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국 정치판에서 과학 혹은 과학기술이라는 단어를 접하는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안철수가 화려하게 한국 정치에 입문하기 이전부터, 이미 박정희에겐 과학대통령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었을 정도이니, 실상 한국사회는 언제나 정치의 혁신을 위해 과학이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온 셈이다. 나는 실상 황우석 사태의 본질을 그것으로 본다고 항상 말해왔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미국이라는 국가가 오펜하이머라는 과학자에 의해 개발했던 최첨단 과학기술의 극한인 원자폭탄 덕분에 패망한 일본의 항복으로 겨우 독립했던, 게다가 이후 제대로 된 과학기술생태계를 만들어나갈 과학기술자들은 모조리 월북해버린 남한에서, 박정희가 미국의 원조로 KIST를 설립하기 전까지, 한반도에서 과학기술이란 남의 이야기였을 뿐이다. 그 오랜 열등감과 열망이 황우석으로 폭발했다는 것이 나의 분석이며, 안철수 역시 그 국민적 정서 속에서 한국정치에서 유래가 없는, 게다가 정치학자들조차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 안철수 현상의 수혜자가 된 셈이다.
이번 2024년 총선에서 어떤 희망을 본다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캐나다-미국-중국을 거쳐 한국을 바라보게 된 과학자의 눈에, 대한민국은 이번 총선과 관계 없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는 나라일 뿐이다. 이번 총선은 그 망하게 될 나라에서 훗날 역사가가 기록하게 될 어떤 흔적들을 살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마치 조선이 망하기 직전에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3일천하를 꿈꾸었듯이, 그리고 그 갑신정변을 일으킨 청년들이야말로 당시 조선에서 길러낼 수 있었던 최고의 엘리트 계층이었다는 것이야말로, 이번 총선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어야 할 것이다. 이미 조선이 망하기 전부터 해외로 유학을 다녀온 수많은 지식인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조선을 구해낼 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유학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결국 정치학 박사였던 미국 유학파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보면, 인문을 숭상하는 조선의 끈질긴 관념과 문화가 왜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도 그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문화적 편린은 여전히 조선의 것이다. 우리의 지폐에는 세종대왕과 이순신과 신사임당이 새겨져 있고, 한국을 알리는 방식은 한복과 조선왕의 궁전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조선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수백년 후의 역사학자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을 주장이 될 것이다.
<과학기술혁명지계>를 비롯한 내 글에서 여러번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한국을 꿈꾸는 지식인이라면, 불교에서 유교로의 전환 정도에 해당하는 인식적 혁명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 전환이 반드시 유교에서 과학으로의 전환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왔고, 한국의 인문학자들 중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이들은 기껏해야 기독교를 기웃거리거나 유럽의 공허한 형이상학과 철학을 베껴보려 할 뿐이다. 하지만 시대정신의 변화란, 지식인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변해가는 그 흐름을 지식인은 정교하게 설명해낼 수 있을 뿐이다. 만약 한국에서 인문학에 경도되지 않은 지식인이라면, 망해가는 한국에서 잠시 반짝거리는 과학의 빛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방향과 정교함은 결코 분명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국민이 제3지대를 원하는 이유의 본질을, 지식인이라면 정치공학적 계산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국민적 열망 속에서 읽어내야 할 것이다.
지금 국민은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개벽을 원하고 있다. 그건 마치 고려가 끝나고 조선이 시작되었을 때, 삼봉 정도전이 <불씨잡변>으로 고려를 지배했던 그 강력한 불교의 이념을 박살내고, <조선경국전>으로 유교를 통한 국가의 기틀을 잡은 것과 같은, 적어도 지금부터 수백년 동안 한반도의 이념이 될 사상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나는 <과학의 자리>를 통해 내가 생각하는 그런 한국사회의 모습을 그리려 애썼다. 그 책을 제대로 읽어낸 사람이라면, 과연 ‘과학적 사회, 사회적 기술’이라는 패러다임이 어떻게 한국사회를 근본부터 개벽시킬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게 된다. 그 틀을 갖게 되면 현재 한국 정치에 불고 있는 여러 변화의 기운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국민들은 결코 자신들이 상식에 이르게 된 과정을 정교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걸 인식하고 정교하게 사상으로 펼쳐야할 의무는 지식인에게 있다.
국민은 말하고 있다.
- 검찰독재를 종식시키라는 것은 민주당의 착오다. 민주당의 당수 역시 법을 다루는 율사이며, 민주당 국회의원의 대부분은 변호사, 국민의 힘 국회의원의 대부분과 행정부 고위관료의 대부분은 검사 출신이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지속된 한국 정치생태계의 율사독재의 종식이다. 그 분노는 검사와 변호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국민은 노무현 이후 문재인 윤석열로 이어지는 변호사-검사, 즉 율사 정치리더십을 의심한다. 이제 새로운 집단이 한국을 이끌어야 한다. 적어도 그것은 율사계급이어서는 안된다.
