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초파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교미 후 반응의 진화생물학

노랑초파리라는 엘리트 모델과 움벨트의 환원주의
현대 생명과학의 역사는 특정한 모델 생물의 패러다임 아래 구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마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의 유산인 ‘플라이룸(Fly Room)’에서 탄생한 노랑초파리(Drosophila melanogaster)는 유전학, 진화생물학, 초정밀 신경과학을 선도하며 생명과학의 ‘엘리트’ 모델로 군림해 왔다. 이러한 학문적 헤게모니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데 유례없는 정밀함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모든 동물의 생리와 행동을 하나의 표준화된 질서로 환원하려는 치명적인 편향을 낳았다. 생태학자 야코프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이 제안한 ‘움벨트(Umwelt, 주관적 세계)’ 개념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감지할 수 있는 고유한 감각 신호와 생리적 기전으로 구축된 저마다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러나 노랑초파리를 표준으로 삼은 주류 유전학은 종종 이 움벨트의 다양성을 간과하고, 노랑초파리의 생리적 법칙을 곤충 전체, 나아가 생명 전체의 보편 법칙으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러한 환원주의가 가장 강하게 지배하던 영역이 바로 암컷 초파리가 교미를 마친 후 겪는 생리적·행동적 변화인 ‘교미 후 반응(Post-Mating Response, PMR)’ 연구이다. 노랑초파리 암컷은 교미 후 산란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다른 수컷의 구애를 강하게 기피하며, 수명이 극적으로 단축되는 전형적인 생리적 전향을 겪는다. 학계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이 연쇄적인 변화를 통제하는 단 하나의 마스터 분자인 ‘성 펩타이드(Sex Peptide, SP)’의 지배 구조에만 초점을 맞춰 왔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하이데이초파리(Drosophila hydei)의 교미 후 반응 규명 연구는 주류 학계가 외면해 왔던 거대 정자(giant sperm)의 독자적인 진화 경로와 성 펩타이드가 없는 대안적인 생식 전략을 명쾌히 밝혀내며, 노랑초파리 중심의 엘리트 과학이 가려왔던 생명 다양성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는 내가《보통 과학자》와 《플라이룸》에서 끈질기게 주장해 온 ‘보통과학자론’ 및 ‘주변부 과학의 주체성’이라는 과학철학적 저항과 깊은 학문적 공명을 이룬다.
Revel, M., Yildirim, Z., Fabbro, L. et al. Characterization of the post-mating responses of Drosophila hydei, a species that lacks Sex-Peptide. Commun Biol 9, 865 (2026). https://doi.org/10.1038/s42003-026-10021-5

성 펩타이드 네트워크의 정교한 지배 구조와 마리아나 울프너의 유산
노랑초파리의 교미 후 반응을 지배하는 성 펩타이드의 발견과 그 복잡한 분자 네트워크를 규명해 온 과정은 코넬 대학교의 마리아나 울프너(Mariana F. Wolfner) 교수를 중심으로 한 연구진의 집요하고 정교한 추적의 산물이다. 1988년 첸(Chen) 등에 의해 처음 발견된 성 펩타이드는 수컷의 부속선(Accessory Gland)에서 생성되어 정액과 함께 암컷에게 전달되는 단 $36 \text{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매우 작은 펩타이드 호르몬이다. 이 작은 분자가 암컷 체내로 들어가는 순간, 암컷의 생리와 행동은 완전히 ‘재프로그래밍’된다.

교미 후 지속되는 장기 반응(Long-Term Response, LTR)이 정자 자체의 물리적 자극에 의한 것인가, 혹은 정액 단백질에 의한 것인가를 둘러싼 ‘정자 효과(sperm effect)’ 논쟁은 에릭 쿠블리(Eric Kubli) 연구진의 유전자 표적 돌연변이 실험을 통해 성 펩타이드의 판정승으로 마침내 귀결되었다. 이들은 성 펩타이드 결핍 돌연변이 수컷을 성공적으로 제작하여, 이들과 교미한 암컷이 정상적인 정자를 저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미 후 반응이 단 하루 이상 유지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정자는 스스로 신호를 생성하는 주체가 아니라, 성 펩타이드를 암컷의 수정낭(seminal receptacle) 내에 포획하고 서서히 방출하기 위한 단순한 ‘담체(carrier)’이자 안정적 공급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이러한 성 펩타이드의 작용이 암컷 체내에서 단독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스템 수준에서 규명한 인물이 바로 마리아나 울프너이다. 울프너 연구실의 포스트닥터 제프 파인들리(Geoff Findlay)와 앤드루 클라크(Andrew Clark) 교수 등은 정밀한 공진화 분석과 유전학적 스크리닝을 통해 성 펩타이드의 안정성과 수송을 보좌하는 정교한 단백질 네트워크를 해부했다.
