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Flyandbee, 김우재 (2014-)

“가성비의 과학” — 오픈액세스는 어떻게 지식의 민주화를 배신했는가

나는 초파리를 연구한다

나는 초파리 행동유전학자다. 몸길이 2-3밀리미터, 일주일이면 한 세대를 갈아치우는 이 작은 곤충을 데리고 유전자 하나의 기능을 밝히는 데 어떤 때는 몇 해가 걸린다. 수천 마리를 교배하고, 수만 번을 세고, 새벽의 현미경 앞에서 눈이 멀어가며 얻는 것은 고작 데이터 몇 줄이다. 그 지루하고 고독한 노동의 끝에 한 편의 논문이 출판되고, 그 논문은 다른 누군가의 실험 위에 한 장의 벽돌처럼 쌓인다. 과학이란 그렇게 벽돌을 한 장씩 올리며 지식의 탑을 세우는 일이다. 뉴턴이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다”고 말했을 때, 그 거인은 바로 앞서간 동료들이 쌓아 올린 정직한 벽돌의 더미였다.

그런데 2026년 2월, 그 거인의 어깨가 실은 모래 위에 세워진 누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세계 최대의 연구기관, 100여 개 연구소와 5만 명에 가까운 연구자를 거느린 중국과학원(CAS)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셀 리포츠》를 비롯한 30여 개 고가 오픈액세스 저널에 대해 더 이상 논문처리비(APC)를 지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이언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 정책은 2026년 3월 1일부터 시행되며, 자체 예산뿐 아니라 과학기술부와 국가자연과학기금에서 나오는 중앙정부 자금에도 적용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명분이다. 중국과학원이 이 저널들에 등을 돌린 이유는 그것들이 부실하거나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 ‘가성비(性价比)’였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의 APC는 7,350달러, 《셀 리포츠》는 5,790달러, 《사이언스 어드밴시스》는 5,450달러. 본지인 《네이처》에 골드 오픈액세스로 논문을 실으려면 1만2천 달러, 우리 돈으로 1,200만 원이 넘는 돈을 내야 한다. 논문 한 편을 ‘모두에게 공개’하는 대가가 신입 연구원의 몇 달치 월급인 셈이다. 산하 연구소로 내려간 내부 공문은 이 정책의 목적을 “학술출판 관리의 최적화, 게재료 지출의 합리적 통제, 연구비 사용 효율의 제고”라고 건조하게 적었다. 효율. 가성비. 과학의 가장 권위 있다는 저널들을 평가하는 언어가 어느새 회계사의 언어가 된 것이다.

이것은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중국과학원은 이미 몇 해 전부터 해마다 ‘국제저널 예경고 명단(预警名单)’을 발표해왔다. 2020년 65개 저널로 시작한 이 명단은, 2025년판에 이르러 위험 등급 구분마저 없애고 두 개의 축으로 단순해졌다. 하나는 인용 조작과 논문공장 같은 노골적 연구부정이고, 다른 하나는 — 바로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 ‘자국의 학술 성과가 세계로 퍼지는 것을 가로막거나 출판 비용이 비효율적인’ 저널이다. 사기 저널과 ‘비싸기만 한 정직한 저널’이 같은 경고 명단에 나란히 오른 것이다.

규모를 보면 이 결정의 무게가 실감 난다. 웹 오브 사이언스 집계에 따르면 2025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실린 논문의 약 10퍼센트가 중국과학원 소속, 약 40퍼센트가 중국 기관 소속이었다. 중국 학자들은 2024년 한 해에만 31만 편이 넘는 오픈액세스 논문을 출판해 전 세계 오픈액세스의 약 3분의 1을 차지했고, 그 대가로 9억 달러가 넘는 게재료를 지불했다. 평균 게재료는 편당 3천 달러를 넘어섰다. 세계에서 논문을 가장 많이 찍어내는 나라가, 그 논문값의 청구서를 더 이상 감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때 우리는 영향력지수(IF)의 노예였다. 이제 우리는 APC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이 두 노예제 사이에는 ‘오픈액세스’라는, 한때 과학의 해방을 약속했던 아름다운 단어가 놓여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그 약속이 어떻게 배신으로 끝났는지, 그리고 그 배신이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과학의 필연적 귀결이었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파괴적 혁신이라는 이름의 청구서

