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가에서 원예학자로, 그리고 크로포트킨의 생물학에 대하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류자명을 이렇게 기록한다. 1985년에 돌아가셨으니, 나와 생몰연대가 11년 겹친다. 1985년이면 내가 이제 갓 사회성을 갖추던 무렵이다. 한 사람의 긴 일생과 또 한 사람의 짧은 유년이 11년 동안 같은 지구 위에 포개져 있었다는 사실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묘한 현기증을 일으킨다. 그가 후난(湖南)의 어느 대학 관사에서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가르치고 있을 때, 나는 한국의 어느 골목에서 막 세상을 배우고 있었던 셈이다.
류자명(柳子明) 1894(고종 31)∼1985. 독립운동가·무정부주의자·원예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충경공 유량(柳亮)의 후손으로 유종근(柳種根)의 아들이다. 충청북도 충주 출생으로, 본명은 유흥식(柳興湜), 호는 우근(友槿)이며, 본명보다 ‘유자명’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 탐지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고, 나석주(羅錫疇)의 소개로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로 국내외 일본인과 친일파 처단활동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1927년 난징에서 김규식,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인도인 간다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였다. 무정부주의를 견지하여 조선혁명자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입달학원(立達學院)에서 강의했고, 1930년 상해 강만의 농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1942년 약헌개정기초위원,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했다. 윈난(雲南)고원지대에서 최초로 특수벼 재배에 성공하여 농학박사가 되었고, 특히 독립운동가 출신 원예학자로 중국인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만년에는 후난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자 서동일)
한 줄의 사전 항목 안에서, “독립운동가·무정부주의자·원예학자”라는 세 단어가 아무렇지 않게 나란히 놓여 있다. 폭탄과 권총의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 어떻게 포도와 벼의 세계로 건너갔는가. 아니, 그 둘은 정말 건너야 할 만큼 멀리 떨어진 세계였는가.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후난농업대학 캠퍼스에는 지금도 그의 흉상이 서 있다. 기단에 새겨진 비문은 한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네 개의 국가와 두 개의 직업을 동원한다. 대한민국 국적의 국제 우인(友人), 충청북도 충주 출생, 후난농업대학 교수, 저명한 원예학자, 한국의 독립운동가, 북한으로부터 3급 국기훈장을 받은 사람. 그의 90여 년 일생에는 독립운동과 원예학, 남한과 북한, 한국과 중국, 신중국과 중화민국, 아나키즘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마오쩌둥과 김일성과 김원봉과 김구라는, 서로 상반되거나 이질적인 요소들이 한데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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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세 축을 이루는 사상이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나머지 한 축으로서의 아나키즘이, 한국 독립운동사를 사상사적으로 접근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세 좌표다. 류자명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는 매우 흔하지만, 현대의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종(種)의 인간 — 아나키스트였다. 독립운동사에서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오장환은 이렇게 단언한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논하면서 아나키즘운동을 배제하는 것은, 삼국시대를 논하면서 가야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 또 아나키즘운동을 논하면서 유자명을 빠트릴 수가 없다. 그만큼 유자명은 아나키즘운동에서 이론적·실천적으로 탁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자명은 일반인에게는 낯선 인물이다. 아직 이 시기의 아나키즘운동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 오장환, 「[인물바로보기 3] 시대를 앞서 간 혁명가 유자명」, 『내일을 여는 역사』
한국의 아나키즘은 그 기원에서부터 독특한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유럽에서 아나키즘이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태어났다면, 한국의 아나키즘은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족의 열정 속에서 받아들여졌다. 역사학자 황동연은 그 이중의 맥락을 이렇게 정리한다.
