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논문((강명관. (2007). 다시 대학의 인문학을 생각한다: 공장의 침묵. 코기토, (63), 303–322.))은 강명관의 <침묵의 공장: 복종하는 공부에 지친 이들을 위하여>의 첫 장이 되었을 것이다. 논문에선 ‘공장의 침묵’이었던 것이 책에선 ‘침묵의 공장’으로 바뀌었다. ‘지배의 트라이앵글’이라는 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지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국가․자본․테크놀로지가 이루는 트라이앵글이다. 우리의 삶은 이 삼각형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인문학 역시 이 트라이앵글 속에 갇혀 있다. 이 삼각형을 제외하고, 인문학의 위 기를 논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이다. 황우석 사건을 보라. 황교수의 연구 는 과학이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인문학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어떤 순진한 사람은, 학문의 순수성․중립성을 말하지만(유사 이래 그런 것은 없었다), 국가․자 본․테크놀로지의 권력은 이미 인간의 삶을 완벽하게 관리, 지배하고 있 기에 어떤 중립적 영역도 남아 있지 않다. 예컨대 이윤과 결합하지 않는 순수한 테크놀로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테크놀로지가 기반하고 있는 순수한 자연과학과 공학도 없다. 이 트라이앵글은 자본-국가, 자본 -테크놀로지, 국가-테크놀로지, 자본-국가-테크놀로지의 관계로 현 현한다. 이 결합 쌍들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이미 황교수 사건이 확인 해주었다. 어느 하나를 공격하면, 배후의 둘은 메두사의 머리가 되어 격렬 히 반발한다. 자본을 비판하면, 곧 내셔널리즘과 테크놀로지가 반격에 나 서는 것이다. 아무도 페르세우스가 될 수 없다.
대학 인문학의 위기는 국가, 자본,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삼각동맹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라는게 강명관의 분석이다. 국가와 자본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는데, 테크놀로지와 인문학의 위기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가. 그 전에 우선 강명관이 학술진흥재단의 자본이 인문학에 유입되면서 인문학의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분석하는 지점을 읽어보자. 이 분석은 꽤 타당해 보인다.
실로 부끄러울 정도의 적은 예산으로 인 문학은 훌륭히 관리, 통제될 수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규모가 팽창하면서부터, 대한민국 대학의 인문학은 ‘위기’를 맞았으니, 이후 인문 학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사업에 목을 매기 시작했다(추측이지만, ‘인문학의 위기론’이 발생한 시점과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돈’이 지원되기 시작한 시점 사이에는 아마도 모종의 관계가 있을 터이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은 궁극적으로 자본에서 나온 돈을 미끼로 인문학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문학 위기론에 대한 강명관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인문학 위기론은 특정한 세력(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의 기득권을 보유한 인문학자), 혹은 대학이 국가-정부로부터 돈을 우려내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면, 국가는 사실 별 관심도 없으면서(사실 귀찮아한다) 체면치레로 현금을 건넨다. 인문학을 모르는 무식한 국가의 이미지가 형성 되는 것을 싫어해서일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의 몇몇 영악한 대학과 연구 소들은 자본의 생리를 최대한 발휘하여, 연구비를 독식한다. 그들은 그들 상호간 돈의 분배가 부당하다는 것을 비판할지는 몰라도 돈으로 인문학을 통제하는 것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웃기는 일이다. 이들 대학은 대부분 서 울에 있다. 이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그들이 하는 행태는 인문학 을 위기로 몰아넣은 자본의 행태와 동일하다. 즉 소수 대학에 연구비가 몰 리는 것은, 자본의 집중과 동일한 현상이 아닌가. 이제 대학의 인문학은 자신의 위기를 포장하여 팔아먹는 처참한 타락에 이르렀다. 인문학을 소외 시키는 원흉인 국가-자본에 징징대고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불쌍히 보여 돈을 받아서 인문학을 육성시킨다는 것은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하긴 그들은 연구가 아닌, ‘프로젝트’를 할 뿐이니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본이 인문학을 소외시킨다고 간혹 말하지만, 그들이 돈―연구비를 독점하는 행태는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소상인을 집어삼키는 행태와 동일하다.
