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과학혁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실험(experiment)’이다. 수학만을 중심으로 사유했던 모두가 근대과학을 열지 못했다. 근대과학혁명이 핵심은 패러다임의 변화 따위가 아니라, 이론과 실험의 합일로 성공적인 과학적 방법론이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뉴턴이 한 일이다.
당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와 같은 합리론자들은 과학이 지닌 수학적 성격에만 주목했다. 이들은 수학이 자연과학의 핵심이라고 보고, 수학이 그 증명적 성격에 기초하여, 제일원리 또는 공리로부터 어떻게 결론들이 추론되는지를 증명함으로싸 과학의 결과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뉴턴은 실험 구상의 천재였다. 그는 다수의 경쟁 이론들이 저마다 수학적 설명 체계를 갖추고 있을 때에, 어떤 이론이 맞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테스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방법의 필요성을 제안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법론적 필요성을 제안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런 실험을 고안하는데 주력했다. 실로 뉴튼의 위대성은 실험을 통한 테스트의 중요성을 간파한 데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뉴튼의 이런 새로운 접근에 대해 “실험 철학(experimental philosophy)”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뉴튼의 실험적 방법이 스콜라주의적 방법, 데카르트주의적 방법과 근본적인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최희봉. (2004). 흄의 철학과 근대 과학 – Hume and Modern Science. 汎韓哲學, 34(-), 125–150. Retrieved from http://www.riss.kr/link?id=A45049682))
교과서적인 설명은 이렇다. 가이아 이론과 유기체적 세계관이 등장하는 뒷부분은 무시해도 좋다.
과학발전에 있어 뉴턴이 기여한 것은 많은 선행연구를 수학적 공식으로 종합했다는 사실보다는 그의 과학적 사고의 진행절차와 사고 방식이었다. 뉴턴은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연역적인 회의를 활용하면서도 실험적 방법을 통한 경험 과 사실에 의존하는 과 학적 실험법을 도출하였다. 여러 사실로부터 기 본원리를 도출하고 논리적으로 예상되는 결과가 일어나는지 증명하는 실험법을 제시하였다. 즉 추상적 이론과 경험적 증거를 동시에 만족시켰으며, 이 과학적 탐구법은 이후 과학연구의 기본적인 연구방법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뉴턴의 과학적 사고의 혁명은 당시 정치적 혁명보다 인류역사에 광범 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론-실험-증명이라는 과정을 통해 뉴턴이 갖게 된 패러다임은,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 잡하고 거대한 기계와 같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이었으며 이후 400여 년간 현대문명의 바탕이 되었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데카르트의 사상을 이어받은 기계론적 세계관은 과학 만능주의와 함 께 물질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다. 뉴턴의 근대적 과학관은 인간과 세 계에 대한 무한한 이해와 발전 가능성을 심어주었고, 뉴턴은 이 세계 관을 바탕에 두고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적 법칙으로 환원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환경파괴 등으로 인한 전지구적 문제가 대두되면서 가이아 이론과 함께 유기체적 세계관으 로 변화하게 되었다. ((김영훈, 개념적 접근을 통한 양자역학 이해 -1장 양자역학이란: 뉴턴의 시대, 화학공학소재연구정보센터, http://www.cheric.org/files/education/cyberlecture/e201001/e201001-101.pdf))
위키피디아에는 ‘뉴턴과학의 한계와 의의’라는 절이 존재한다.
18세기에 이처럼 널리 유행한 뉴턴과학은 하나의 뚜렷한 경향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사실 뉴턴을 표방하고 행해진 과학분야들은 서로 아주 다른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아주 정확하고 수학적이며 기계적인 연구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적이고 상상적인 ‘힘’들을 포함하는 사색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들 중 전자는 프린키피아의 영향을, 후자는 광학의 영향을 주로 보여주는데, 이 두 가지 경향은 뉴턴에 의해서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지 못했고, 18세기 뉴턴의 추종자들은 시기나 문제, 분야에 따라 그때그때 적합한 경향을 취했다. 따라서 18세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 공상적인 인력과 반발력을 가정한 공론과 사색, 추측이 많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프랑스에서 뉴턴역학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1730년경부터는 해석학의 방법에 바탕을 둔 뉴턴역학의 수학적 체계화도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뉴턴과학은 같은 과학의 내용이나 방법상의 구체적 경향 못지않게 과학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나타내 주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서로 분리된 채 존재하던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의 여러 분야들이 이제는 단일한 방법, 단일한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과학’이라는 단일한 분야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과학’이라는 분야가 그 분야 자체의 문제해결에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다른 분야의 문제해결에 본보기를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문화 전반과 사회에서 과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그동안 사회와 문화의 여러 분야들의 변두리에서 보잘것없이 존재하던 자연세계에 대한 여러 형태의 지식들이, 이제는 뉴턴과학이라는 기치 아래 하나의 단일한 분야가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차지하게 된 과학의 단일화된 이미지는 이렇게 형성되었다.
뉴턴의 실험혁명은 근대과학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마지막 연금술사 뉴턴이 근대과학의 시작을 알렸다는 것은 미스테리다. 비슷한 의미에서 마지막 박물학자 다윈이 진화론의 금자탑을 쌓았고, 마지막 고대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의 시작을 알렸다. 과학사의 아이러니다.
혹자는 왜 갈릴레오가 아니냐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갈릴레오에 대한 연구는 그가 실험을 자신의 완벽한 이론을 그저 예증하는 정도로만 사용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실험이 이론을 제한하는 근대과학의 세속화 정신은 따라서 뉴턴에서 완성된 것이 정확하다. 다음의 문장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갈릴레오의 과학에서 실험이 한 정확한 역할, 그리고 갈릴레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무시했다는 추측의 진실은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공을 떨어뜨렸다는 진부한 이야기가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갈릴레오가 낙하 법칙과 기타 운동학적 법칙 들에 도달한 방식에는 실제로 상당한 정도로 실험이 개입되어 있다. 그는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시험과 시도를 했다. 그는 그런 실험들을 기록한 방대한 원고를 남겼다. 갈릴레오는 유능한 실험가였다. 그가 망원경을 제작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손기술이 대단했고, 장치의 전문가였다. 이런 의미의 실험은 갈릴레오의 연구 방법 속에 확실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가 쉽게 추측하는 것과 달리 갈릴레오는 자신이 주장하는 명제를 ‘검증’하기 위해 실험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원리들이 옮음을 ‘예증’하기 위해 실험을 했다. 간단히 말해서 갈릴레오의 실험은 가설을 입증하지 않는다. 그의 실험은 이미 분석적인 추론을 통해 얻은 결론을 예증한다.((매클렐란 3세, 제임스 E, McClellan, J. E., Dorn, H., 도른해럴드, & 전대호. (2006). (과학과 기술로 본)세계사 강의. 서울 : 모티브북. Retrieved from http://www.riss.kr/link?id=M10281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