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 김용민, 충대신문 2009
얼치기 진보의 얼치기 분석과 해결책
세대론의 유행은 오래되었다. ‘전후세대’라는 표현부터 ‘386’과 ‘X세대론’을 거쳐 이제는 ’88만원 세대’와 ‘실크세대’까지, 지식인들의 세대론은 단 한번도 생산적인 담론을 쏟아낸 적 없는 유행가에 불과했다.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이 속한 세대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다른 세대를 욕하며, 물리적/사회적/문화적으로 동질화될 수 없는 세대론을 들고 나오는 문제는 지적불성실과 담론의 건강성 측면에서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설사 그 담론의 효용성이 담보되더라도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문제다.
세대를 분석하는 일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세대론이 한 세대에 대한 가치평가로 흐를 때다. 세대에 대한 분석은 필연적으로 가치평가를 수반할 것이고, 다양한 평가들은 세대에 대한 비난과 칭찬으로 이어진다. 이미 진보가 대중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글에서 말했듯이, 사회적 현상에 대한 원인을 개인에서 찾으려는 성향은 진보의 것이 아니다. 홍세화는 대학생에 대해 실망했지만, 그 원인을 대학생들의 의식에서 찾지 않았다. 문제의 원인은 사회구조에 있었고, 그 해결책도 사회구조의 개혁에 있었다.
반면, 김용민은 너무 쉽게 20대들을 비판한다. 386과 자신이 속한 소위 298세대의 위업을 장황하게 설명하던 김용민은, 촛불을 들고 나온 10대들을 가르키며 20대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는 윤리적 도발을 시도한다. 얼핏 가능해보이는 얘기다.
문제는 김용민의 도발로 흥분한 20대들의 분노게이지가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엉뚱하게 김용민 본인에게 향한다는 데 있다. 이건 순수한 전략적 차원의 문제다. 진보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구조에서 찾고 해결책도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김용민은 두 가지 모두에서 실패했다. 그는 문제의 원인을 20대라는 세대에서 찾았고, 그 해결책도 20대를 원망하는 것에서 구했다. 따라서 나는 김용민에게서 그 어떤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찾지 못하겠다. 아니 실은 20대들의 분노에 동참하겠다. 마음껏 김용민을 욕하자. 그는 얼치기 진보다. 시국강연이랍시고 대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홍보에 여념이 없는 그의 모습은 진보의 탈을 쓴 변희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원흉이 뚜렷하지 않은 지금, 이명박을 선택한 이들과 그를 퇴출하고 싶은 대중의 스펙트럼이 모호하게 겹치는 현재의 상황은 그 적이 외부에 있었던 일제시대와도, 적의 모습이 너무나도 뚜렷했던 독재정권 시절과도 다른 것이다. 20대들의 방황과 고민은 거기에 있다. 김용민은 그런 분석에는 관심이 없다. 그에겐 민주화시절의 386처럼 거리로 뛰쳐나가지 않는 20대들이 겹쳐보일 뿐이다. 참으로 저급한 분석이다.
만해와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
민족의 운명이 위협받던 일제시대에도 청년의 행동에 대한 문제의식은 존재했다. 만세운동이 있었고,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이 있었지만 모든 청년들이 그 대열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해는 <조선 청년에게 고함>을 썼다. 만해는 말한다. 현재의 역경은 불운이 아니라 행운이라고. 조선의 청년들은 불운아가 아니라 행운아라고. 만해는 이론가들의 어려운 이야기 따위 집어치우자면서 쉽게 말해준다. 조선청년은 자애(自愛)하라고.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이 시대를 고민한 만해가 청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였다. 만해가 김용민보다 국가의 안위를 고민하지 않은 인물이었을까. 만해가 행동하지 않는 청년들을 향해 ‘너희는 이미 실패했다’라고 말했다면 우리가 만해에게 공감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만해는 스스로 걷는 것으로 청년들에게 보여주었다. 훌륭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훈계를 일삼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나는 김용민의 어떤 행적이 20대들에게 귀감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촛불항쟁에 참여했다는 것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독설을 퍼부었다는 것이? 만해가 이론가들의 말을 빌어 청년을 훈계하지 않은 이유는, 스스로 옳은 길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은 청년들이 하면 된다. 교사는 교사의 행동에서 학생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해는 그리 했다.
혁명의 시기 러시아에서, 위대한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도 청년들을 위해 글을 썼다. 1880년 <반란자>에 실린 이 글은, 과학자로, 의사로, 법률가로, 또 농민과 노동자로 사는 이들이 왜 혁명에 동참해야 하는지를 차분히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속한 위치에서 불합리와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충분한 분석 후에야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말한다.