인문학 위기론을 외친지 십여년이 지났고,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황망한 현실을 바라보면, 강명관의 분석이 맞건 아니건, 그동안 인문학의 위기를 소리 높여 외쳤던 강단 학자들의 목소리가 모두 위선이었다는 건 맞다. 특히 인문학은 심지어 기초과학보다도 연구비의 규모가 형편없이 적어도 유지될 수 있는 특징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노예가 되면서까지 국가자본에 구걸한 결과가 오늘날 한국 인문학의 저열한 상태를 만들었다는 것을 감히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 분석이 맘에 안든다면, 대안을 제시하던가 다른 분석을 제시하면 된다. 어차피 인문학은 대학 밖으로 탈출하는 중이고, 아마도 그것이 전세계적인 현상이 될 것 같다.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인문학의 살 길은 무엇인가? 그게 서원일까? 협동조합일까? 고민해보고 여러 대안들을 찾아내면 될 일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초과학의 위기보다 해결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특히 이론분야가 아닌 실험과학은 만약 국가가 그 분야에 대한 지원을 멈추면 그 순간 모두가 실업자가 되는 진정한 노예들이 살아 숨쉬는 그런 분야이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자들은 국가가 돈을 쥐어주지 않으면 냉장고 하나 어떻게 사야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실업자가 되면 번역이라도 하고 강의라도 하면 되는 인문학자들보다 어찌보면 더욱 불쌍한 이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비교해 누가 더 불쌍하다고 결론내릴 생각은 없다. 단,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인문학자의 입장에서 고민해주는 과학자들이 많듯, 그 반대로 생각해보는 인문학자들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보는 것 뿐이다. 아직까지 그런 이들을 만나본 적 없다. 반대로 인문학자들을 걱정하는 과학기술자들이 내 주위에는 참 많다. 자신들의 목숨이 줄어드는 데도 말이다.
자 이제, 강명관이 말하는,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온다는 삼각동맹의 한 고리 테크놀로지의 실체를 알아보자. 논문을 다 읽을 동안 난 그 용어의 구체적 실체를 마주하지 못했다. 아마도 강명관과 같은 인문학자도 여전히 테크놀로지는 ‘악한’ 것이라는 오래된 관습에 빠져 있는 것일까? 논문을 점수로 계량화 하는 시스템, 중앙일보의 대학평가, 등재지와 등재 후보지라는 황당한 학술지 등재 시스템, 이런 것들이 강명관이 삼각동맹의 축으로 지적하는 테크놀로지라면, 그 한 축에 대한 분석이 너무 나이브했다. 아마도 테크놀로지라는 말은 ‘제도’ 혹은 ‘정책’이라는 말로 대치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강명관이 한문학자라는 직업적 정체성을 그의 고리타분함에 가져다 대기는 싫지만, 테크놀로지라는 용어의 잘못된 사용과, 다음과 같은 논문의 마지막 구절은 한 인문학자의 인문학에 대한 충정에서 발현된 글을 완전히 공감하며 읽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이 된다.
진정한 인문학은 수공업이다. 인간은 손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을 통해 자기의 최후의 근거인 자연과 교감한다. 우리는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지 않은가. 고로 수공업적 인문학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
네이쳐지에 ‘학위 공장’이라는 에세이가 실린 적이 있다((Kitazawa, K., & Zhou, Y. (2011). The PhD factory. Nature, 472, 276–279. doi:10.1038/472276a)). 자연과학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지만, 그 논문은 비단 자연과학 학위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걸쳐 학위소지자들이 대책없이 늘어나는 현상을 치밀하고 편견 없이 분석하고 있었다. 강명관, 아니 한국의 인문학자들에게 그런 ‘인문학적인 소양’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