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Flyandbee, 김우재 (2014-)

뼈를 우려먹는 나라: 한국 과학의 구조적 빈곤

컨퍼런스의 마지막 날, 나는 어느 발표장 뒤편에 서 있었다. 내가 이번에 초대한 사람들은 한국과 중국과 일본에서 초파리 신경생물학(Drosophila neurobiology, 초파리를 모델로 삼아 뇌와 행동의 유전적 기반을 탐구하는 분야)을 이끄는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이었다. 초대장을 보내는 손끝에는 주최자의 자부심이 있었고, 대부분의 초대객은 그 자부심에 값했다. 그들은 아직 출판되지 않은, 저널의 심사를 통과하기는커녕 제출조차 되지 않은 데이터를 슬라이드에 담아 왔고, 그것을 무방비 상태로 펼쳐 놓은 채 격렬한 토론을 유도했다. 학회장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유독 한국에서 온 몇몇 연구자들의 발표만은 달랐다. 그들은 이미 몇 년 전에 출판된, 어디선가 여러 번 보았던 슬라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좋은 사골은 한 번 고면 뽀얀 국물을 내지만, 서너 번 우려낸 뼈에서는 멀건 물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날의 발표는 뼈해장국을 우려먹듯 같은 뼈를 몇 번이고 다시 고아 낸 국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발표 그 자체, 곧 제사상에 올릴 정성 어린 음식이 아니라, 제사가 끝난 뒤의 잿밥—누구와 인사를 트고, 어떤 자리를 도모하고, 무엇을 얻어 갈 것인가—쪽에 쏠려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고, 곧이어 그 부끄러움을 개인에게 돌리는 일이 얼마나 게으른 판단인지도 깨달았다. 멀건 국물을 앞에 두고 던져야 할 질문은 요리사의 성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왜 이 부엌에는 새 뼈가 들어오지 않는가. 이 글은 그 질문의 기록이며, GDP 대비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연구에 돈을 쏟는 나라의 과학이 앓고 있는 어떤 빈곤에 관한 기록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학회에서 출판되지 않은 데이터를 공유하는 일은 애초에 왜 미덕인가. 그것은 손해가 아닌가. 아직 논문으로 확정되지 않은 결과를 남들 앞에 펼쳐 놓는 순간, 누군가 그 아이디어를 가로채 먼저 출판해 버릴 위험—이른바 스쿠핑(scooping, 타인의 미발표 성과를 앞질러 발표해 가로채는 일)—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한 과학 공동체의 오래된 대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유가 규범이라는 것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은 1942년의 글에서 근대 과학의 에토스를 네 가지 규범으로 요약했다. 훗날 CUDOS라는 약어로 불리게 된 이 규범들 가운데 첫 번째가 ‘공유주의(communism, 후대의 학자들은 communalism으로 고쳐 부른다)’다. 과학적 발견은 발견자 개인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공동체에 귀속되며, 비밀주의(secrecy)야말로 이 규범의 정반대편에 선 악덕이라는 것이다. 사회학자 워런 해그스트롬(Warren O. Hagstrom)은 1965년의 저서 『과학 공동체(The Scientific Community)』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적 소통이 일종의 선물경제(gift economy, 금전이 아니라 증여와 인정으로 돌아가는 경제)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학술지에 제출되는 원고가 흔히 ‘기여(contributions)’라 불리는데, 실제로 그것은 선물이라고 그는 썼다. 연구자는 발견을 공동체에 선물하고, 그 대가로 돈이 아니라 동료들의 인정(recognition)을 돌려받는다.

이 선물경제가 유독 선명하게 구현된 곳이 초파리 연구 공동체다. 블루밍턴 초파리 계통 센터(Bloomington Drosophila Stock Center, BDSC)를 보라. T. H. 모건(T. H. Morgan)과 그의 제자들이 20세기 초에 시작한 계통 수집에서 출발한 이 센터는, 2024년의 한 총설이 전하는 대로 1967년의 정식 출범 이래 9만이 넘는 계통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컬렉션으로 성장해 전 세계 연구자 누구에게나 파리를 배포한다. 내가 몇 년을 들여 만든 형질전환 초파리를, 논문이 나오는 순간—때로는 그 이전에—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지구 반대편의 실험실로 아무 조건 없이 부쳐 주는 문화. 그것이 이 공동체의 오래된 관습이다. 학회에서 미발표 데이터를 나누는 일은 이 선물경제의 연장선에 있다. 콜드 스프링 하버 정량생물학 심포지엄(Cold Spring Harbor Symposia on Quantitative Biology)은 1933년에 첫 논문집을 냈고, 고든 리서치 컨퍼런스(Gordon Research Conferences)는 1931년의 설립 이래 아예 규정으로 비밀 유지를 못 박았다. 그 공식 정책에 따르면 회의에서 발표된 모든 정보는 발표자 개인의 사적인 소통이며 공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제한 아래에서만 제시되고, 강연의 녹음과 슬라이드·포스터의 촬영, 그리고 컨퍼런스에서 오간 발표와 토론에 대한 인쇄된 인용은 금지된다. 역설적이게도 이 강력한 인용 금지는 발표를 위축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장치다. 아무도 당신의 미발표 데이터를 인용하거나 가로챌 수 없다는 제도적 보장이 있기에, 연구자들은 안심하고 가장 날것의, 가장 위험한 결과를 꺼내 놓는다. 여기서 이 글의 논지 하나가 미리 드러난다. 공유는 개인의 용기가 아니라 제도가 제조하는 안전의 산물이라는 것. 관대함이 합리적인 선택이 되도록 만드는 일, 그것이 제도의 소관이다.

