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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을 위한 용기

얼마전 페이스북에서 한 작가가 꽤 유명한 베스트셀러를 저격하며 자신의 책을 버젓이 베끼고도 인용하지 않았다고 폭로하는걸 봤다. 기억이 희미해서 찾을 수는 없지만, 아마 한국의 인문사회학계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 출판시장에서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면 꼭 찾아가야 한다는 모 인플루언서는 분명히 석사논문 표절로 잠적했던 인물이었는데, 무려 독서와 책을 홍보하는 유튜브로 한국에서 꽤나 유명한 명사로 소개된다. 하긴 석사논문을 표절한 이가 야당 대표로 버젓이 활동하고, Yuji 박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이 영부인으로 활동하는 나라이니, 남의 글과 책을 제대로 인용하는 이들이 바보가 되는 세상일 것이다.

한글로 된 책을 꽤 여러권 출판했고, 한글로 된 논문도 한 두편 출판했으며, 영어로 된 학술논문 출판을 업으로 삼고 있는 학자로 살면서, 공정한 인용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과학논문에서 인용이란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논거를 강화하는 작업이라, 인용 때문에 논문이 게재거부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인용이 학술활동의 거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인용의 문제가 대부분 학자적 양심에 맡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안다. 즉, 분명히 인터넷의 어떤 글에서 영감을 받았으면서도, 인용을 하지 않거나 다른 유명논문을 슬쩍 인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것이란 뜻이다.

책을 쓰면서, 최대한 내가 참고한 논문과 책 모두를 인용하려고 애썼다. 내 책의 미주는 그런 논문과 책들의 리스트로 가득하다. 덕분에 출판사 편집자는 피곤했고, 미주를 빼자는 제안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모든 참고문헌을 인용해야 한다는 내 고집은 아무도 꺽지 못했다. 신문사 칼럼처럼 참고문헌 인용이 제한된 글을 제외하면, 내가 인터넷에 쓴 모든 글엔 참고문헌이 달려있다. 그건 내 공부의 기록이자, 내가 쓴 글이 다른 이들의 학문적 노고에 기대고 있음을 의미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나아가 내가 인용하기 꺼리는 이들의 글이라도, 인용의 가치가 있다면 반드시 인용했고, 특히 출판되지 않았어도 글의 아이디어가 그와의 대화와 토론에 상당히 빚지고 있다면 글의 중간 혹은 각주에 이를 표시하는걸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책의 여기저기엔 착한왕 이상하 박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건 내가 그에게 배운 과학철학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다. 심지어 내가 더이상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지 않는다해도 말이다.

이젠 한국어로 쓰는 글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지난 20여년간 내가 과학과 사회 그리고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대해 인터넷에 써놓은 글의 양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양이다. 그 중 대부분이 아직도 책으로 출판되지 않았으니, 누군가는 네이버블로그나 게시판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 글의 아이디어를 가져다 쓰면서 내 이름을 인용하지 않는 일도 잦을 것이다. 실제로 가끔 인터넷에서 내 아이디어를 거의 도용한 것으로 보이는 과학에세이들이 눈에 띄지만, 그들 중에 내 글을 제대로 인용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먼저 생각해냈다는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수십억의 인구가 사는 지구에서,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생각이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부질 없는 욕망으로부터 부실인용과 논문표절이 시작된다. 타인의 글을 정확히 인용하는 일은, 사실상 인문학의 시작이자 끝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엔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 글을 읽고 마음 한 곳이 찔리는 사람이 있길 바란다. 바로 그 사람에게 굳이 한마디 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렸기 때문이다. 다시 초파리와 꿀벌의 세계를 공부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