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파리의 뇌는 작다. 성체의 것이라 해봐야 양귀비 씨 한 알만 한 덩어리이고, 배아의 신경계는 그보다 더 작다. 그 미세한 조직을 슬라이드 위에 올려두고, 나는 거의 삼십 년 동안 똑같은 의식(儀式)을 되풀이해왔다. 고정하고, 씻고, 항체를 한 방울 떨어뜨리고, 하룻밤을 기다린다. 이튿날 공초점 현미경 앞에 앉아 형광 신호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그 순간만큼 과학자의 욕망이 벌거벗은 채 드러나는 시간도 드물다. 나는 신경세포가 초록으로 빛나기를, 그 빛이 머릿속에 미리 그려둔 패턴 그대로 자리 잡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바로 그 간절함이 실험실에서 가장 위험한 감정이라는 것을,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인정하게 되었다.
초파리 유전학 분야의 재현성은 다른 분야에 비해 상당히 크다. 인간이나 생쥐의 세포를 사용하는 분자생물학 실험실에서 대학원생으로 연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던 실험들은 항체를 사용했다. 웨스턴 블랏, ELISA, 항체를 이용한 세포형광표지 등등, 당시 나에게 생물학에 대한 의심이 시작된 것은 항체를 쓰면서부터였다. 커버슬라이드에 올린 세포들을 고정하고, 비싼 단일클론 항체를 희석해 하룻밤 담가두고, 다음 날 형광 신호가 내가 기대한 바로 그 자리에 떠오르면 가슴이 뛰었다. 석사 과정 내내 매일같이 한 판씩 해내던 웨스턴 블랏은 더더욱 항체에 의존적인 실험이었다. 그런데 가끔 옆 실험실에서는 같은 항체가 도무지 듣지 않는다고 했다. 생명과학자라면 누구나 안다. 모두에게 듣지 않는 항체가 유독 내 손에서만 아름답게 작동하는 그 기묘한 순간을. 우리는 그것을 손재주라 부르며 웃는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 나는 묻고 싶었다. 나는 거기 있는 것을 본 것인가, 보고 싶은 것을 본 것인가.
항체는 믿음의 시약이다. 작은 튜브에 적힌 카탈로그 번호 하나를 회사 홈페이지 검색창에 입력하고, 그것이 내가 찾는 단 하나의 단백질에만 달라붙으리라 믿으며 결제 버튼을 누른다. 며칠 뒤 젤 위에 밴드 하나가 떠오르면 우리는 안도한다. 그 밴드의 진하기를 로딩 컨트롤에 맞춰 정규화하고, 막대그래프를 그리고, 별표를 찍는다. 그러나 그 밴드가 정말로 그 단백질인지 우리는 좀처럼 되묻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보고 싶었던 밴드이기 때문이다. 실험은 가설을 시험하는 자리라고 배웠지만, 정작 벤치가 가르쳐준 것은 따로 있었다. 눈은 자주 마음의 시중을 든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측정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달 초 사이언스와 한 연구 통합성 블로그에 실린 이야기는 그 위험한 간절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국의 분자생물학자 숄토 데이비드는 노화와 암 연구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백질 하나를 추적했다. 흔히 p16이라 줄여 부르는 이 단백질의 정식 이름은 p16-INK4a로, CDKN2A 유전자가 만드는 종양 억제 인자이자 세포 노화의 대표 표지자다. 문제는 이름에 있었다. 세포의 액틴 골격을 이루는, 노화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단백질 하나에도 하필 p16-ARC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두 단백질은 서열도 기능도 전혀 다르지만, 공교롭게도 분자량이 비슷해 젤 위에서 같은 높이에 밴드를 남긴다. 그래서 잘못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문제는 항체 회사의 검색창이었다. 애브캠 사이트에 ‘p16’을 치면 맨 위에 뜨는 것이 p16-ARC 항체다. 제품 설명에는 친절하게 적혀 있다. 이 항체는 p16-ARC에 결합하며 CDKN2A/p16INK4a와는 교차 반응이 없다고. 데이비드는 그 항체 코드들이 인용된 논문 사백여 편을 추적했고, 본문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삼백삼십사 편 가운데 95퍼센트가 틀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노화 표지자 p16-INK4a를 측정한다면서, p16-INK4a에는 결합하지 않는다고 상자에 명시된 항체를 쓴 것이다. 그 논문들은 무명의 저널에 실린 것이 아니다. 네이처, 네이처 메디신, 캔서 셀, 이라이프,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솔크 연구소,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스탠퍼드, 존스홉킨스, 미국 국립암연구소, 도쿄대학, 그리고 수많은 중국 연구실의 이름이 그 목록에 박혀 있다. 제조사의 제품 설명서에는 그 항체가 p16-INK4a에는 교차반응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적혀 있었는데도 말이다. 더 기막힌 것은, 어느 공급사는 그 액틴 단백질을 자기네 제품 설명에서 버젓이 ‘종양 억제 인자’라 소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때 산타크루즈사가 비특이적 항체 하나를 팔아 천사백 편이 넘는 논문을 오염시킨 사건이 있었지만, 그것은 적어도 제조사의 잘못이었다. 이번 일은 다르다. 아무도 그 항체를 p16-INK4a용이라 속이지 않았다. 데이비드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명백한 자책골이다.

