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학 산하의 단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교진추(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의 중고등학교 과학교과서 개정 청원으로 한국이 잠시 소란스럽다. 한국의 언론과 대중이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네이쳐나 사이언스 등의 유력저널에 한국과학자의 논문이 실리는 경우, 둘째, 수 조원대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기술이 개발되었을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자의 논문 조작, 표절 및 연구비 횡령 등의 악재가 터질 경우다. 첫번째 경우의 사례는 거의 매달 언론에 잠깐씩 등장하는 기사들이다. 이러한 기사들은 주로 해당 연구가 해당 분야에서 지니는 학문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해당 연구가 경제적으로 어떤 이익을 창출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며, 이런 언론의 프레임 속에서 당뇨병 발병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기능연구 발표는 당뇨병 치료제 개발에 획기적인 연구로 포장된다. 이러한 언론의 프레임이 두번째 기사들을 양산하게 된다. 하지만 두번째 사례들은 조금 더 악랄한데, 대부분 해당 기술을 개발한 사업체의 주가를 올리거나, 실질적인 기술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언론 기사의 덕으로 이익을 보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의 줄기세포 응용기술 기사들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여러 정치인들의 논문표절과 함께 과학연구의 논문조작 사례들이 세번째 경우에 속한다. 황우석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로, 황우석은 첫번째 사례로 이름을 알리고, 두번째 사례로 주가를 올렸으며, 세번째 사례로 망한 경우다. 진정 위대한 과학자라 아니할 수 없다.
교진추의 시조새 논란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위의 세가지 경우를 반추해보았을 때 한국의 과학문화에 긍정적인 청신호라고 볼 수도 있다. 평소 과학교과서나 진화론 자체에 진지하고 학문적인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이 사건을 계기로 진화론을 새롭게 각인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건 당시 전국민은 줄기세포 전문가가 되었고, 광우병 사태때는 광우병 전문가가, 천안함 사태때는 군사전문가가 되는 부가효과들을 누려온 한국사회에서, 이번 사건으로 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그닥 나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언론이 이번 사건을 소비하는 저질스런 방식에서 탈피해 건설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함을 인식하는 일이다. 특히 이번 사건이 잠시 소비되고 마는 해프닝으로 그치게 될 경우, 우리는 다시금 과학에 대한 문화적 각성의 계기를 위해 어이없는 사건을 기다려야만 하는 구조적 딜레마에 빠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조새 논란은 교진추 측의 패배로 마무리 될 듯 하다. 고생물학회를 비롯한 학회의 구성원들과, 들불처럼 퍼진 여론의 뭇매는 기독교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과 더불어 교과부에도 압력으로 작용한 듯 싶다. 하지만 우리가 이번 사건에서 진정으로 배웠어야 하는 몇가지 교훈과 이를 통해 나아가야할 바를 정책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이런 사건은 다시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이번 사건의 첫번째 교훈은 그동안 한국사회가 진화론과 같은 기초학문, 즉 당장의 경제적 이익이 되지 않는 학문들에 얼마나 무심했는가 하는 점이다. 시조새 논란이 터지자 전문가로 등장한 이들은 최재천, 전중환, 장대익과 같은 학자들이었지만, 한국사회를 통털어 진화론의 과학으로서의 건강성을 교진추에 맞서 변호할 수 있는 진화학자는 다섯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한다. 특히 이번 시조새 청원을 처음으로 인지하고 이를 네이쳐에 알린 사람들은 진화학자들이 아니라 무신론자 모임, 반기독교 운동모임 등을 주축으로 활동하던 네티즌들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을 사랑하는 네티즌들이 네이쳐에 이 사실을 알릴때까지 과학대중화의 선봉에 서 있다는 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네이쳐지라는 권위에 기대어 이 사건을 인지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교진추는 반드시 다시금 일을 벌릴 수 밖에 없다. 한국 과학의 요람이라는 카이스트에조차 뿌리를 내리고 있는 창조과학회의 위용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며, 특히 이들이 한국사회의 종교단체 중 가장 위압적인 기독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이번 사건이 단지 빙산의 일각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개인의 신앙을 넘어 창조과학을 수업에까지 끌어들이는 학자들에 대한 처벌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교수의 강의권, 학문의 자유 등에 걸친 범사회적인 사안이다. 창조과학회 구성원인 교수가 자신의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창조과학을 교육하는 문제는 결코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우리는 지난 20여년 동안 뻔히 알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채, 이들이 한국의 과학교육을 뒤흔들 정도로 방치한 셈이다. 이번 사건이 곪아터진 한국의 과학교육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특히 낡은 과학교과서의 개정에 학자들이 헌신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 언제적 시조새가 여전히 교과서에 남아 있는가. 과학교과서란 5년만 지나도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특수성을 지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 낡은 과학교과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말인가. 과학교과서의 문제만 해도 당장 한국사회의 입시과열과 사교육, 학벌과 대학서열화 문제 등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사안이 된다. 과학교과서가 주목받지 못하는 근본적인 연원에는 한국사회의 비뚤어진 교육풍토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기초학문이 무시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번 시조새 논란은 단순히 기독교 광신자들이 과학의 근간을 흔든 것이 아니다. 이번 사건의 기저에는 한국 사회의 과학에 대한 이상한 인식이 놓여 있다. 우리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드시 가르쳐야 할 진화론을 대학의 정규과목에서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진화학자들에게 연구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도킨스를 비롯한 수많은 진화론 교양도서들이 번역되고 있지만, 실제로 한국의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진화학을 연구할 수조차 없다. 즉, 시조새 사건은 한국사회가 학문을 대하는 태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아인슈타인과 다윈을 과학자의 모델로 설정하고 아이들에게 과학의 꿈을 심어주겠다면서도, 막상 그들처럼 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회, 그것이 한국 과학계의 현실이다. 스티브 잡스같은 사람이 나와야 한다면서도 프로그래머들의 처우가 어떠한지는 살펴볼 생각이 없고, 잡스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들, 예를 들어 도전하는 이들의 실패에 너그럽고, 한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은 한국 과학계의 현실과 빼닮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 사회의 과학의 수준은 그 사회의 수준을 반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초가 부실하고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한국 과학계의 수준을 규정한다. 시조새 사건은 이러한 한국사회의 총체적인 문제들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 해결도 미봉책에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가 시조새 사건을 단순히 다뤄서는 안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