성 펩타이드가 암컷의 정자 저장 기관에 도달하여 정자에 결합하기 위해서는 수컷 부속선에서 정액 마이크로캐리어(microcarrier) 형태로 포장되어 이송되어야 하며, 최소 8개의 다른 정액 단백질(Acps: CG1652, CG1656, CG9997, CG17575 등)이 암컷 생식관 내에서 순차적이고 정교한 단계적 활성화(three-step cascade)를 거쳐야만 정자 결합이 완성된다. 이 단백질들의 조력 하에 정자 머리에 붙은 성 펩타이드는 암컷 체내의 프로테아제에 의해 서서히 잘려 나가 활성화된 C-말단 부위가 혈림프로 퍼져 나가며 장기적인 신호 전달을 유지한다.
성 펩타이드가 암컷의 수용체인 SPR(Sex Peptide Receptor)과 결합할 때, 암컷의 생리는 혹독한 혹사를 감내해야 한다. 아빌라(Avila)와 울프너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수정낭 분비 세포와 ppk+ 감각 뉴런에 발현된 SPR 신호는 암컷의 생식 줄기세포(GSC) 증식을 유도하고, 옥토파민(Octopamine) 뉴런 경로와 협력하여 배란을 급격히 촉진한다.
또한 울프너 연구실의 멜리사 화이트(Melissa White)는 성 펩타이드가 암컷의 중간창자(midgut) 크기와 표면적을 물리적으로 대폭 팽창시켜 소화 효소의 발현을 유도하고 영양 흡수를 강제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규명했다. 이 과정은 암컷으로 하여금 생체 시계를 재조정하여 극심한 불면증(jet lag) 상태에 빠지게 만들고, 설탕보다 효모 성분을 더 먹도록 식성을 강제한다.
이러한 ‘생식 오버드라이브’의 결과로 암컷은 면역 기능이 억제되고 대사 자원이 고갈되어 수명이 현저히 감소하는 생존적 희생을 치르게 된다. 이는 수컷이 자신의 정자 수정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암컷의 잔여 미래 적합도를 무참히 갉아먹는 극단적인 성적 갈등(sexual conflict)의 대표적 증거로 학계에 각인되었다.
| 성 펩타이드 네트워크 주요 구성원 및 기능 (노랑초파리 모델) | |
| 구성 요소 | 생리 및 행동학적 기능 요약 |
| 성 펩타이드 (SP / Acp70A) | 36개 아미노산 길이의 주동자. 정자에 결합 후 지속 방출되어 배란을 촉진하고 구애를 거부하도록 유도. |
| 성 펩타이드 수용체 (SPR) | ppk+ 뉴런 및 수정낭Secretory Cells에서 발현. GPCR로서 성 펩타이드 신호를 수용하여 교미 후 상태를 활성화. |
| 부속선 수송 단백질군 (CG1652, CG1656 등) | 성 펩타이드가 정자에 안정적으로 포획되어 장기적 PMR을 유도할 수 있도록 돕는 안정화 네트워크 구축. |
| 오불린 (Ovulin / Acp26Aa) | 교미 후 24시간 이내의 초기 단계에서 난소 내 완숙 난자의 방출(배란)을 급격히 자극. |
| 소화관 확장 유도 기전 (White et al. 규명) | 성 펩타이드-SPR 신호를 통해 중간창자(midgut)의 두께 및 폭을 확장시켜 강제적인 대사 자원 흡수를 촉진. |
하이데이초파리의 거대 정자와 성 펩타이드 없는 대안적 생식 기전
그러나 2026년 막심 레벨(Maxime Revel)과 로버트 메다(Robert K. Maeda) 등의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는 주류 생물학이 노랑초파리 모델에 투사해 온 이러한 진화론적 불가피성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연구팀은 노랑초파리가 속한 Sophophora 아속과 약 6,000만 년 전 분화된 Siphlodora 아속의 하이데이초파리(Drosophila hydei)를 정밀 분석했다. 하이데이초파리는 노랑초파리와 자연 상태에서 밀접하게 공존하는 종임에도 불구하고, 계통 분석 결과 성 펩타이드(SP) 유전자를 완전히 소실한 독자적인 계보(repleta/nannoptera 방사군)에 속해 있음이 드러났다.