한국 아나키즘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자본주의의 한 대안으로 유럽에서 아나키즘이 대두했던 과정과는 요인과 맥락이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민족의 독립을 탈환하기 위한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 열정이, 해외 — 특히 중국과 일본 — 에 있던 급진적 한인 지식인과 유학생, 망명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아나키즘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 많은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을 수용한 후 단지 독립 쟁취나 새로운 근대 국민국가 건설만이 아닌 급진적 사회혁명을 지향했다. 그들은 아나키즘이 제기한 세계주의적이고 초국가주의적인 지향에 대한 공감을 통해, 탈식민지화·독립이라는 민족의 지상과제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지배하에서 생성된 전지구적 문제의 일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그들은 민족문제의 해결과 세계문제의 해결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고, 민족문제의 해결을 곧 세계문제의 해결을 향한 첫 발걸음으로 보았다.
— 황동연, 「이정규, 초국가주의적 한국 아나키즘의 실현을 위하여」, 『역사비평』(2010)
류자명의 이력은 이 초국가적 아나키즘의 거의 완벽한 표본이다.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충주 공립간이농업학교의 교원이 된 청년 교사는, 1919년 3월 제자들과 만세시위를 준비하다 발각되자 서울로 피신했고, 곧 상하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의정원의 충청북도 의원이 되었고, 베이징으로 가 신채호·이회영과 어울렸으며, 톈진에서 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했다. 1922년 의열단에 가입했고, 1924년에는 재중국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1925년 일제 밀정 김달하를 처단했고, 1927년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했다. 이 연합회는 한국인·중국인·인도인이 함께 만든 반제국주의 연대 조직으로, 기관지 《동방민족》을 한국어·중국어·영어 세 언어로 펴냈다. 한 세기 전, 식민지 출신 망명객들이 세 언어로 잡지를 찍어 아시아의 피압박민족을 한데 묶으려 했다는 사실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서늘하다.
그리고 의열단의 그 유명한 격문 —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 — 은, 다름 아닌 류자명이 부탁하여 신채호가 집필한 것이다. 한국 근대 산문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 선언문의 그늘에 류자명의 청탁이 있었다. 그는 단지 폭탄을 나르는 행동대원이 아니라, 운동의 사상을 설계하는 일급 참모였다. 그가 1930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발표한 아나키스트 운동의 강령에는, 그가 꿈꾼 연합의 형태가 또렷이 드러난다.
본 연맹은 주의나 사상이 각이한 단체들이 자기의 입장과 조직을 확보하면서 공동한 강령에 따라 실행하는 연합적인 조직이다. 연합전선(聯合戰線)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맹을 절대 조선혁명대중의 머리 위에 군림한 지도단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 우리는 이러한 통일전선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투쟁에서나, 미래 독립되고 자유롭고 행복한 국가를 건립할 때에나, 모두 여러 당파의 공동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 「불멸의 발자취(59) — 무정부주의자 류자명」
머리 위에 군림하는 지도단체를 거부하는 통일전선.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공동노력. 이것이 아나키스트의 연합이다. 그리고 이 발상이 어디서 왔는지를 따라가면, 뜻밖에도 한 권의 생물학 책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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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명은 망명 직후 한 스승에게서 공산주의를 배웠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의 학설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크로포트킨의 저작을 통독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나는 이 선택을, 생물학자로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한 정파의 갈아탐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관한 하나의 과학적 가설을 받아들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표트르 크로포트킨(1842–1921)은 러시아 귀족 출신의 혁명가였지만, 동시에 진지한 지리학자이자 박물학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 시베리아를 누비며 수많은 동물 군집을 관찰했고, 그 관찰을 바탕으로 1902년 《상호부조론(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을 썼다. 당시 서구의 지적 풍토는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이 지배하고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자본주의 경쟁의 자연법칙적 알리바이로 둔갑해 있었고, 자연은 이빨과 발톱으로 붉게 물든 검투장으로 그려졌다. 크로포트킨은 정면으로 반박했다. 같은 종 내부에서는 싸움과 몰살에 상응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부양과 보호와 협동이 작동하며, 상호부조하는 종이야말로 진화에서 살아남아 더 번성한다고. 협동은 경쟁만큼이나 실재하는 진화의 동력이며, 어쩌면 더 결정적인 동력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과학이었고, 그 과학 위에서 비로소 국가 없는 상호부조의 사회가 공상이 아니라 자연의 연장으로 정당화되었다.

