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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훈련 없이 학문을 한다는 것의 의미

기생 말벌의 침에는 독특한 펩타이드들이 존재한다. 며칠 집에 와서 한국 뉴스를 틀어놓고 그 펩타이드들의 분자적 기제를 초파리에서 시험해볼까 하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마침 하얼빈공대에서도 특출난 학생들만 모아놨다는 학부생이 들어왔길래, 중국 엘리트 학생의 수준도 테스트할 겸 한번 공부해서 발표를 해보라고 했다. 실험실에서 하는 대학원 공부와 학부생 시절의 공부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Burke, Gaelen R. et al. Current Biology, Volume 34, Issue 10, R483 – R488

머리도 식힐겸 페이스북에 들어갔더니 얼마전 죽은 브루노 라투어에 대한 블로그 글 하나가 보인다. 광고로 도배되어 도무지 매력이 느껴지지 않던 페이스북에서 왠일로 죽은 과학철학자의 글이 올라왔다길래 따라가 잠시 훑었다. 가끔 보던 블로그다.

생태 사상과 정치 신학: 브뤼노 라투르의 『가이아 대면하기』출처: https://begray.tistory.com/608?fbclid=IwY2xjawGN1alleHRuA2FlbQIxMAABHWjQDJiy2cKl7jZKVwmK3GIdSodSnMwbxxrkYTGcVH3sv0vRKBzDEBymrQ_aem_81b8HDCrFTaNLiqN7_3H5Q [BeGray: Historical, Critical, and Practical:티스토리]

브르노 라투어는 그의 학자로서의 여정 초기에 분자생물학 실험실을 인류학적으로 연구해 <실험실 생활>이라는 연구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블로그 글은 그의 글 <가이아 대면하기>를 소개하기 위해 라투어의 논적이기도 했던 샤핀의 글 하나를 소개한다. <Serious Man>이라는 글로 사상사저널 블로그에 올라온 잡글이다. 대충 구글 번역으로 훑었는데 라투어의 가족이 와이너리를 경영했었고, 라투어는 가족에게 아파트를 증여받아 부유하게 살았으며, 독실한 카톨릭 범신론자였다는 이야기다. 샤핀과 블로그 글을 쓴 학자는 이 라투어의 종교적 배경에 무슨 대단한 의미를 두는 것 같지만, 사실 과학철학계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인물조차 서구백인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라투어의 철학은 그닥 대단할게 없다고 생각할 계기를 주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이 종교적 독실함이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을 끊임 없이 의심하게 만든 계기로 작동했을 수 있고, 만약 그렇다면 라투어의 철학은 그 기반부터 의심해볼 여지가 충분한 셈이기 때문이다.

얼마전엔 한윤형이 쓴 <상식의 독재>를 선물 받아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지인이 멀리까지 보내준 마음은 고마웠지만 깊이 읽어나가지 못했다. 작가는 분명 진지하게 한국사회의 구조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한 것으로 보인데, 기생말벌의 펩타이드나 다루는 과학자의 뇌는 그 분석방법에 대한 아무런 신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과학사와 과학사회학을 아우르는 책을 써봤지만, 대부분의 책 내용이 사실에 대한 자의적 분석으로 되어 있는 철학책이나 사상서의 경우, 이젠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20세기 중반까지가, 이런 철학자들의 아무말 대잔치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차피 영상물과 짧은 글들로 그 자리가 위태로운 철학과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서서히 극소수의 마니아를 위한 영역으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다. 그나마 인류가 지금까지 발명한 학문들 중 가장 견고한 과학적 방법론을 훈련하지 않고, 도대체 어떤 학문이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인지에 대해 최근들어 많은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망상을 하는 시간은 정말 잠시 뿐이지만.

그나저나 클로닝은 아주 싸게 맡길 방법을 찾았는데, 초파리 인젝션을 셋업하는 일이 계속 뒤로 미뤄지고 있다. 논문에 찌든 몸을 일으켜 학생들과 초파리 알에 바늘이나 꼽아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