성 펩타이드의 결핍과 맞물려, 하이데이초파리는 극단적으로 과장된 물리적 성적 장식물인 ‘거대 정자’를 진화시켰다. 노랑초파리의 정자가 약 2 mm 미만인 반면, 하이데이초파리 수컷은 몸길이의 약 10배에 달하는 무려 2.3cm의 초거대 정자를 생산한다. 스콧 피트닉(Scott Pitnick)과 테레즈 마코우(Therese A. Markow) 등의 오랜 선행 연구들이 지적했듯, 이러한 극단적인 거대 정자의 생산은 수컷에게 대단히 파괴적인 생리적 비용을 요구한다.
수컷은 거대 정자를 감싸고 발달시키기 위해 정소(testes)의 발달에 엄청난 대사적 에너지를 배분해야 하며, 이로 인해 우화 후 성적 성숙을 이루기까지 약 10일이라는 매우 긴 발달 지연을 겪는다. 또한 물리적 크기의 한계로 인해 교미 시 암컷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정자의 수도 100개 미만으로 제한되며, 이는 사실상 난자와 정자의 비율이 1:1에 수렴하는 궁극의 이형배자생식(anisogamy)의 극단적 상태를 보여준다.
이처럼 성 펩타이드가 없고 거대 정자를 이송해야 하는 하이데이초파리 암컷의 교미 후 반응은 노랑초파리의 정교한 분자 지배 방식과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생식 및 생리학적 형질 비교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리된다.
| 생식 및 생리 형질 비교 분석 | |||
| 형질 분류 | 노랑초파리 (D. melanogaster) | 하이데이초파리 (D. hydei) | 생태 및 유전학적 적응 배경 |
| SP 유전자 유무 | 존재 (부속선 주세포에서 강한 발현) | 완벽히 소실 (repleta 계통의 독자적 상실) | 성 펩타이드 수용체 신호에 의한 생리 통제 배제 |
| 정자 길이 및 수 | 약 2 mm미만 / 수천 개 사정 | 약 2.3cm /100개 미만 극소수 사정 | 정자 경쟁의 물리적 차원 전환 및 희소 정자 전술 |
| 교미 후 산란 촉진 | 최대 10일 이상 높은 산란량 유지 | 최초 24시간 일시 방출 후 즉시 처녀율 복귀 | 추가적인 대사 자원 소모 없이 기축 알만 신속 배출 |
| 재교미 억제 기간 | 약 1-2주간 강한 거부 및 불응 | 교미 직후에도 극도로 높은 재교미 수용성 | 희소 정자를 보충하기 위한 암컷의 자발적 다배우자 교미 |
| 암컷의 생식 수명 비용 | 잦은 교미 및 SP 수용 시 수명 극단적 단축 | 간헐적 교미 시 처녀 암컷과 수명 차이 없음 | 성적 갈등의 완화 및 암컷 신체 항상성 보존 |
| 교미 후 식이 조절 | Yeast 대 Sugar 선호도가 효모 쪽으로 팽창 | 교미 후 식이 선호도의 변화가 전혀 관찰 안 됨 | 대사 조절의 수동적 지배로부터 암컷이 해방됨 |
하이데이초파리 암컷은 교미 후 3일간 총 산란량을 계측했을 때 처녀 암컷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교미 자극은 단지 수정낭에 미리 상시 비축되어 있던 보관 난의 배출을 최초 24시간 동안 일시적으로 촉진할 뿐이며, 생식 세포의 강제적인 추가 생산 가속화는 전혀 동반되지 않는다.
이는 노랑초파리처럼 성 펩타이드에 의해 강제로 난소 생식 세포 분열과 대사 활성화를 종용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암컷은 무리한 생식 과부하를 겪지 않기 때문에 교미를 겪더라도 항상성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처녀 자매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천수를 온전히 누린다. 수컷의 화학적 침탈에 맞서 암컷이 신체적 주권을 지켜낸 진화적 평화 상태인 셈이다.