- 다당제는 국민의 염원이 아니다. 제 3지대의 착각은, 국민이 양당제에 식상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한국의 국민은 박정희, 전두환 독재가 끝나고 나서도 다시 노태우를 선택했고, 87년 체제 이후에 그들이 선택한 유일한 혁명은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하고 4년 중임제를 폐지시켜, 적어도 다시는 대통령의 독재가 불가능하게 만들어낸 것 뿐이다. 박근혜 탄핵은 국민이 지켜온 핵심 가치가 바로 독재의 종식임을 증명한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어떤 국회 체계가 이상적인이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의원내각제로 갈지, 대통령제로 갈지에 대해서 그들은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들은 국회의원을 대체로 혐오하고 신뢰하지 않지만, 아주 실낯같은 희망을 갖는다. 그 희망의 기저엔, 그들과 정서가 비슷한 이들이 더 많이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즉, 다당제는 국민의 염원이 아니다. 국민이 국회에 바라는건, 유권자의 모집단과 최대한 비슷한 국회가 구성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 그것이 국민이 바라는 국회제도의 유일한 변화방식이다. 따라서 연동형 비례제던, 병립형 비례제던, 그런건 중요한 제도적 변화가 아니다. 국회의원이 유권자의 모집단을 반영하기 전까지, 국민은 끝없이 국회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할 것이다. 그것이 현재 국회에 대한 국민 여론이 담고 있는 정서다.
- 정치혐오는 착각이다. 한국 국민 대부분은 정치인을 혐오할 뿐, 정치행위를 혐오하지 않는다. 한국처럼 정치고관여층이 많은 국가는 드물다. 대부분의 성인이 정치뉴스를 즐겨보며, 정치평론가를 자처하는 나라는 흔하지 않다. 이런 나라에서 정치혐오란 어설픈 분석일 뿐이다. 한국은 정치혐오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행위의 시스템이 어설프고 기반이 허술해서 누구나 정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 정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대부분의 정치인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건 새로운 제3지대 정당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세력의 탄생이다. 여기서 또 한번의 착각이 생긴다. 그 새로운 정치세력의 차별성은, 한국은 생물학적 나이로 구분지으려 한다. 그렇지 않다. 가솔린이 필요한 차에 경유를 넣으면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그 가솔린이 새것이던 헌것이던 그건 상관이 없다. 즉, 국민의 정치혐오는 단 한가지를 목표로 작동한다. 그건 완벽하게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이다. 그 정치세력은 한국사회가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이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역량을 보여주어야 한다.
- 현재 한국사회의 정치생태계를 지배하는 계층은 율사다. 그들은 법을 다루며,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권력에 근접한 집단이다. 정치적 권력은 없지만 경제적 자유라는 가치로 한국의 지배권력이 된 이들은 의사다. 의사들은 율사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숫자를 조절하며,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그들의 권력을 누려왔다. 하지만 한국의 국민은 의사에게 정치권력을 부여하거나, 율사에게 경제권력을 부여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그 절묘한 견제와 균형이 한국이 최악의 상황으로 추락하는 것만은 막고 있는 셈이다. 국민은 그 두 지배계층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문과와 이과의 극단에 위치한 이 두 지배계층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을 지배해왔으나, 한국을 진보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586 운동권에 대한 심판이라는 구호가 허접한 이유는, 그 운동권이라는 세력이 율사나 의사처럼 탄탄한 기반에 놓여 있지도, 지속가능성도 없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운동권은 어차피 사라지게 된다. 그건 그들이 시대정신을 다해서가 아니라, 그저 안티테제로서의 싸움 외엔 무능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운동권을 심판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운동권을 골라내는 일조차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 이제 여기서 누군가는 대안세력의 이름을 내놓아야 한다. 나는 <과학의 자리>를 비롯한 내 수많은 글에서 그 세력은 해방이후 남한에서 탄생한 과학기술인 집단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해왔다. 그들은 실제로 한국을 경제대국으로 만든 장본인이지만, 단 한번도 권력을 갖지 못한 집단이다. 율사와 의사가 서울과 부산이라는 대도시를 기반으로 한국을 지배해왔다면, 과학기술인은 대전이라는 상징적인 도시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이준석, 양향자, 리셋 코리아 등등의 정치인과 정치세력이 과학기술을 정치로 소환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과학기술을 하나의 도구로만 인식하고 있다. 과학기술 자체가 이념이자 정치세력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 과학이 조선시대의 성리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념이 되어야 하고, 과학기술인이 성리학자들처럼 정치세력으로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그런 사회를 꿈꿀 수 없다면, 과학기술을 소환하는 모든 정치적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