오픈액세스는 혁명으로 시작되었다. 2000년대 초, 부다페스트와 베를린에서 학자들은 선언했다. 세금으로 생산된 지식이 어째서 페이월 뒤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연구는 인류의 공유재이며,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옳은 말이었다. 경영학자 헤이든 알라하르는 2017년 《기술혁신경영리뷰》에서 이 흐름을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식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으로 규정했다. 350년 동안 군림해온 학술출판 산업이 인터넷 기술 앞에서 격변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혁명에 대해 이제 물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파괴되었는가. 정직하게 답하면, 파괴된 것은 착취의 구조가 아니라 착취의 방향뿐이었다. 과거에 출판사는 독자에게 구독료를 받아 돈을 벌었다. 오픈액세스 이후, 출판사는 저자에게 게재료를 받아 돈을 번다. 읽는 자에게서 쓰는 자에게로, 청구서의 수신인만 바뀌었을 뿐 청구서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청구서는 오히려 더 두툼해졌다.

숫자가 증언한다. 정보과학자 스테파니 하우스타인 연구팀이 2024년에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가 오픈액세스 게재료로 지출한 돈은 2019년 9억 1천만 달러에서 2023년 25억 4천만 달러로, 단 4년 만에 거의 세 배로 불어났다. 2023년 한 해에만 MDPI가 6억 8천만 달러, 엘스비어가 5억 8천만 달러, 스프링거 네이처가 5억 5천만 달러를 게재료로 벌어들였다. NIH가 직접 계산한 전 세계 평균 APC가 1,236달러라는 점을 떠올리면, 앞서 본 5천, 1만 달러짜리 저널들이 어떤 폭리를 취하고 있는지가 선명해진다.

이 폭리의 정점에 출판 과점 자본이 있다. 엘스비어의 모회사 RELX는 2024년 과학·기술·의학 부문에서 30억 5천만 파운드의 매출을 올리며 38.4퍼센트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38.4퍼센트. 같은 해 구글의 영업이익률이 21퍼센트, 애플이 25퍼센트 안팎이었다. 다시 말해 학술출판은 인류가 만든 가장 거대한 빅테크 기업들보다 더 돈이 되는 장사다. RELX는 주주들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자사의 성장이 “특히 게재료 부문에서 투고량이 늘어난 덕분”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출판사가 이윤을 늘리는 길은 명료하다. 더 많은 논문을 찍어내는 것. 그리고 더 많이 찍어낼수록 한 편당 심사의 밀도는 옅어진다. 품질과 이윤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 구조야말로, 뒤에서 보게 될 모든 재앙의 씨앗이다.

이 구조의 잔혹함은 그 회계장부에 있다. 연구비를 대는 것은 납세자다. 논문을 쓰는 것은 학자다. 그 논문을 무료로 심사하는 것도 학자다. 편집위원으로 이름을 빌려주는 것도 학자다. 출판사가 하는 일이라곤 PDF에 자기 로고를 박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PDF를 읽기 위해, 혹은 그 PDF를 공개하기 위해, 대학과 연구자는 다시 한번 돈을 낸다. 납세자가 두 번, 세 번 같은 지식의 값을 치르는 이 ‘이중 착취(double dipping)’야말로 오픈액세스가 가져온 진짜 ‘혁신’이었다. 지식의 민주화는, 알고 보니 지불 능력의 위계화였다.

그래서 일찍이 이 위험을 경고한 이들이 있었다. 야생동물학자 H. C. 로메스버그는 2016년 《야생동물관리저널》에 「오픈액세스 저널 출판이 어떻게 과학을 위협하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글을 실어, 게재료 모델이 거짓 발견으로 과학을 오염시킬 만큼 심사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그의 결론은 단호했다 — 학회가 운영하는 저널에 내는 것이 거의 언제나 최선이고, 상업 저널은 그만 못하며, 게재료로 돌아가는 오픈액세스 저널에 내는 것은 대개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강경론은 출판계에서 적잖은 반론에 부딪힌 소수 의견이다. 그러나 10년 전의 이 경고가 오늘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우리는 곧 숫자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약탈적이라는 낙인과 주변부의 과학

오픈액세스의 어두운 그늘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약탈적 저널(predatory journal)’이라는 말을 꺼낸다. 돈만 내면 심사도 없이 논문을 실어주는 가짜 저널들, 초보 연구자에게 스팸 메일을 뿌리는 사기꾼들. 이 말을 만든 것은 2010년 콜로라도대학교 사서 제프리 빌이었다. 그는 블로그에 ‘약탈적’ 출판사 목록을 올렸고, 한때 그 명단은 천 개에 가까운 출판사로 불어났다. 전 세계 도서관과 연구자들이 그 목록을 경전처럼 인용했다.