진지한 젊은이, 남녀, 농부, 노동자와 군인,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권리를 생각하고 우리에게로 올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형제와 함께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에게 올 것이고, 그 혁명은 모든 노예제도를 폐지하며, 모든 구속을 끊어버리고, 옛 전통을 깨뜨리며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의 지평선을 열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 혁명은 마침내 인류사회에서 진정한 평등과 진정한 자유를 마침내 성취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라. 그들 노동의 열매를 마음껏 즐기기 위해, 그들 능력의 완전한 발전을 위해, 또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행복한 삶을 위해 일하라. 우리가 목표로 하는 유익한 것을 성취하기에는 우리 집단이 너무 연약하다고 말하게 하지 말라…고통받으며 분노하는 우리 모두가 대중인 것이다. 우리가 바로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바다(대양)인 것이다. 우리가 뜻만 가진다면, 정의의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청년에게 호소함>: 아나키즘도서편찬위원회
크로포트킨과 같은 급진적 아나키스트조차 김용민처럼 청년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쉬운 방법을 택하지는 않는다. 그는 청년들에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만든 후에야 이들에게 혁명에 동참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과학자로, 의사로 살고 있는 청년들을 힐난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현실을 보여주고 설득했을 뿐이다. 김용민은 현실을 보여주는 데에도 실패했고, 설득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x세대니 88만원이니 다 짜놓은 프레임에다 인간을 끼워 맞춘다면 간디도 독재자이며 히틀러도 박애주의자입니다 ㅋㅋㅋ
섹시한 유혹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어휴…저에 대한 너무 과분한 평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그냥 저는 제가 우연히 뿌리 박게 된 이글루에 있고 싶습니다.
(있다 보니 재미있는 일도 많더군요…여성분들과 저녁 식사도 했답니다. ^^v)
사안별로 연대(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수꼴들을 몰아내는 일에 충실하게 사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부끄럽지만, 컴에 너무 약해서 이제 겨우 조금 시스템을 파악한 이글루를 떠나는게 저에게는 모험이랍니다. ^^;
고민입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1%의 마이크로 트렌드들의 집한제인 이십대를 어떻게 결속하게 만들수 있을까.. 하~ 스스로 깨닫기 전에 아무리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요.. 스스로가 큰벽의 존재를 느껴봐야 할텐데.. 우리는 선도하고 계몽해야하는 우매한 놈들이 아닌데.. 아~ 모르겠다.
어느곳에서나 열심히! ^^
저도 대오각성하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상황이 사람을 만듭니다. 전 현재의 상황이 20대들에게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가장 진보적인 세대로 성장하실겁니다.
김용민 교수의 블로그에서 트랙백 타고 들렀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논리적으로 정말 명징한 글이군요.
왠지 자주 놀러 올 것 같습니다.
필히 자주 놀러올실겁니다. ㅋ
아쉬운 점이 없진 않지만, 어차피 저도 단정적으로 쓴 터라 할 말이 없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진심입니다. 김용민.
덧붙여 드릴 말씀이 있다면, 님의 글을 퍼 가서 올렸는데 삭제했습니다. 허락을 받지 못한 터라.
어쩌면 저역시 제가 아는 20대들에게 (그들의 시선에서)재수없는 꼰대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들에게 가급적이면 희망을 찾자는 생각입니다.
20대에게서 희망을 못찾는 사람이 10대에게 희망을 건다는건 일종의 자기기만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방법은 스스로 찾는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꼰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방법할 장을 마련해줄 의무가 있다고 여겨지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CCL은 출처만 밝히면 퍼감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지 않습니다.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겠습니다.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모욕적 표현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보여주면 따라옵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일 뿐입니다.
너무 신랄하셔서 ‘모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이~ 인 배 란 무엇인가! – 도올
??? ㅋㅋㅋ
이 글을 퍼 가겠습니다. 물론, 영리가 목적이 아닙니다.
“또한 20대는 얼치기 진보의 말에 넘어갈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20대들을 변희재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면,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필요하다. 그에게 그만한 역량과 영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이건 뭐지?
김용민은 얼치기 진보라 안 넘어가는데, 그런 사람들이 듣보잡 변희재한테 넘어갈 수도 있다.
이런 심리 상태 자체가 20대들 병신이란 소리 듣게 만드는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변희재한테 낚일 준비나 하고 있고 ㅋㅋㅋㅋ
20대 니네들 심리상태가 보인다 보여
20대들은 과연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하는지 ㅜ.ㅜ
20대의 정치적 무관심이 작금의 현실에 어느 정도 일조 한건 사실이지만
그걸 전체적 요인으로 단정 짓고 비난하는 분들을 보면 좀 그르네요;;;
8,90년대 학번에 비해 2000년대 학번들은 확실히 투쟁과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 또한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그렇게 된게 아닐까요.
이전 시대에 비해선 선거제도,법률, 인터넷 등 기타 사회시스템에 있어 불합리함을 해결할
소통창구가 다양해진것도 하나의 요인이었고
더불어 사회적 분위기가 짱돌과 화염병 보다는 개개인의 개발과 복지에 초점을 맞춰가도록
유도했죠.
20대 대부분의 학생들이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도처에 사회적 불합리가 존재하는
현 시국에 일치단결하여 떨쳐일어나지 못한다하여 비난하는게 과연 옳은 일인지
의문이 됩니다.
대학생…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세대죠.
직장이나 생계에 대한 영역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너 당장 스펙쌓기니 토익이니 다 집어치우고
주2일 정도는 끝장 집회 참석해라. 그게 정의고 종국엔 너한테도 도움이 되는 길이야.”
