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L;DR
- PBS는 사라졌지만, 자율은 아직 연구자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출연연을 과제 수주 경쟁에 묶어 둔 PBS가 폐지된 뒤, 기관이 얻은 자율을 개별 연구자와 연구팀까지 내려보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일본 리켄의 종신 수석과학자이기도 한 김유수 GIST 교수의 이야기다.
- 핵심은 ‘정당한 실패’를 지키는 제도다. 그는 연구의 독창성과 도전성은 동료가, 예산과 조직 운영은 따로 평가하자고 했다. 도전적인 연구가 정당한 과정을 거쳐 실패했다면 기관이 연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침 이번 주 KAIST는 ‘망한과제 자랑대회’로 실패학회를 연다.
- 초파리유전학자의 결론. 초파리유전학은 2년 동안 아무것도 찾지 못한 방에서 시작됐다. 역대 최대라는 약 40조 원의 R&D 예산안이 국회 심사에 들어가는 지금, 나는 예산의 크기보다 실패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보장되는지를 묻고 싶다.
초파리 연구실에는 버려지는 바이알이 많다. 교배가 어긋나 원하는 유전형이 나오지 않은 바이알, 표현형을 기대했지만 야생형과 아무 차이도 보이지 않은 바이알, 몇 주를 기다렸는데 끝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은 바이알들이다. 이 바이알들을 모아 소독기에 넣는 일은 연구실의 작고 조용한 의식이다. 그 안에 담긴 시간은 논문에도, 연차 보고서에도 남지 않는다.
이번 주 대덕에서 두 개의 소식이 나란히 들어왔다. 하나는 PBS가 폐지된 뒤의 연구 체계를 논의한 자리에서 나온 제언이다. 연구자가 도전할 권한을 받았다면 정당한 실패는 기관이 지켜 줘야 한다는 말이 그 중심에 있었다. 다른 하나는 KAIST가 실패를 숨기지 말자며 여는 학회 소식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역대 최대 규모라는 2027년도 정부 R&D 예산안이 국회 심사대에 오른다. 나는 이 세 소식을 하나의 질문으로 읽었다. 우리 연구 체계는 실패할 시간을 누구에게, 얼마나 허락하는가.

PBS가 떠난 자리
PBS(연구과제중심제도)는 출연연 연구자가 인건비의 상당 부분을 외부 과제를 따 와서 채우도록 만든 제도다. 취지는 경쟁과 효율이었다. 그러나 오래 지켜본 연구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비슷했다. 과제 수주가 연구의 목적이 되고, 실패할 수 있는 큰 질문보다 마감 안에 끝낼 수 있는 작은 과제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그 PBS가 폐지되었다.
헬로디디 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한국화학연구원에서 열린 ‘포스트 PBS’ 특별세션에서 김유수 GIST 화학과 교수는 이렇게 문제를 짚었다. 제도가 바뀌어 기관이 얻은 자율성이 개별 연구자와 연구팀에게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면, 장기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는 여전히 어렵다는 것이다. 신뢰에 기반한 자율은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제도가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이 대목이 PBS 폐지 이후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기관 단위의 예산 구조가 바뀌는 것과, 실험대 앞의 연구자가 ‘이번에는 망해도 되는 질문을 해 보자’고 마음먹을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앞의 것은 예산표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뒤의 것은 연구자의 하루에서만 확인된다.
연구자의 하루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아침에 무엇을 먼저 여는가. 실험 노트인가, 과제 관리 시스템인가. 일주일 가운데 며칠을 실험대 앞에서 보내고, 며칠을 보고서와 정산 서류 앞에서 보내는가. 제도의 변화가 진짜였는지는 몇 년 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졌는지로 판가름 날 것이다. 나는 PBS 폐지가 그 답을 바꾸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지만, 출발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리켄이라는 거울
김 교수는 1999년부터 일본 리켄에서 연구했고, 2015년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리켄의 종신 수석과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소개한 리켄의 예산 구조는 단순하다. 운영비 교부금이 약 절반, 목적이 정해진 정부 지원금이 약 4분의 1, 연구자가 바깥에서 따 오는 연구비가 약 4분의 1이다. 기관의 기본 재원이 두텁게 깔려 있고, 그 위에 경쟁이 얹혀 있다.
흥미로운 것은 돈보다 의사결정의 구조다. 300명가량의 연구책임자 가운데 40명 정도를 뽑아 만든 과학자 회의가 기관 운영과 연구 전략에 자문한다. 새로운 주제에는 최대 5년 동안 2억 엔을 지원하는 ‘파이오니어링 프로젝트’도 있다고 한다. 연구자가 기관의 방향을 정하는 자리에 앉아 있고, 새 질문에는 5년이라는 시간이 붙는다.