그러나 2017년 1월, 빌은 그 블로그를 통째로 내려버렸다. 그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소속 대학의 거센 압력과 신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명단이 처음부터 깊은 편향을 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빌은 오픈액세스 운동 자체를 “반기업적이고 억압적인 운동”이라 부르며 적대했고, 그의 칼날은 유독 개발도상국의 작은 출판사들을 겨냥했다. 프란치셰크 크라프치크와 에마누엘 쿨치츠키가 2021년 280편의 문헌을 분석한 연구에서 밝혔듯, 빌의 목록은 일부 부실 저널의 문제를 오픈액세스 운동 전체의 문제로 과잉일반화했고, 그 결과 학계에는 오픈액세스 자체에 대한 부당한 편견이 자리 잡았다.

파키스탄의 연구자 아미르 메몬은 2019년 《대한의학회지》에 더 도발적인 주장을 실었다. 그는 ‘약탈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확한 ‘오칭(misnomer)’이라고 단언했다. 이 낙인은 제3세계의 저질 저널과, 의도적으로 사기를 치는 ‘기만적’ 저널을 구별하지 못한 채 뭉뚱그려 버린다는 것이다. 한때 자신도 그런 저널의 피해자였다고 고백한 그는, 더 엄밀하고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실제로 2020년 한 체계적 검토는, 인터넷에 떠도는 약탈적 저널 판별 체크리스트 가운데 근거에 기반한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3퍼센트에 불과하며 빌의 목록조차 그 안에 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가 경전처럼 인용해온 블랙리스트의 토대가, 정작 과학적 근거에서는 그토록 부실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약탈적 출판이 허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비요른 셴과 비요크가 2015년 《BMC 메디신》에서 추산한 바에 따르면, 약탈적 저널이 찍어낸 논문은 2010년 5만 3천 편에서 2014년 약 42만 편으로 폭증했고, 이를 발행한 활성 저널은 8천 개에 달했다. 그 저자의 3분의 2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다만 이 42만 편이라는 숫자는 과대추정이라는 반론도 있으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핵심은 규모가 아니라 분포다. 약탈적 출판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주변부에 몰려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인류학자 키어스틴 벨이다. 그는 2017년 《tripleC》에 실은 글에서, 약탈적 저널을 ‘포식자’가 아니라 ‘패러디’로 읽자고 제안했다. 이 가짜 저널들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합법적인’ 저널인가. 누가 그것을 정의하는가. 벨이 보기에 우리가 정작 비판해야 할 것은 사기꾼 저널이 아니라, 지식 생산을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적 맥락, 그리고 그 맥락이 어떻게 ‘중심부’의 학문을 특권화하고 ‘주변부’의 학문을 배제하는가 하는 권력 구조다. 1만2천 달러를 받는 《네이처》는 ‘합법’이고, 200달러를 받는 나이지리아의 작은 저널은 ‘약탈적’이라는 이 구분선은, 과연 학문의 질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누가 권력을 쥐었는가에 관한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다. 아르멘 가스파리얀 연구팀이 2017년 같은 학회지에서 경고했듯, 약탈적 출판의 진짜 표적은 언제나 ‘비주류 과학’이었다. 초보 연구자, 변방 국가의 학자, 급성장하는 신생 분야. 약탈적 권유 메일은 정확히 이들의 절박함을 노린다. 그러니 ‘약탈적’이라는 낙인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사기를 솎아내는 칼인 동시에, 중심부가 주변부를 통제하고 배제하는 칼이기도 하다.

나는 몇 해 전 태국의 과학을 들여다보며 작은 희망을 보았다. 그들은 생물학을 서구의 논문 게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식품과 농업이라는 자신들의 필요를 통해, 생물학을 주체적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인도의 학자 리나와 지반이 2022년 《커런트 사이언스》에서 약탈적 저널에 맞서는 길로 ‘자국의 양질의 저널을 육성하자’고 제안한 것도 같은 통찰이다. 진짜 대안은 더 정교한 블랙리스트가 아니다. ‘각자의 과학’, 즉 주변부가 스스로 통제하는 주체적 학술 생태계다.