그 렌즈로 보면, 이번 컨퍼런스에서 중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보여 준 것은 단순한 열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힘이었다. 중국의 힘을 나는 허기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지금 중국의 대학에 재직하며 그 부상을 매일 현장에서 목격한다. 그것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고급 학술지 기여도를 재는 네이처 인덱스(Nature Index)에서 중국은 2023년 발표된 순위에서 사상 처음 자연과학 부문 세계 1위에 올랐고, 격차는 이후 오히려 벌어져 2025년 집계(2024년 데이터)에서 중국의 기여 점수는 32,122로 미국의 22,083을 크게 앞섰다. 네이처 인덱스 스스로 그 격차가 단 한 해 만에 네 배 이상으로 불었다고 적었을 정도다. 신경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은 2016년 13차 5개년 계획에서 뇌과학을 국가 중점 사업으로 지정하고 15년짜리 차이나 브레인 프로젝트(China Brain Project)를 출범시켰으며, 무밍 푸(Mu-ming Poo)가 1999년 상하이에 세운 신경과학연구소(Institute of Neuroscience, ION)와 2018년 베이징에 설립된 중국뇌연구소(Chinese Institute for Brain Research, CIBR)가 그 양대 축을 이룬다. 이 프로젝트의 예산 규모는 출처마다 편차가 커 조심스럽다. 나는 가장 보수적이고 출처가 분명한 숫자를 택한다. 사이언스지의 보도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해당 5개년 계획 아래 50억 위안, 약 7억 4천 6백만 달러로 책정되어, 2021년까지 24억 달러를 지원한 미국의 브레인 이니셔티브(BRAIN Initiative)와 같은 반열에 올라섰다. 이보다 훨씬 큰 수치를 든 매체들도 있으나 회계의 기준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므로 여기서는 배제한다.

그러나 내가 허기라 부르는 것은 예산의 크기가 아니라, 그 돈이 젊은 연구자에게 스며드는 방식이다. 베이징의 국립생물과학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Biological Sciences, NIBS)는 미국의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HHMI)를 본떠 세워졌는데, 젊은 독립연구자에게 연구자 재량으로 쓸 수 있는 연간 150만 위안의 유연한 자금을 제공하며, 채용 공고에는 연구비 지원서를 쓸 필요가 없다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다. CIBR의 채용 공고 역시 5년 안에 국제적으로 선발한 50명의 PI와 1천 명 이상의 연구 인력을 목표로 내걸며 같은 약속, 곧 연구비 신청 불요를 반복한다. 이 설계 사상은 새것이 아니다. 이미 1999년 ION의 설립 당시 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의 사설은, 그곳의 교수진이 중국 기준으로 관대한 연구비와 급여를, 실험실을 꾸리고 연구 방향을 스스로 정할 상당한 자유와 함께 받게 되리라고 적었다. 창립자 무밍 푸는 사이언스지에 자신의 원칙을 이렇게 요약했다. 새 연구소여야 했고, 임용은 실력에 근거해야 했으며, 지원은 꾸준해야 했다. 이 구조가 해외의 인재를 빨아들인다. 2023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연구는 청년천인계획(Young Thousand Talents) 수혜자들이 귀국 후 해외에 남은 동료들보다 27퍼센트 더 많은 논문을, 책임저자로서는 144퍼센트 더 많은 논문을 냈으며 그 상당 부분이 더 큰 연구비와 더 큰 연구팀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이 해석 자체는 논쟁 중이다. 같은 저널에 실린 반론은 동일한 데이터에서 정반대의 결론, 곧 귀국자들이 해외 동료를 능가하지 못했다는 결론도 끌어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니 나는 이 숫자를 신중히 인용하되,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젊은 연구자에게 자원과 자율을 몰아주는 구조—만큼은 내 눈으로 매일 확인한다고만 적어 둔다. 허기란 이런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자의 허기, 그래서 무엇이든 걸고 토론장에 나서는 자의 허기. 부엌의 비유로 돌아가자면, 이것은 매일 아침 새 뼈가 들어오는 시장이다. 어제의 국물을 다시 우려낼 이유가 없는 부엌이다.

