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새 논란으로 한국사회가 시끄러울 때 한 권의 책이 소리소문 없이 번역되어 나왔다.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의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책이다. 아마도 이번 사건에 맞추어 번역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지만, 그런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다. 어떤 분야를 사이비과학으로 규정짓고자 할때조차 그러한 논쟁은 언제나 공허하게 회전하게 될 뿐이며, 매듭을 짖지 못하고 마무리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완결된 형태의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 한의학은 과학인가?
+ 경제학은 과학인가?
+ 초끈이론은 과학인가?
+ 정신분석은 사이비과학인가?
+ 진화심리학은 과학인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나누려는 시도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과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분분했다. 원자론을 두고 벌어진 마흐와 플랑크, 그리고 볼츠만의 논쟁사는 근대과학이 완전히 무르익었던 19세기에조차 과학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던 19세기를 지나면서 과학이 무엇인가에 관한 연구는 과학철학자들에게 넘어갔다. 마흐와 플랑크의 논쟁은 쿤과 포퍼의 논쟁으로 이어졌으며, 이들은 과학자들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특히 과학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할 전문용어들을 개발하며 과학을 정의하려 애썼다. 그러한 역사는 현대의 사이비과학에 대한 논쟁에서 언제나 포퍼와 쿤, 라카토슈와 파이어아벤트가 기본적인 참고문헌으로 등장한다는 점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과학을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많은 이들이 한의학의 비과학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양의학이 ‘과학’인 것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의학은 과학인가. 혹은 기예인가. 그렇다면 공학은 과학인가, 아니면 기예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다. 한의학의 비과학성을 지적하던 이들조차 초끈이론 앞에선 머뭇거리게 되며, 특히 진화심리학 앞에서는 또다시 머뭇거리고 만다. 이는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이 우리의 예상과는 별개로 서구에서 형성된 관념들 혹은 현재의 과학이 지니는 권위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좋은 사례다. 한의학을 신나게 비난하던 한 과학적 회의주의자는 우리의 생활을 결정짓는 경제학의 많은 법칙들이 그 어떤 과학적 근거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 주저할 수 밖에 없다. 더욱 비참한 것은, 경제학은 과학이냐 아니냐를 질문할 여지라도 있지만, 경제만큼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 그리고 이를 연구한다는 정치학의 과학성에는 질문의 여지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때다. 한의학의 비과학성을 맹렬히 비난하는 어떤 과학적 회의주의자는, 한의학보다 더욱 비참하게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정치학과 경제학의 비과학성을 보다 맹렬한 수준으로 비난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은 비판을 넘어 진지하게 ‘과학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심각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언젠가부터 한국 출판시장을 파고들고 있는 진화심리학은 어떠한가. 한국의 진화심리학자라봤자 전중환이라는 사람 한 명 뿐인데, 우리는 무척이나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에 친근함을 느낀다. 대부분의 한국대학에서 진화심리학이라는 교과목을 찾아볼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사와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그리고 인문학을 전공한다는 학자들의 논문에는 진화심리학이라는 명칭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진화심리학에 대해 논의할 기반을 마련하고 이러는 중인가. 혹은 진화심리학도 라깡이나 지젝처럼 단순히 소비되고야 마는 일회성 가쉽거리가 될 운명일 뿐인가.
피글리우치는 창조과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퍼붇는 학자임과 동시에 진화심리학의 과학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몇 안되는 진화생물학자일 것이다. 진화심리학 논문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 한국 학계에서 피글리우치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를 통해 그는 과학에 대한 나름의 몇가지 분류를 시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에서 피글리우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대가 ‘거의 과학’이라 불리는 변경지대의 학문들이다.
이러한 구분에 있어서 가장 먼저 대두되는 것이 사이비과학의 중간지대에 해당하는 ‘거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영역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기에 과학의 여왕은 물리학이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 손꼽히는 양자역학이 (의심할 바 없이 옳은) 수학 이론과 (틀림 없이 정확한) 실험결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하여는 일종의 ‘해석’을 구걸하고 있는 현실은 이 분야를 철학과 과학의 경계에 서 있게 만든다.
사회생물학에서 비롯된 가장 최근의 학문이라는 진화심리학의 경우에는 양자역학의 경우와 다르다. 진화심리학은 적응과 자연선택에 관한 가설을 검증할 다양한 수준으 가지고 있는 진화생물학과는 달리, ‘인간’이라는 제약이 많은 특이한 종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기에, 실제 있을 법하지만 “우리가 전혀 진실을 밝혀낼 수가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과학의 영역에 포함시키기 곤란하다.