가짜가 진짜를 추월하는 속도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지금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는 데 있다. 오픈액세스와 게재료가 만든 ‘물량의 경제’는 마침내 과학의 신뢰 자체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2025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리스 리처드슨 연구팀의 분석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들이 추적한 3만 2천여 편의 의심 논문 데이터에 따르면, 논문공장(paper mill)에서 쏟아지는 의심스러운 산출물은 약 1.5년마다 두 배로 늘어나는 반면, 정상적인 전체 논문은 15년마다 두 배로 늘어난다. 가짜가 진짜보다 열 배 빠르게 증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 끔찍한 것은, 저자들의 추정상 이 논문공장 산출물 가운데 약 네 편 중 한 편만이 끝내 철회되리라는 점이다. 나머지 75퍼센트는 영원히 ‘정상 논문’의 탈을 쓰고 우리 지식의 탑 속에 박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인공지능이 기름을 붓는다. 2025년 《랜싯》에 발표된 한 분석은 250만 편의 의생명 논문을 전수 검증해, 존재하지도 않는 가짜 참고문헌이 2023년 1만 편당 4개에서 2026년 57개로 12배 폭증했음을 보여주었다. 이 폭증의 시점은 정확히 생성형 AI 작문 도구가 보급된 시점과 겹친다. AI가 자기가 투고된 저널에 실린 적도 없는 논문을 스스로 지어내 인용한 것이다.

이 둘을 합치면 악몽 같은 그림이 완성된다. 논문공장이 가짜 논문을 오픈액세스로 출판한다.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으니, 그 가짜 논문은 고스란히 AI의 훈련 데이터로 흡수된다. 오염된 AI는 더 그럴듯한 가짜 참조와 가짜 논문을 생성하고, 그것이 다시 오픈액세스로 출판되어 다음 세대 AI를 오염시킨다. 가짜 지식이 스스로를 복제하는 무한 루프. 정직한 벽돌을 쌓아 올린 거인의 어깨가, 안에서부터 곰팡이처럼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

위기의 절정을 보여준 사건이 힌다위(Hindawi) 스캔들이다. 출판 거인 와일리는 2021년 1월 이집트의 오픈액세스 출판사 힌다위를 2억 9,800만 달러에 사들였다. 그러나 이 회사의 ‘특수호(special issue)’ 시스템은 논문공장이 조직적으로 침투하기에 완벽한 통로였다. 가짜 객원편집자와 가짜 심사자가 검토 과정을 장악했고, 결국 2년 사이에 1만 1,300편이 넘는 논문이 철회되었다. 2023년 한 해에만 8천 편 이상이 철회되었는데, 이는 단일 연도에 전 세계 모든 출판사가 철회한 논문을 합친 것보다 많은, 사상 최대 규모였다. 와일리는 2024년 5월 19개 저널을 통째로 폐간했고, 경영진은 이 사태로 인한 누적 손실을 3,500만에서 4천만 달러로 추산했다. 그러나 힌다위는 예외가 아니라 전조였다. 500개에 가까운 저널을 거느린 MDPI, 그리고 프런티어스 같은 거대 오픈액세스 출판사들 역시 특수호를 남발하는 동일한 사업 모델 위에 서 있다. 같은 구조는 같은 취약성을 낳는다.

이것은 오픈액세스의 우발적 사고가 아니다. 이것은 ‘많이 출판할수록 돈을 버는’ 게재료 모델과 ‘많이 출판해야 살아남는’ 평가 체제가 결합했을 때 나오는 논리적 산물이다. 학문 생태계의 심전도(EKG)가 평평해지고 있다. 심전도가 평평해지면, 그것은 심장이 멈췄다는 뜻이다.

과학은 이데올로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답은 단순하다. 논문이 더 이상 진리를 기록하는 매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화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향력지수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신성한 진리의 척도가 아니라, 클래리베이트라는 민간 회사가 만들어 파는 상품일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생물학자들은 그 숫자를 향해 질주하는 경마장의 경주마가 되었다. 셀, 네이처, 사이언스. 이른바 CNS에 논문을 실으면 장원급제라도 한 듯 추앙받고, 그러지 못하면 연구비도 자리도 잃는다. 장사꾼이 이윤으로 말하고 가수가 노래로 말하듯 과학자는 논문으로 말한다지만, 지금의 과학자는 논문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논문에 팔려가고 있다.

그 천박함의 극단을 우리는 ‘학술용병’에서 본다. 강의실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외국인 교수가 6년 동안 496편의 논문을 어느 대학 소속으로 발표한 사례가 있었다. 대학의 순위는 올랐다. 그러나 인류의 지식은 단 한 조각도 쌓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또 어떤가. 뉴스타파가 고발한 와셋(WASET)과 오믹스(OMICS) 같은 부실 학회·저널에 수천 명의 한국 과학기술자가 드나들었고, 지도층은 그것을 제 자녀의 스펙 세탁에 악용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연구자들은 수천억 원의 국민 세금을 약탈적 학술지에 갖다 바치고 있다. 뒤탈을 두려워하고 책임지기를 거부하는 관료주의가, 박정희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발전주의의 성과 강박이, 이 모든 것을 묵인하고 부추긴다.

