 무엇인가. ‘청년’의 정치가 아니라, 더 ‘젊은’ 한국을 만들기 위한 철학을 보고 싶다. 거기에 답이 있을 것이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s://www.mediatoday.co.kr)

정치의 계절이다. 무능하고 경멸스러운 수준의 정치를 보여준 20대 국회의 끝이 보인다. 여전히 언론은 각종 정치집단의 합종연횡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마땅히 그래야만 할 국가와 정치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정치는 그저 항의하고, 분노하고, 이기적으로 꿈을 꿀 뿐이다. 이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정치를 돌려주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항쟁하고, 행동하고, 대의와 타인을 위해 꿈의 세계를 건설하는 급진주의자의 정치다.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

더 찾을 수 있을텐데, 귀찮다. 내가 쓴 대부분의 글들은 인터넷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데 과학기술이 중요하다는 테제는 사실이며, 아마도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다. 문제는 그 방법론과 철학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학기술과 정치를 연결하는 방식은 일차원적이며 피상적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한국사회를 구원할 수 없다.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당신들의 그 알량한 국가를 구하고 싶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