이 사상을 한국 아나키스트들에게 들여온 사람이 바로 신채호다. 한국에서 크로포트킨은 20세기 초 신채호를 통해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조선혁명선언〉이 노래하는 민중의 직접혁명, 파괴와 건설의 변증법 밑바닥에는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크로포트킨의 확신이 흐른다. 류자명이 마르크스 대신 크로포트킨을 택했다는 것은, 그가 받아들인 혁명에 이미 한 편의 생명 이론이 내장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상호부조는 자연법칙이다 — 따라서 인간은 서로를 도울 수 있고, 도와야 하며, 국가의 강제 없이도 그렇게 살 수 있다.
여기에 잊을 수 없는 각주 하나를 덧붙여야겠다. 류자명에게는 60년을 함께한 중국인 벗이 있었다. 루쉰에 버금가는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바진(巴金)이다. 그 필명은 우연이 아니다. 바진의 ‘巴’는 아나키스트 바쿠닌(巴枯寧)에서, ‘金’은 크로포트킨(克魯泡特金)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 최고의 소설가가 제 이름 두 글자에 두 사람의 아나키스트를 새겨 넣은 것이다. 1936년 바진은 단편소설 한 편을 썼는데, 그 주인공의 모델이 류자명이었다. 여러 언어를 말하고 여러 무기를 지니고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예사였던 조선인 혁명가, 한때 젊음과 활력으로 가득했던 머리가 어느새 희끗희끗 세어버린 망명객 — 그 백발의 초상이 1930년대 류자명의 자화상이었다. 두 아나키스트는 60년 동안 우정을 나누었고, 크로포트킨의 이름은 한 사람의 필명 속에, 다른 한 사람의 신념 속에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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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류자명은 30여 년의 망명을 끝내려 했다. 타이완을 떠나 부산행 배를 타려고 홍콩에 도착한 바로 그날, 한국전쟁이 터졌다. 배편은 끊겼다. 고향을 코앞에 두고 그는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마침 사정을 알게 된 후난성이 그를 교수로 초빙했고, 그는 후난대학을 거쳐 후난농업대학 창설에 참여한 뒤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후 그의 삶은 온전히 원예학자의 것이었다. 그는 강남(江南) 지역의 포도 재배 기술을 개량했고, 중국에서 재배되는 벼의 기원을 연구했으며, 창사 인근 마왕퇴(馬王堆) 한묘에서 출토된 2천 년 전의 재배식물을 고증했다. 나는 이 마지막 대목 앞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다. 한때 밀정을 처단하던 손이, 말년에는 2천 년 전 무덤에서 나온 씨앗을 들여다보며 그것이 무슨 작물인지를 판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폭탄의 시간에서 종자(種子)의 시간으로. 중국 농학회는 그에게 표창장을 수여했고, 후난성은 그를 “후난 과학기술의 별”로 선정했다. 중국인들은 그를 “인민의 좋은 친구(好朋友)”라 불렀다. 중국에서 그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농학자로 평가받는다.
우리는 흔히 혁명가와 과학자를 반대편에 세운다. 한쪽은 부수는 사람, 다른 쪽은 참을성 있게 쌓아 올리는 사람. 그러나 류자명에게 그 둘은 한 사람이었고, 어쩌면 크로포트킨이 그 이유를 미리 말해 두었다. 당신의 정치가 “생명은 서로 도우며 번성한다”는 확신 위에 서 있다면, 생명을 기르는 일 — 곡식을 키우고, 사람과 식물이 함께 잘 살도록 돕는 일 — 은 혁명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수단으로 이어가는 혁명이다. 국경을 넘나들며 무기를 지녔던 사람이 낯선 땅에서 포도 덩굴이 열매 맺도록 어르고 있었던 것은, 변절도 은퇴도 아니었다. 상호부조라는 한 문장을, 그는 정치에서 외치다가 흙에서 실천한 것뿐이다.