여기서 나는 화학자 여경구의 오래된 명제를 떠올린다. 자연과학은 철학이나 예술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 서 있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 인민과 분리되고 이데올로기와 분리되어서는 결코 존립할 수 없다는 것. 반세기 전의 이 통찰은 오늘 오픈액세스의 위기 앞에서 다시 날카로워진다. 오픈액세스의 문제는 결코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경제의 문제다. 누가 지식을 소유하는가, 누가 그 값을 매기는가, 누가 출판할 자격을 갖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심사 시스템을 개선하자’거나 ‘AI 탐지 도구를 도입하자’고 말하는 것은, 무너지는 둑 앞에서 페인트칠을 논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위기는 과학자에게 정치적 책무를 묻는다. 초파리 유전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허먼 멀러가 우생학과 핵무기에 맞서 평생 공적 논쟁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오늘의 과학자도 실험실의 무균실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 과학기술은 넘쳐나는데 과학이 없는 나라,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학자가 자신이 발 딛고 선 출판 체제의 정치경제를 외면하는 한, 그는 자기 노동의 산물이 누구의 주머니로 흘러가는지조차 모르는 채 경주마로 늙어갈 것이다.

바꾸거나,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거나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11년 카자흐스탄의 한 대학원생 알렉산드라 엘바키얀이 만든 사이허브(Sci-Hub)는, 페이월 뒤에 갇힌 논문 9천만 편 가까이를 전 세계에 무료로 풀어버렸다. 《네이처》가 그를 ‘올해의 10인’에 올리고 누군가는 ‘과학의 로빈후드’라 불렀다. 엘스비어가 그를 고소해 이겼지만, 사이허브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신념은 단순하고 급진적이었다. 과학은 소수 대기업이 아니라 학자들의 역동적 네트워크가 통제해야 한다는 것. 유럽의 연구비 지원기관들이 모든 논문의 즉시 공개를 의무화한 ‘플랜 S’, 영향력지수 숭배를 거부하자는 ‘연구평가에 관한 샌프란시스코 선언(DORA)’, 저자도 독자도 한 푼 내지 않는 ‘다이아몬드 오픈액세스’, 그리고 브라질의 사이엘로(SciELO)와 물리학계의 아카이브(arXiv) 같은 비영리 인프라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나 환상은 금물이다. 하우스타인은 이렇게 잘라 말했다. 거대 출판사들이 “딱 걸렸네, 게재료 좀 내리지”라고 순순히 말할 리 없다고. 돈은 학계를 떠나 그 회사 주주들의 주머니로 간다고. 평가 체제를 바꾸지 않고, 출판 과점의 사슬을 끊지 않는 한, 그 어떤 개혁도 무력하다. 다이아몬드 오픈액세스마저도, 그 운영비를 누가 댈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결국 정치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공공이 그 비용을 떠안지 않으면, 그 빈자리는 다시 자본이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답이 아니다. 더 똑똑한 표절 탐지기도, 더 정교한 AI 감별기도, 출판을 화폐로 만드는 인센티브 구조를 그대로 둔 채로는 잠시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둑이 무너지는데 페인트를 덧칠하는 일을, 우리는 이미 20년째 반복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국과학원의 결정이 다시 의미를 얻는다. 물론 그 결정에는 자국 저널을 키우려는 산업 정책적 의도가 숨어 있다는 해석도 있다 —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이며 중국과학원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게재료 지원을 끊었을 뿐 저널의 색인을 삭제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세계 최대의 연구기관이, 가장 권위 있다는 오픈액세스 저널들을 향해 “이 값은 합당하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는 사실만큼은 무겁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면서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진실을 호명한다. 과학이 지식에 가격표를 달았고, 그 가격표가 이제 과학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진실. 미국의 NIH와 독일의 연구재단(DFG)이 비슷하게 게재료 상한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거인의 무릎이 마침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내 초파리들 앞으로 돌아간다. 유전자 하나의 비밀을 캐는 데 또 몇 해가 걸릴 것이다. 그 노동의 끝에 나올 한 편의 논문이, 정직한 벽돌이 되어 거인의 어깨를 한 뼘 더 높일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가짜 지식의 곰팡이가 그 어깨를 무너뜨리기 전에.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결국 두 가지뿐이다. 바꾸거나,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