일본의 힘은 다른 이름을 갖는다. 나는 그것을 깊이라 부른다. 초파리 신경유전학의 창시자 세이모어 벤저(Seymour Benzer)의 칼텍 실험실에서 훈련받은 호타 요시키(Yoshiki Hotta)는 1970년대에 유전적 모자이크 분석(genetic mosaic analysis, 한 개체 안에 유전형이 다른 세포들을 섞어 유전자가 작동하는 신체 부위를 짚어 내는 기법)으로 행동의 신경 기반을 지도화했다. 호타와 벤저가 1972년 『네이처』에 실은 「초파리 모자이크에서의 행동 지도화(Mapping of Behaviour in Drosophila Mosaics)」는 그 기념비이며,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국립유전학연구소를 이끌며 하나의 학파—문헌이 ‘호타 신경유전학 학파(the Hotta Neurogenetics School)’라 이름 붙인—를 세웠다. 그 계보는 끊기지 않았다. 야마모토 다이스케(Daisuke Yamamoto)는 1996년 fruitless 유전자를 세계 최초로 클로닝한 뒤, 초파리 수컷의 구애 행동을 지배하는 신경회로를 수십 년에 걸쳐 파고들었다. 이토 케이(Kei Ito)는 초파리 뇌의 해부학에 평생을 바쳐 2014년 국제 컨소시엄을 이끌고 곤충 뇌의 표준 명명법을 확립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연구자가 초파리 뇌의 부위를 부를 때 쓰는 공용어를 만든 셈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한 주제를 오래 붙드는 것과 한 슬라이드를 오래 붙드는 것은 정반대의 일이다. 전자는 한 마리 소를 평생에 걸쳐 발골하는 장인의 깊이이고, 후자는 냉동고의 같은 뼈를 다시 고아 내는 부엌의 궁여지책이다. 깊이는 한 연구자가 한 질문을 이십 년, 삼십 년 붙들 수 있게 해 주는 안정을 전제한다. 나는 그 토양의 이름을 카켄히(KAKENHI, 일본의 과학연구비조성금)로 대표되는 지원의 연속성에서 찾고 싶지만, 이 인과가 엄밀한 실증이라기보다 하나의 해석임은 밝혀 둔다.

중국의 허기와 일본의 깊이 사이에서, 한국의 재탕은 어디에 서 있는가. 여기서 나는 개인을 비난하고 싶은 유혹을 힘껏 밀어낸다. 그 재탕은 게으름의 산물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적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연구자가 학회에서 미발표 데이터를 꺼내 놓았을 때 그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냉정하게 말해 거의 없다. 한국의 연구 평가는 출판된 논문의 편수와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 저널의 평균 피인용도로 논문의 값을 대신 재는 지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학회에서의 관대한 공유는 평가표의 어느 칸에도 기입되지 않는다. 반면 잃을 것은 명백하다. 좁고 경쟁적인 커뮤니티 안에서 출판되지 않은 결과를 노출하는 일은 아이디어 도용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인센티브는 영이고 리스크는 실재한다. 이 계산 앞에서 미발표 데이터를 숨기는 것은 비겁이 아니라 이성이다. 덧붙이자면, 한국 연구자들이 공유를 꺼리는 이유에 대한 나의 이 진단은 엄밀한 실증 연구라기보다 현장의 담론과 합리적 추론에 기댄 것임을 밝혀 둔다. 새 뼈를 고지 않는 부엌에도 나름의 회계 장부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장부의 뿌리에는 제도가 있다. 1996년 도입된 연구과제중심제도, 이른바 PBS(Project-Based System)가 그 핵심이다. PBS는 연구자의 인건비를 외부 과제의 수주에 연동시킨 제도다. 과제를 따오지 못하면 월급이 나오지 않는 구조. 도입 당시의 명분은 자율성과 책임성, 그리고 시장의 효율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그것은 연구자를 창의적 기획자가 아니라 영업자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한 시론의 표현을 빌리면, 인건비 확보를 위해 과제가 남발되었고 단기 성과를 우선시하는 풍토가 형성되면서 기초 연구와 장기 연구, 도전적 연구는 소외되었다. 한 과학기술계 언론의 설문에서는 응답자의 90퍼센트 이상이 이 제도의 폐지나 전면 보완이 필요하다고 답했고, 2025년 정부가 마침내 단계적 폐지—인문사회 분야는 즉시, 과학기술계 출연연은 5년에 걸쳐—를 결정한 것은 그 부작용이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방증한다. 인건비가 과제에 묶인 연구자에게, 몇 년을 들여 새 뼈를 고는 일은 사치다. 당장 다음 과제의 수주에 도움이 될 인맥—제사보다 잿밥—이 더 절실해지는 것은 신앙심의 문제가 아니라 산수의 문제다.