그러나 정말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대목은 따로 있다. p16-ARC는 거의 모든 세포에 풍부하게, 늘 일정하게 발현된다. 베타액틴처럼. 다시 말해 그것은 본질적으로 로딩 컨트롤, 실험이 균등하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하는 대조선에 가깝다. 그런데 수백 편의 논문이 그 대조선이 노화에 따라 오르내렸다고 보고했다. 잘못된 항체로도 ‘기대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직하게 “p16은 변하지 않았다”고 적은 소수의 논문이 오히려 진실에 가장 가까웠다. 변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그렇다면 나머지 수백 편의 그 깔끔한 밴드들은 어디서 왔는가. 답은 불편하다. 데이터가 기대에 맞춰 다듬어졌거나, 아예 만들어졌다는 것. 이미 네 편 이상이 철회되었다. 한 편집자는 이 모든 풍경을 두고 ‘의지의 승리’라 불렀다. 보고 싶은 결과가 먼저 있었고, 항체는 그 의지에 굴복했다. 그리고 2025년은 잘못된 p16 논문이 가장 많이 쏟아진 해였다. 검색창 맨 위에 그 항체가 떠 있는 한, 이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상상해보자. 한 실험실에서 여러 대학원생이 그 항체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지도교수에게 닦달당한다. 그런데 유독 한 학생의 손에서만 아름다운 밴드가 떠오른다. 그 학생은 네이처에 논문을 싣고, 빛나는 추천서를 받고, 다음 자리로 떠난다. 시스템은 정직한 실패가 아니라 화려한 성공을 선택한다. 이것은 한 개인의 부정이 아니다. 부정을 길러내도록 설계된 구조의 문제다.

이 풍경이 낯설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생물학에는 이미 똑같이 생긴 집단적 착각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의 염색체가 마흔여섯 개, 곧 스물세 쌍이라는 것을 초등학생도 안다. 그러나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교과서는 그 수를 마흔여덟 개라 가르쳤다. 1912년 한 세포학자가 이미 마흔여덟이라는 숫자를 내놓았고, 1921년 텍사스의 시어필러스 페인터가 사람의 정자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확정했다. 흥미롭게도 페인터는 처음엔 마흔여섯 개일 수도 있다고 적었으나, 곧 더 ‘표준적인’ 마흔여덟 개로 돌아섰다. 표본은 엉켜 있었고 기법은 조악했으며 권위는 단단했다. 그렇게 그 숫자는 삼십 년 넘게 흔들림 없는 사실로 군림했다. 권위가 사실을 확인해줄 뿐이라는 우리의 순진한 믿음은, 이런 일화 앞에서 자주 무너진다. 권위는 종종 사실을 만들어낸다.
1956년,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전쟁 포로의 시간을 견뎌낸 식물유전학자 조 힌 초가 알베르트 레반의 실험실에서 사람의 세포를 새로운 기법으로 펼쳐 보았을 때, 그는 자꾸만 마흔여섯 개를 세었다. 저장액으로 세포를 부풀리고, 콜히친으로 분열을 멈춰 세우고, 슬라이드 위에 짓눌러 엉킨 실타래를 풀어낸 표본이었다. 다른 슬라이드를 집어 들어도 마흔여섯이었다. 한밤중 홀로 현미경 앞에 앉아 이백쉰 개가 넘는 세포를 센 끝에 그는 확신했다. 페인터도, 세상의 모든 교과서도 틀렸다고.
