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박사과정 학생이 보내온 프로젝트 데이터 파일을 열었다. 학생도, 함께 프로젝트를 검토한 다른 대학원생들도 특별히 주목하지 않고 지나쳤던 파일이었다. 그런데 원본 이미지를 직접 클릭해서 하나하나 넘기다 보니 — 기묘한 것이 눈에 걸렸다. 여러 마리의 초파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누구도 기록하지 않은 표현형. 학생들이 ‘정상’이라고 암묵적으로 결론 내리고 넘어간 데이터 속에, 사실은 전혀 정상이 아닌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이것은 실험실의 평범한 하루에 일어난 작은 사건이지만, 나는 이 순간이 과학 연구의 본질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데이터는 누가 봐야 하는가
현대 과학 연구는 분업을 기반으로 돌아간다. 학부생이 샘플을 만들고, 대학원생이 실험을 설계하고, 박사후연구원이 데이터를 정리하며, 교수는 그것을 검토하고 논문을 쓴다. 이 구조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이 분업의 연쇄 속에서 ‘원본 데이터를 직접 보는 사람’이 점점 사라진다는 데 있다.
최근 몇 년간 네이처, 사이언스, 셀 등 최상위 저널에서 철회된 논문들의 공통 패턴을 생각해보자. 대규모 데이터 조작 사건 — 논문 철회 추적 사이트인 Retraction Watch가 수년간 기록해온 사례들 — 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비슷한 구조가 반복된다. 1저자(흔히 박사과정생이나 박사후연구원)가 데이터를 가공하거나 조작하고, 교신저자(지도교수)는 그것을 그대로 출판한다. 문제가 터진 뒤 교수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원본 데이터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이 고백은 면죄부가 아니다. 그것은 직무유기의 고백이다.
지도교수의 역할은 단지 논문의 ‘감수자’가 아니다. 교수는 데이터의 최종 해석자이자 과학적 주장의 책임자다. 1저자가 제출한 정제된 결과물만을 보고 논문을 쓴다는 것은, 건축가가 시공 현장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고 완공 사진만 보고 안전 확인서에 서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편리하고 빠를 수 있다. 그러나 그 건물이 무너졌을 때, 책임은 서명한 사람에게 있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대형 연구실을 운영하는 PI(Principal Investigator)는 수십 명의 학생과 수십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관리한다. 매일 원본 파일을 열어볼 시간이 없다는 현실은 이해한다. 그러나 ‘바쁨’이 과학적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 바쁨 속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원본 데이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습관이 — 오늘 내가 우연히 발견한 이상한 표현형처럼 — 과학의 신뢰성을 지탱한다.
데이터를 직접 보는 눈은, 결국 과학자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도구다.
정치도 예외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는 실험실 밖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을 보면,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 각 부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그는 단순히 보고서를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수치를 짚고 데이터를 근거로 질문을 던진다. “이 수치는 어떻게 산출됐습니까?” “이 항목과 저 항목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관료들이 정제해서 올려 보내는 ‘결론’만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론을 만든 근거를 직접 파고드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관료 조직은 본질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정보’를 아름답게 다듬는 경향이 있다. 불편한 진실은 각주로 내려가고, 문제적 수치는 맥락 속에 희석되며, 정책의 실패는 ‘개선 과제’라는 언어로 재포장된다. 이 과정은 악의에서 시작되는 경우보다, 조직의 관성과 보고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리고 최종 결정권자가 그 정제된 보고서만을 소비할 때, 조직은 현실과 점점 유리되기 시작한다.
실험실에서 교수가 원본 데이터를 보지 않으면 논문이 철회되듯, 국가를 운영하는 리더가 가공된 보고서만 보면 정책이 ‘철회’된다 — 단지 논문 철회와 달리, 그 철회는 국민의 삶 속에서 훨씬 큰 비용으로 돌아온다.
연구소가 ‘똥치우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오늘, 이재명 대통령이 한국의 정부출연연구소(출연연) 구조를 정면으로 지적했다. 연구가 중심이어야 할 기관에 연구원보다 행정 인력이 더 많고, 연구소의 실질적 권력이 행정 조직으로 넘어간 기형적 구조 말이다.
이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구조적 병폐다. 출연연은 원래 국가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기관들은 퇴직 공무원의 재취업처가 되고, 낙하산 인사의 착지 공간이 되었다. 연구자들은 그 속에서 행정의 통제를 받으며 창의적 연구보다 서류 작성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 세계 수준의 연구자는 출연연을 떠나거나 처음부터 오지 않는다. 남는 것은 관성으로 유지되는 조직과, 연구의 언어를 쓰지만 실질은 행정 기관인 껍데기다. 국가 R&D 예산은 매년 증가하는데 그 성과가 국가 경쟁력으로 전환되지 않는 구조적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 있다.
만약 이번 정부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출연연은 결국 퇴직 공무원과 관리직이 점령한, 세금으로 운영되는 거대한 허울이 될 것이다. 연구소가 연구자의 공간이 아니라 퇴직자를 위한 사후 관리 기관이 될 때, 그 비용은 고스란히 국가의 미래 경쟁력에서 차감된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미 수십 년째 그 차감이 진행 중이다.

결국, 얼마나 깊이 들여다보느냐
실험실로 돌아오자.
오늘 내가 이상한 표현형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히 예리한 눈을 가져서가 아니다. 그냥 직접 봤기 때문이다. 클릭 한 번, 파일 하나하나를 넘기는 그 단순한 행위 때문이다. 학생이 ‘이상 없다’고 요약한 결론을 믿는 대신, 그 결론이 나온 원본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도, 정치에서도, 조직 경영에서도 — 결국 모든 것은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최종 책임자가 얼마나 깊이 들여다보는가. 요약된 결론을 소비하는 것에 안주하는가, 아니면 그 결론을 만든 원본 데이터와 직접 마주하는가.
정제된 보고서는 아름답다. 깔끔한 그래프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아름다움이,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추는 포장지가 된다.
원본을 보는 눈 — 그것이 과학자에게도, 리더에게도,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에게도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그 눈을 잃는 순간, 조직은 서서히 현실에서 유리되기 시작하고, 그 유리의 결과는 언제나 — 논문 철회든, 정책 실패든, 연구소의 황폐화든 — 가장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청구서로 날아든다.
이 글은 오늘 하루 실험실에서 원본 데이터를 열다가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다. 초파리 한 마리의 이상한 날개가, 한국 과학과 정치의 구조적 문제까지 이어졌다. 과학이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 아주 작은 것을 직접 들여다보는 행위가, 가장 큰 질문들로 우리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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