이처럼 “체계적 관찰, 일반적 이론의 구성, 구체적 가설의 실증적 검증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완전히 충족하지 못하는, 과학과 사이비과학 사이의 다양한 중간지대가 존재한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중에서. 다음 블로그에서 재인용.
이 책을 언젠가는 읽게 될테지만, 피글리우치의 블로그를 오랫동안 구독하게 되면 그의 논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피글리우치가 진화심리학의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그의 블로그 여기저기에 걸쳐 있지만, <합리화에 관한 나쁜 합리화 Bad reasoning about reasoning>이라는 그의 글에 요약되어 있다 (다음 글도 참조할 만하다. Chess, psychoanalysis, evolutionary psychology and the nature of pseudoscience).
Readers of this blog and listeners to our podcast know very well that I tend to be pretty skeptical of evolutionary psychology in general. The reason isn’t because there is anything inherently wrong about thinking that (some) human behavioral traits evolved in response to natural selection. That’s just an uncontroversial consequence of standard evolutionary theory. The devil, rather, is in the details: it is next to impossible to test specific evopsych hypotheses because the crucial data are often missing. The fossil record hardly helps (if we are talking about behavior), there are precious few closely related species for comparison (and they are not at all that closely related), and the current ecological-social environment is very different from the “ERE,” the Evolutionarily Relevant Environment (which means that measuring selection on a given trait in today’s humans is pretty much irrelevant).
내 블로그의 독자들과 팟캐스트의 청취자들은 내가 일반적으로 진화심리학에 대해 아주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회의적인 이유는 진화심리학의 가정, 즉 인간의 몇몇 행동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했다는 것이 아예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가정은 진화생물학 이론의 의심할 바 없는 기초적인 명제다. 오히려 악마는 세부적인 곳에 있다. 진화심리학의 특정 가설들은 필수적인 데이터들이 자주 빠져 있기 때문에 검증할 수조차 없다는 이유에서다. 화석의 기록들은 행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별 도움이 안되며, 인류와 비교할 수 있는 근연종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고 (게다가 그들 중 몇몇은 우리와 아주 가깝지도 않으며), 현재의 생태-사회적인 환경은 진화적 생태환경(ERE)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합리화에 관한 나쁜 합리화 Bad reasoning about reasoning> 중에서
진화심리학의 연구들이 1980년대 투비와 코스미데스 이후 큰 성과를거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피를리우치의 블로그에서 지적되는 상당수의 진화심리학 논문들이 검증조차 불가능한 가설들을 과장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진화심리학이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원리가 진화론을 기반으로 하는 다른 연계학문들과 상충한다는 사실이다. 즉, 진화심리학은 진화의학과 충돌한다. 진화의학의 기본 원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생태-사회적 환경이 우리 조상들이 진화하던 홍적세의 그것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많은 질병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화심리학은 변화한 환경을 최소한으로 고려할 때만 학문 자체가 존립할 수 있다. 생태-사회 환경의 변화가 극명하고, 인간의 행동과 심리가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진화심리학이 측정한 데이터들은 폐기처분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이 이 문제를 풀고 넘어가지 않는한 영원히 논란에 휩쌓일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 어떤 진화심리학자도 이러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진화심리학이 참신하고 재미있는 것과는 별개로, 학문적 엄밀성의 문제는 해당 학문이 과학으로 자리잡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심리학과 경제학이 모두 그러한 통증을 거치며 조직화된 학문으로 성장했다. 진화생물학이 정립된 학문이라는 이유로, 진화심리학이 그 권위를 빌려올 수는 없다. 특히 그 학문이 과학을 표방하고 있을 경우엔 더욱 그렇다. 만약 진화심리학이 진화이론의 권위로만 존재하는 학문이라면, 양자역학의 권위를 빌려 장사하는 사이비과학들과의 차이를 알 수 없다. 나아가 진화심리학은 정신분석학을 비판할 정당성조차 확보할 수 없다. 분명 프로이트도 자신이 정립하고 있던 학문을 과학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은 합당한 평가를 거치며 건강해진다. 이러한 평가의 과정에서 많은 학문들이 과학이라는 경계에서 탈락하고야 만다. 정신분석학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진화심리학은 그 시험을 통과할 것인가? 아직 우리는 그 결정을 내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