물론 생물학자로서 나는 정직해야 한다. 크로포트킨은 자기 주장을 분명히 과장했다. 오늘의 진화생물학은 협동이 경쟁을 이긴다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다. 둘 다 실재하며, 혈연선택과 호혜성, 공생과 포괄적합도라는 복잡한 셈법 속에서 얽혀 있다고 말한다. 자연은 스펜서의 검투장도 아니고 크로포트킨의 코뮌도 아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의 핵심 이단(異端) — 협동은 감상적 허구가 아니라 자연에 실재하는 힘이라는 주장 — 은 대체로 살아남았다. 내가 평생 들여다본 초파리조차 그렇게 가르친다. 한 마리의 작은 파리는 결코 외톨이 기계가 아니다. 녀석들은 먹이 위에 무리를 짓고, 서로의 행동을 보고 배우며, 신호를 주고받고, 함께 알을 낳는다. 가장 단순해 보이는 생명의 몸 안에도 ‘함께 사는 일’의 회로가 새겨져 있다. 생명은, 정말로, 어느 정도는 서로 돕는다. 류자명은 그 사실을 이론으로 믿었고 과수원에서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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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명은 남한과 북한과 중국, 세 나라 모두에서 훈장을 받은 유일한 한국인이다. 대한민국은 1968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북한은 1978년 베이징의 대사관에서 3급 국기훈장을 수여했으며, 중국은 그를 인민의 친구로 기렸다. 세 나라가 한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그러나 정작 그는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다.
망명을 떠나올 때 고향에는 이미 두 아들이 있었다. 마흔을 바라보던 무렵, 귀국을 기약할 수 없는 망명 생활 속에서 그는 중국 여인과 다시 혼인했다. 혈육의 인연은 쉽게 털어낼 수 없는 법이고, 분단된 조국은 그에게 단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했다. 사상으로는 북에 가까웠으나, 고향과 가족은 남에 있었다. 그의 90세 잔치가 CCTV로 방영되고 나서야 비로소 고향의 가족은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명절이 되면 그는 혼자 조용히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남북이 민족대단결회의를 열게 되면 나도 돌아가 참가하고 싶다”고 그는 편지에 썼고, 다른 글에서는 “하늘에 달이 두 개”인 것을 탄식했다.
하늘에 달이 두 개. 국경 없는 세계를 꿈꾸던 아나키스트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국경 가운데 하나인 휴전선에 의해 끝내 둘로 찢겼다. 국가 자체를 부정했던 사람의 깊은 곳에 마침내 ‘고향 나라’만 또렷이 남고 ‘국가’는 희미했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사상이 옳았다는 가장 슬픈 증거인지도 모른다. 그는 두 개의 달 아래에서, 어느 쪽 달에도 가닿지 못한 채 늙어갔다. 2002년, 마침내 그의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한국인 부인과 중국인 부인이 그 곁에 함께 누웠다. 살아생전 하나일 수 없었던 것들이, 죽어서야 한자리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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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11년으로 돌아간다. 한 세기 전, 한 한국인 생물학자가 중국 땅을 떠돌며 포도와 벼를 길렀다. 그리고 지금, 또 한 사람의 한국인 생물학자가 같은 중국 땅에서 초파리를 기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가 종자를 다루던 손과 내가 파리병을 흔드는 손 사이에는 백 년의 거리가 있지만, 어떤 선(線)은 그렇게 쉽게 끊기지 않는다. 식민과 분단과 망명이 한 과학자를 어떻게 평생 떠돌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과학이 어떻게 한 사람을 끝까지 인간으로 붙들어 줄 수 있는지를, 류자명은 자신의 90년으로 증언한다.
그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세계의 시민이기를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은 과학자의 초상이다. 그에게 과학과 해방은 끝내 같은 기획이었다. 국경을 넘어 피압박민족을 연대시키려던 청년과, 국경을 넘어 작물과 지식을 나누던 노학자는 같은 사람이었다. 논문이 지표로 환산되고 과학이 다시 국가의 깃발 아래로 호명되는 이 시대에, 류자명의 일생은 조용한 질책이자 조용한 희망이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그는 그것을 정치에서 믿었고, 실험실과 과수원에서 증명했으며, 두 개의 달 아래에서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끝까지 지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