라고 한다면….
정치인이든 시민운동가이시든 진보를 자처하시는 분들의 문제점은
언제나 뜬구름 잡는 말로 훈계하려하고 도덕적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공감까지는 이끌어낼 수 있을 지언정 행동까지 이끌어 내지 못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 말이 맞다면 홍세화에게 해주고 싶은 말
“대학생들에게 마르크스 읊어대면 불편함을 느끼니?”
왠지 김용민 선생의 경우는,
애초에 잘못 튀어나온 말(충남대 기고)을
수습하려고 한 글(한양대 기고)이 수습은커녕
논리도 없고 진정성도 없는 게 뽀록나면서
얼기설기 수습에 수습만 거듭하고 있는 모양새라,
지켜보기에 몹시 안쓰럽더군요.
“어차피 저도 단정적으로 쓴 터라 할 말이 없습니다”
결국 ‘미안하다’ ‘유감이다(=so sorry)’정도의 말로 저는 이해되는데,
이런 말은 이렇게 먼 곳의 게시판이 아니라,
애초의 단정적이면서도 수준은 미흡한 비수를 겨냥했던
이십대 당사자들에게 했어야 하는 말 아닌가요.
아니, ‘시사평론’계에선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건
하면 안 되는가 보군요. 정치판이랑 똑같이.
논거없는 비난이라고 생각이 안드시는지
아무래도 제도적 불편함을 느껴야 제도의 한계성에 관심을 갖게되어 참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현정 선생님, 저에게 메일 주소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제 메일은 [email protected]입니다.
아이코! 제 이름이 바로 보이길래 깜딱 놀랐습니다.
이메일 주소 보내드렸습니다.
아름다운백수 님>
애초 논거 없는 글이라 판단했기에 저도 논거 없는 비난 한번 해봤습니다.
(하지만 님의 말씀 듣고 보니 조금 부끄럽군요;;)
사실 김용민 선생의 두 기고에 대한, 논거 비슷한 게 있는 비난은
김용민 선생의 홈페이지 방명록에 이미 몇 자 남겼던 터라.
20대가 답 없는 것은 맞죠.
괜히 20대들 편들어줄 것 없습니다.
멍청하고 무식하고 이기적이어서 그대로 당하는 것 맞습니다.
토익책 스펙올리기에만 열중하며 사회참여를 경멸하는 역겨운 20대들.. ㅉㅉ
그래봐야 취직도 못하고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멍청한 것들..
그러면서도 정규직 노조 진보탓이나 하는 속물근성들..
촛불집회에서 당당히 자기목소리 내는 10대들의 발톱만큼이라도 따라온다면
김용민씨 같은 분이 쓴소리 하겠습니까?
일제시대나 독재정권 시대와는 달리 적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오늘날 20대가 다른 세대의 20대와 구별되는 자세를 보이는 이유라면 오늘날 10대가 (이명박 정권을 향해 뚜렷이) 보이는 움직임은 어떻게 설명이 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20대의 목소리라는 것은 환영입니다. 마치 ‘마녀’라는 환영을 만들어 얄미운 동네 사람들을 몰아붙이기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과 같습니다. 즉,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입니다. 특정한 조직의 안에서 제도적 불편함을 느껴야 그것이 정치 참여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각 조직의 불편함으로 국한시켜야지 어찌 싸잡아서 20대 목소리라고 항변을 하는지….이해가 안갑니다.
해당 방명록에 가서 님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20대’라는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켜놓고 정치 참여를 얘기하는 것 자체가 궤변같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20대’의 속성이란게 정의할 수 있어도 그것이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거 아시죠?
정의라는 것은 몇 개의 분류안에서 이루어지기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사람마다 처한 특수한 상황이 무시됩니다. 따라서 싸잡아 20대를 욕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냥 말장난에 그칠뿐이죠.
10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세요. 과연 10대들의 움직임이란게 만족할만큼 정의될 수 있는 말인가. 만족할만큼 정의한다라는 것은 10대라면 해당 정의에 동의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저는 그런말 자체가 환영이라고 보기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님의 의견이 굉장히 무의미하게 들립니다.
아름다운백수 님>
제 글 읽은 게 맞으세요? ^^;
저는 님의 댓글들이, 그래서 뭘 말하려고 하는 건지,
당최 이해가 안 되는군뇨.
저는 “이십대라는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켜놓고
정치참여를 얘기”한 적 없는데요?
(제가 지적한 건 김용민 선생의 글이 지닌 논리적 모순이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실패한 기고’였다는 얘기를 한 건데요.)
왠지 님의 댓글은 딱히 저한테 하는 말씀 같지도 않고,
한글은 한글인데, 이게 머지 지금? +.+a
20대의 목소리는 없습니다. 나의 목소리 너의 목소리 그들의 목소리만 존재합니다.
솔직히 저도 님의 말이 무슨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글을 모른다고하니 차라리 없던일로 하는게 ㅎㅎ
10대들을 아주 ‘가까이서’ 마주하는 저로서는 도무지 그들에 대한 예찬이 이해가 아니되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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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제 각자의 별로 돌아갈 일만 남은 건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