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쓰다보면, 자신의 주장에 근거와 정당성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과학자들이 출판한 논문을 참고문헌 Reference로 사용하게 된다. 학술지마다 인용을 색인하는 법이 달라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EndNote니 Mendelay니 Paper3니 하는 논문 참고문헌 색인용 프로그램을 워드프로세서와 함께 사용한다.
학술지마다 보통 참고문헌 숫자를 제한해놓는 경우가 많아서, 어떤 논문을 참고문헌에 넣고 빼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게다가 이 참고문헌으로 넣는 논문은 인용지수가 올라가기 때문에 거대학술지의 편집자들은 저자들에게 마지막에 자신들의 학술지 논문을 더 넣으라는 둥 하는 꼼수를 써서 학술지의 영향력 지수를 올리려는 짓거리를 하기도 한다. 물론 어떤 익명의 리뷰어들은 자신의 논문을 참고문헌으로 안 달았다는 이야기를 대놓고 하기도 하는데, 그게 딱히 어떤 잣대나 법이 있는게 아니라서, 과학자생태계는 이런 관행을 수백년 동안 거의 손대지 않고 가져오고 있다. 물론 지나친 악행은 처벌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참조문헌은 상당히 주관적인 영역일 수 밖에 없다. 지금처럼 논문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시절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얼마전 스쳐지났던 한 논문을 읽다가, 이 논문이 초파리 교미시간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내 논문을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스티븐 굿윈 Stephen Goodwin은 초파리의 성적이형성 Sexual dimorphism 분야에서 꽤나 유명한 영국의 과학자로, 무려 옥스포드 대학교 교수다.
Hania J Pavlou, Andrew C Lin, Megan C Neville, Tetsuya Nojima, Fengqiu Diao, Brian E Chen, Benjamin H White, Stephen F Goodwin (2016) Neural circuitry coordinating male copulation eLife 5:e20713
그를 딱 한 번 자넬리아 연구소의 VNC 관련 소규모 학회에서 만난 적이 있다. 덩치가 엄청 크고 영국 액센트가 센 과학자였고, 그의 스승인 노벨상 수상자 제프 홀 Jeff Hall에 대해 좀 알았기 때문에, 그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깊은 이야기는 역시 백인 특유의 포스 덕분에 나누지 (안)못했다. 여하튼 이렇게 생겼다.
오타와 대학에 있을때 잠시 트위터에서 영어로 초파리 행동유전학자들로부터 정보도 듣고 한 적이 있었는데, 굿윈이 휴먼프런티어재단에 함께 지원할 연구자도 한 명 소개시켜 준 적이 있고, 초파리도 몇 번 보내주고 했었다. 그런데 그럴때마다 상당히 권위적으로 나를 마치 아이 대하듯 하는 모습을 보고, 이후엔 따로 연락을 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2016년에 eLife에 저 논문을 냈다는건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다지 관심을 두지도 않았었다. Doublesex라는 유전자 하나를 가지고 몇 십년을 울궈먹는 논문에 질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마 아나키스트가 느낀 권위주의자의 역겨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젠 그들만의 리그에 끼고 싶다는 생각도, 그 작은 우물에서 아둥바둥대는 그들이 측은하기도 해서,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는데, 오늘 우연히 그 논문을 자세히 살피다 내 논문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그 행실이 괘씸해서 한 마디 적어봤다. 내 논문의 행동패러다임이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T. Chapman과 A. Bretmen 의 2009년 논문에서 나온 것인데, 이미 내 책 <플라이룸>에 두 개의 생물학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과의 악연을 적어두었다.
Bretman, A., Fricke, C., & Chapman, T. (2009). Plastic responses of male Drosophila melanogaster to the level of sperm competition increase male reproductive fitnes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Biological Sciences, 276(1662), 1705-1711.
음모론 아닌 음모론을 펼쳐보자면, 영국에서 초파리로 연구하는 그들이 서로 모를 것 같지는 않고, 고의적으로 내 논문을 인용하는 일에 어떤 합의를 본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까지 유명한가 싶기도 하고, 백인들의 그 편협함이 그들의 과학을 얼마나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다윈과 뉴턴의 나라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에 저렇게 한심하게 무너지는가 싶기도 하고. 얼마전 다녀온 호주 초파리학회에서 린다 패트리지 Linda Partridge를 만나 출판 준비중인 논문 이야기를 하면서, 린다에게 영국 진화생물학 그룹과의 이야기를 슬쩍 거내봤다. 왜 그들은 그렇게 행동유전학 그룹과의 대화를 꺼리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린다도 그런 문화를 알기는 아는지, 쓴웃음을 지었는데 명쾌한 답은 듣지 못했다. 린다는 나와 악연이 있는 그 진화생물학자들과 함께 논문을 쓴 적도 있는 초파리 진화유전학자다.
그나저나 나는 저렇게 치사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영국이 왜 망하는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