부속선 부세포의 진화적 가치와 정자 경쟁의 역전
하이데이초파리의 성 펩타이드 소실은 남겨진 생식 분비 기관의 형태적 다양성에 대단히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노랑초파리 수컷 부속선에는 성 펩타이드의 정자 결합 및 이송 조건을 관리하는 약 40 – 50개의 부세포(Secondary Cells, SCs)가 원위부 끝자락에만 국한되어 존재한다. 부세포의 분비 기능에 결함이 발생하면 성 펩타이드가 정자에 계류되지 못해 장기 PMR이 붕괴하므로, 학계는 부세포의 진화가 오직 성 펩타이드의 작용을 서포트하기 위해 정렬된 기전이라고 간주해 왔다.
그러나 성 펩타이드가 아예 없는 하이데이초파리 수컷은 오히려 노랑초파리보다 10배나 많은 500개 이상의 거대한 부세포를 로브 전체에 빼곡하게 퍼뜨려 두고 있다. 레벨과 메다 연구팀이 초파리속 내 주요 종들의 계통학적 부속선 매핑을 전개한 결과, 이러한 Dichotomy(이분법)는 매우 명확하고 체계적인 계통적 진화 흔적을 따르고 있음이 규명되었다.
| 초파리속 주요 종들의 부속선 형태 및 SP 유전자 진화 양상 | ||||
| 종명 (Subgenus) | 부속선 로브 길이 | 부세포 (SC) 수 및 위치 | SP 유전자 위치 및 특징 | 출처 |
| D. melanogaster (Sophophora) | 짧음 (1500m) | 적음 (40-50개, 원위부 끝 국한) | caps 근처 전위, 2개 복사본 보유 | |
| D. serrata (Sophophora) | 짧음 | 극소수 혹은 거의 존재하지 않음 | caps 근처 존재, SP 작용 활발 | |
| D. ananassae (Sophophora) | 짧음 | 적음 (50개 미만, 원위부 국한) | caps 근처 존재, 무려 7개 복사본 중복 | |
| D. virilis (Drosophila) | 길다 (- 3000 m) | 많음 (150개 이상, 로브 전체 분포) | NaPi-III 근처 ancestral position 보존 | |
| D. hydei (Drosophila) | 극도로 길다 | 극도로 많음 (500개, 로브 전체 분포) | 유전자 완전 소실 | |
| Scaptodrosophila lebanonensis (기저) | 길다 | 많음 (로브 중앙부에 분포) | 유전자 없음 (Ancestral state) | |
| Chymomyza pararufithorax (기저) | 길다 | 많음 (로브 원위부 2/3 영역 분포) | Chymomyza 계통에서 최초로 SP 기원 추정 |
이 계통학적 구조는 기념비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성 펩타이드 유전자는 사실 Chymomyza 계통에서 최초로 출현했으나, 수많은 부세포를 지닌 긴 형태의 부속선은 그 이전의 아주 원시적인 초파리 공통 조상에서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즉, 부세포는 원래 성 펩타이드를 정자에 붙이기 위해 탄생한 기관이 아니다.
하이데이초파리와 같은 거대 정자 종들이 성 펩타이드가 없음에도 수백 개의 부세포를 고스란히 유지하는 이유는, 2.3cm에 달하는 거대한 세포 가닥들을 정소에서 사정관으로 부드럽게 윤활하고 엉킴 없이 포장·수송하기 위해 부세포 유래 지질(lipid) 및 구조적 당단백질 분비계가 원천적으로 대량 요구되기 때문이다. 노랑초파리 계통은 정자 꼬리가 단축되는 소형화 진화(2 mm)를 겪으면서 거대한 부세포 분비계의 필요성이 저하되자 부세포 수를 크게 퇴화시켰고, 대신 정자 표면에 유입된 성 펩타이드를 안정화하는 기능으로 이들을 최소화하여 전용(co-optation)시킨 것이다.