물론 리켄을 그대로 옮겨 올 수는 없다. 일본의 연구 문화와 고용 구조, 리켄이 겪은 나름의 문제들도 있다. 나는 리켄을 모범 답안이라기보다 거울로 읽는다.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이렇다. 기관의 기본 재원은 얇았고, 연구자는 기관의 방향을 정하는 자리보다 과제 공고문 앞에 더 오래 앉아 있었다. 이것은 나의 해석이다.

정당한 실패라는 말
이날 발표에서 가장 오래 남는 말은 ‘정당한 실패’였다. 김 교수는 연구의 독창성과 도전성은 그 분야의 동료 연구자가 평가하고, 예산과 조직 운영은 내부 위원회와 외부 평가로 따로 점검하자고 했다. 그리고 실패 가능성이 높은 연구에 도전할 권한을 줬다면, 정당한 과정을 거친 실패는 기관이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연구 부정에는 즉시 개입할 기준을 분명히 하고, 자율에는 과정과 자원 사용을 설명할 책임이 따른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 두 문장이 한 쌍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실패를 보호하는 일과 부정을 막는 일은 서로 반대 방향이 아니다. 무엇이 정당한 실패인지 말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정당하지 않은지도 분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주에 국회에서는 출연연과 연구자 창업기업 사이 계약의 절반 이상이 수의계약이었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를 곧바로 특혜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나왔다. 자율을 넓히려는 사회는 이런 질문에 투명하게 답하는 법도 함께 익혀야 한다.
KAIST 실패연구소가 이번 주 여는 실패학회의 첫 순서는 ‘망한과제 자랑대회’다. 이름만 들으면 웃음이 나지만, 나는 이 행사가 던지는 질문이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패를 자랑할 수 있으려면 그 실패가 연구자의 경력을 끝내지 않는다는 믿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 믿음은 행사 하나로 생기지 않는다. 평가표와 고용 계약과 다음 과제 심사에서 생긴다.
실패에도 결이 있다. 엉성한 설계나 게으름 때문에 생긴 실패가 있고, 좋은 질문을 성실하게 끝까지 밀어붙였는데 자연이 다른 답을 내놓은 실패가 있다. 뒤의 것을 가려내는 일은 그 분야를 아는 동료만이 할 수 있다. 김 교수가 연구의 내용은 동료가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숫자로 된 성과 지표는 두 실패를 구별하지 못한다. 둘 다 ‘목표 미달’이라는 같은 칸에 들어갈 뿐이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방
초파리유전학의 출발점에도 긴 공백이 있다. 토머스 헌트 모건은 컬럼비아 대학의 작은 방에서 초파리를 키우며 눈에 띄는 돌연변이를 찾았지만, 오랫동안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가 찾아온 동료에게 2년 동안의 일이 헛수고가 되었다고 털어놓았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자주 인용된다. 그리고 1910년, 붉은 눈 사이에서 흰 눈을 가진 수컷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한 마리에서 염색체 위의 유전자라는 생각이 자라났다.
나는 이 이야기를 성공담으로 읽고 싶지 않다. 모건의 방이 특별했던 것은 흰 눈 파리를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2년을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평가 기준으로 보면 그 2년은 성과 없는 과제였을 것이다. 중간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고, 다음 연구비를 걱정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론 역사를 오늘의 눈으로 다시 읽은 나의 상상이다.
머니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2027년도 정부 R&D 예산안은 약 39조 5천억 원으로 역대 최대이고, 국회 심사가 이번 주 시작된다. 출연연 연구자 처우 개선과 PBS 폐지 이후의 인건비 구조도 이 심사에 달려 있다고 한다. 나는 예산이 커지는 것을 반긴다. 다만 예산 심사장에서 한 번쯤은 이런 질문도 나왔으면 한다. 이 돈 가운데 얼마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 시간을 사는 데 쓰이는가.
버려지는 바이알을 소독기에 넣으며 나는 가끔 그 안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다음 질문을 위한 바닥이다. 정당한 실패를 지켜 주는 제도란 결국 그 바닥을 연구자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깔아 주겠다는 약속이다.
PBS는 떠났다. 그 빈자리에 무엇을 놓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과제 하나를 더 놓기보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2년을 버틸 수 있는 의자 하나를 놓고 싶다. 파리방의 전통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흰 눈의 파리보다, 그 파리를 기다린 시간일지도 모른다.
보통 과학자
출처
- “국가는 방향, 연구자는 도전”···포스트 PBS 연구체계 리켄 출신 김유수 교수 “자율·책임·신뢰로 출연연 혁신”. 헬로디디 (2026.11.02).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693
- “실패를 숨기지 않는다”···KAIST, 시행착오 공유의 장 연다. 헬로디디 (2026.11.01).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695
- ’40조’ 역대 최대 R&D 예산안 써낸 정부…최상위 AI·7대 SEED 심사받는다. 머니투데이 (2026.11.02). https://www.mt.co.kr/tech/2026/11/02/2026110114501590470
- [기자수첩] 연구자 창업 장려에 찬물 끼얹기?. 헬로디디 (2026.11.01).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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