여기에 더해 2023년, 한국 정부는 2024년도 국가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국회는 그해 12월 예산을 26조 5천억 원으로 확정했는데, 이는 전년 대비 15퍼센트의 감소이자 33년 만의 첫 연구개발 예산 삭감이었다. 예산은 이후 복원되고 다시 증액되었지만, 그 한 번의 삭감이 남긴 상처는 숫자로 회복되지 않는다.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을 떠났다. 황정아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4년 10월까지 182명의 카이스트 학생—그중 178명이 학부생—이 의대와 치대로 이탈했고, 서지영 의원이 인용한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서울대는 4년 사이 56명의 교수를 해외에 빼앗겼는데 최대 네 배에 이르는 급여가 그들을 이끌었다. 통계청 조사에서는 2024년 국내 신규 박사의 29.6퍼센트가 실업 상태였다. 십 년 전의 24.5퍼센트에서 오른 수치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잔인한 역설이 있다. 과기정통부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는 연간 131조 원을 넘어섰고, GDP 대비 비중은 5.13퍼센트로 사상 처음 5퍼센트를 돌파해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랐다. 세계에서 둘째로 연구에 돈을 쏟는 나라의 과학이 가난하다. 이 빈곤은 돈의 빈곤이 아니다. 그것은 한 주제를 오래 붙들 수 없는 시간의 빈곤이고, 미발표 결과를 꺼내 놓을 수 없는 안전의 빈곤이며, 오늘 건넨 선물이 언젠가 인정으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신뢰의 빈곤이다. 내가 구조적 빈곤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부엌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새 뼈를 들여놓을 이유를 제도가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도 의심해야 한다. 주최자의 시선은 공정한가. 나는 그날 발표장에 있던 소수의 한국 연구자만을 보았고, 그들을 한국 전체로 일반화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 어쩌면 나는 내가 짠 초대 명단의 편향을, 혹은 그날의 컨디션과 발표 순서가 만든 우연을 구조의 증거로 오독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초파리와 신경과학 공동체에는 세계적 수준의 성취를 이룬 연구자들이 분명히 존재하며—네이처 인덱스 물리과학 부문에서 한국이 세계 6위에 오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나라의 연구 저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이 글은 결코 그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미발표 데이터를 움켜쥐는 태도가 한국만의 병리인 것도 아니다. 앨버츠(Bruce Alberts)와 키르슈너(Marc Kirschner), 틸먼(Shirley Tilghman), 바머스(Harold Varmus)가 2014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쓴 글은, 자원과 자리를 둘러싼 초경쟁(hypercompetition)이 근본적 발견에 필요한 창의성과 협력, 위험 감수와 독창적 사고를 억누른다고 경고했다. 방어적으로 데이터를 움켜쥐는 태도는 미국 과학에도 만연한, 초경쟁의 보편적 증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나의 결론은 오히려 단단해진다. 앨버츠들이 초경쟁을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시스템의 결함으로 진단했듯, 한국의 재탕 역시 개인의 품성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로 읽어야 한다. 개인을 탓하는 일은 쉽고, 또 부당하다. 뼈를 우려먹은 것은 그 연구자가 아니라, 그에게 새 뼈를 구할 시간도 이유도 주지 않은 제도다. 잿밥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 것은 그의 신앙심 부족이 아니라, 제사 자체에 아무런 보상도 걸어 두지 않은 평가 체계다.

컨퍼런스의 마지막 날, 나는 결국 세 개의 부엌을 본 셈이다. 매일 아침 새 뼈가 들어오는 부엌이 있었고, 한 마리 소를 평생에 걸쳐 발골하는 부엌이 있었으며, 냉동고의 헌 뼈를 몇 번이고 다시 고아 내는 부엌이 있었다. 세 부엌의 요리사들이 지닌 솜씨는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은 부엌으로 배달되는 것들이었다. 국물이 멀건 것은 뼈가 낡았기 때문이고, 뼈가 낡은 것은 부엌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엌의 가난은, 세계에서 둘째로 많은 돈을 연구에 쏟으면서도 시간과 안전과 신뢰를 사들이지 못한, 이 풍요한 나라가 스스로 선택한 빈곤이다. 선택된 빈곤이라는 사실에 나는 오히려 희망을 건다. 선택한 것은 다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 뼈를 고는 나라와 헌 뼈를 우려먹는 나라를 가르는 것은 과학자의 식탁이 아니라 국가의 부엌이며, 그 부엌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남은 가장 시급한 제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