이러한 생리적 보조 기전의 극적인 변주는 암컷 체내에서의 정자 경쟁(sperm competition) 구도마저 완벽히 뒤흔든다. 노랑초파리 수컷들이 다수의 값싼 정자를 전수하며 먼저 교미한 정자를 밀어내는 ‘후기 수컷 우선권(last-male precedence)’을 행사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하이데이초파리는 먼저 교미하여 암컷의 한정된 정자 저장 구획을 완벽히 매립한 첫 수컷의 정자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초기 수컷 우선권(first-male preference)’을 가진다.
연구팀은 배아 발달 밀도를 제어하여 정상적으로 풍요롭게 성장한 수컷과 오직 25%의 희석된 영양 배지에서 혹독하게 굶주려 자란 영양 결핍 수컷들을 인위적으로 유도했다. 이 영양 결핍 수컷들은 체구(thorax)가 극도로 작아졌지만 고환 및 거대 정자의 물리적 길이 자체는 정상 수컷과 완벽히 동일하게 유지했다. 정자 길이는 계통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철저히 고정된 유전적 형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양 결핍 수컷은 정자 경쟁에서 초기 수컷 우선권을 방어하는 능력이 처참하게 붕괴되었다. 이는 정자의 물리적 결함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인해 부속선의 성장과 부세포의 성숙도가 제한되어 비(非)정자성 정액 분비 단백질의 품질이 크게 조악해졌기 때문이다. 하이데이초파리 암컷은 수컷이 정자와 함께 제공하는 부세포 분비물의 질적 수준을 매우 영리하게 감별함으로써, 물리적 장식(거대 정자) 뒤에 숨겨진 수컷의 실질적인 영양 상태와 유전적 건강을 은밀히 선별(female cryptic choice)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적 격리를 통한 구애 기피와 행동 움벨트의 변주
성 펩타이드가 결핍된 하이데이초파리가 암컷의 재교미 수용성을 화학적으로 조작할 수 없다면, 암컷은 어떻게 수컷들의 끈질긴 성적 괴롭힘(courtship harassment)과 재교미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의 항상성을 보호하는가. 이 의문은 DrosoVAM 비디오 추적 장치 시스템을 통한 장기적인 행동 움벨트(behavioral Umwelt) 분석에 의해 완전히 규명되었다. 하이데이초파리 암컷 역시 교미 후 대단히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행동학적 전향을 달성한다.
교미를 마친 하이데이초파리 암컷은 활동성이 급격히 저하되며, 특히 밤 시간대의 불필요한 움직임을 철저히 제한한다. 이들은 교미 후 약 36시간이 흐른 시점부터 산란에 최적화된 먹이 영역 근처에 장기 체류하며 자원을 보존한다. 흥미로운 점은 먹이 성분 자체에 대한 기호성 변화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랑초파리가 성 펩타이드 신호에 의해 인슐린/TOR 신호가 교란되어 단백질(Yeast)을 더 먹기 위해 격렬한 식이 스위치를 강제당하는 것과 달리, 하이데이초파리 암컷은 자발적인 산란 안정화를 위해 먹이 영역에 조용히 둥지를 틀 뿐이다.
이 행동학적 변화의 백미는 빛에 대한 선호도(light preference)의 극적인 이동에 있다. DrosoVAM 명암 Preference Chamber 내에서 하이데이초파리 수컷들은 강한 음성 주광성(darkness preference)을 띠며 그늘지고 어두운 구석으로 숨는 경향을 보였다. 처녀 암컷들은 명암 구역에 대해 완벽히 중립적인 선호도를 나타냈으나, 교미를 마친 암컷들은 낮 시간 동안 눈에 띄게 밝고 환하며, 미세하게 더 온도가 시원한 개활지 구역으로 전원 이주하여 장시간 체류했다.
자연 상태의 초파리에게 포식 위험이 높은 밝은 개활지로 나서는 것은 자살 행위와도 같다. 그러나 이 뜻밖의 행동은 고도의 진화적 타협안이다. 어둠 속에 웅크린 채 끈질기게 뒤를 밟으며 구애 노래를 부르는 하이데이초파리 수컷들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교미를 마친 암컷들이 수컷들이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밝은 영역’을 안전한 안식처 삼아 의도적인 공간적 분할(spatial partitioning)을 단행하는 것이다.
수컷의 화학적 마취제(성 펩타이드)를 주입받아 신경 세포 작동을 거부당하는 노랑초파리 암컷과 달리, 하이데이초파리 암컷은 수컷과의 공간적 거리를 주체적으로 벌림으로써 구애 노이즈를 성공적으로 회피한다. 이러한 기동력 기반의 회피 전술은 다른 성 펩타이드 결핍 종들이 수컷을 등에 태우고 다니며 강제 차단하거나(D. pegasa, D. mainlandi), 교미 시간 자체를 극도로 연장하여 다른 수컷의 접근을 막는(D. acanthoptera) 대안적 거동들과 정확히 일맥상통한다.
| 성 펩타이드(SP)가 결핍된 초파리 종들의 대안적 생식 및 행동 제어 전략 | |
| 초파리 종명 | 교미 후 생리 및 행동적 적응 메커니즘 |
| Drosophila hydei | 교미 후 암컷이 수컷이 극도로 혐오하는 밝은(시원한) 구역으로 물리적 이주를 단행하여 수컷의 지속적 구애 괴롭힘을 완벽히 무력화. |
| Drosophila pegasa | 성 펩타이드에 의한 재교미 차단이 불가능하므로, 교미가 종료된 이후에도 수컷이 암컷의 등 위에 수 시간 동안 올라타 머무는 행동적 메이트 가딩 장착. |
| Drosophila mainlandi | D. pegasa와 동일하게 독립적으로 교미 후 등 탑승 가딩 전략을 진화시켜 타 수컷의 물리적 접근을 원천 봉쇄. |
| Drosophila acanthoptera | 수컷이 구애 거부 유도 물질을 전송하는 대신, 실제 물리적 교미 시간(Copulation duration) 자체를 3시간 이상 장기 유지하여 공간을 물리 점유. |
| Drosophila bifurca | 거대 정자 수송을 위해 다량의 정액 단백질을 공유하되, 무리한 배란 촉진을 배제하여 대사적 항상성을 완벽히 보존. |
결론: 변방의 보통초파리들이 건네는 진화론적 연대
레벨과 메다 연구팀이 전해온 하이데이초파리의 기상천외한 생식 생리학은 단순히 흥미로운 곤충 행동의 발견에 그치지 않는다. 이 연구는 오직 노랑초파리라는 ‘엘리트 단일 표본’을 기축으로 온갖 질병 치료와 분자 기전의 정답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주류 거대 과학의 오만함을 조용히 꾸짖는다.
나는 내 책《보통 과학자》를 통해, 현대 과학계가 소수의 영웅적인 노벨상 수상자나 화려한 네이처(Nature) 논문의 화폐 가치에만 눈이 멀어 수많은 보통의 연구실이 묵묵히 다져나가는 ‘벽돌 한 장’의 소중함을 상실했다고 일관되게 지적해 왔다. 2020년대에 들어 오픈액세스 저널들의 게재료(APC)가 1,700만 원을 상회하며 과학 지식을 돈으로 매매하는 약탈적 자본 구조가 고착화되는 서글픈 학문적 풍경 속에서, 나는 주체적인 시선으로 변방의 독자적이고 순수한 질문들을 끈질기게 붙들어야만 과학의 다양성이 지속 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수억 년의 장엄한 진화 역사 속에서 하이데이초파리가 보여준 거대 정자의 분투와 성 펩타이드 없는 생태학적 적응은, 주류가 강요하는 획일화된 경쟁 패러다임(대량 사정과 대사 독점을 통한 암컷 착취)을 따르지 않고도 생명체는 얼마든지 독자적이고 평화적인 대안적 균형(질적 정자 경쟁과 공간적 회피)을 구축할 수 있음을 입증한다.
1918년 헤르만 뮬러(Hermann J. Muller)가 고안한 균형 염색체(Balancer)라는 강력한 도구가 초파리 유전학을 다른 모델 동물과 완전히 차별화해 주었듯이, 하이데이초파리 연구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노랑초파리 중심의 생리학적 도그마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진화생물학적 밸런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광장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소수의 잘 꾸며진 동화 같은 과학이 아니다. 자연의 수줍은 참모습은 오직 중용과 인내를 가진 채 2밀리미터 초파리의 미세한 교미 시간이나 생태계의 낯선 궤적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보통과학자들의 정직한 노동을 통해서만 그 위대하고도 낭만적인 풍경을 우리 손에 조심스레 쥐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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