가장 서늘한 대목은 그다음이다. 초는 자신의 발견 이후 옛 교과서에 실린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명백히 마흔여섯 개의 염색체가 찍혀 있었다. 누구든 셀 수 있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삼십 년 동안 아무도 그것을 마흔여섯으로 세지 않았다. 페인터의 권위가 그들의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우연히 마흔여섯을 센 연구자들조차 자기 결과를 의심하거나, 무언가 잘못되었으리라 여기며 데이터를 조용히 묻어버렸다. 정답은 내내 사진 속에 또렷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보고 싶은 숫자를 세었을 뿐이다.

두 이야기는 칠십 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과학의 실패는 대개 개인의 어리석음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시스템에서 온다. 예상된 결과를 들고 온 사람에게 상을 주고, 이상한 결과를 들고 온 사람에게 침묵을 안기는 구조 말이다. 한 연구자는 그 구조를 이렇게 그려 보였다. 어느 실험실에서 여러 대학원생이 그 잘못된 항체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지도교수에게 시달리는데, 유독 한 명의 ‘뛰어난’ 학생이 아름다운 밴드를 만들어낸다. 그는 좋은 저널에 논문을 싣고 빛나는 추천서를 받는다. 시스템은 그렇게,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데 능한 사람을 골라 길러낸다. 양성 결과와 새로움에는 지면과 연구비가 주어지지만, 음성 결과와 재현에는 서랍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틀린 답을 빠르게 내는 일이 옳은 답을 느리게 내는 일보다 늘 더 보상받는 구조에서, 정직함은 이내 사치가 된다.
통계학자 앤드루 겔먼이 ‘갈라지는 길들의 정원’이라 부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연구자에게는 무수한 선택의 자유도가 주어진다. 어떤 항체를 살지, 어떤 밴드를 보여줄지, 어떤 결과를 보고하고 어떤 결과를 서랍에 넣을지. 그 자유도의 끝에서 데이터는 차츰 실재와의 끈을 놓고 연구자의 욕망과의 끈을 붙든다. 데이비드의 말처럼, 연구 결과가 생물학적 실재와 느슨하게만 연결된 채 수백 편씩 출판되는 것이다. 로딩 컨트롤을 노화의 표지자로 바꿔치기해도 십 년 넘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면, 우리가 쌓아 올린 문헌은 대체 무엇을 측정하고 있는 것인가. 도쿄대에서 나온 사이언스 논문도, 존스홉킨스와 스탠퍼드의 논문도, 우한과 마드리드의 논문도 똑같이 걸려들었다. 그리고 가장 쓰린 아이러니는, 그 오염된 논문 가운데 하나의 공저자가 다름 아닌 네이처가 재현성의 투사로 추켜세운 학자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는 한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분명히 해두자. 이것은 서양의 실패도 동양의 실패도 아니다. 이것은 지구 전체의 과학이 무엇으로 동기부여되는가의 문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한국이 위태롭다. 우리는 지표의 사다리를 오르는 데에는 누구보다 빨랐으나, 그 사다리에 따라붙는 질병을 막아낼 항체는 끝내 수입하지 못했다. 숄토 데이비드 같은 오류 사냥꾼의 문화, 펍피어처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검증이 오가는 공간, 그리고 무엇보다 ‘임금님의 염색체는 마흔여섯 개’라고 말하는 사람을 끝까지 견뎌주는 제도적 관용 말이다. 기초과학연구원이 경쟁적 기계론 연구의 트랙을 조금 더 빨리 달리는 데에만 골몰하는 한, 우리는 더 정교한 밴드를 더 많이 만들어낼 뿐, 그 밴드가 진짜냐고 되묻는 과학에는 영영 닿지 못한다. 자연을 오래 들여다보는 박물학자의 눈과, 예상된 신호를 효율적으로 찍어내는 공장의 눈은 끝내 다른 것을 본다.
나의 스승들, 그러니까 1973년 노벨상을 함께 받은 동물행동학자들이 가르친 과학은 달랐다. 그들은 유행하는 단백질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궁금해서 들여다보았다. p16 사태의 뿌리에는 호기심의 부재가 있다. 아무도 “이 밴드가 정말 무엇에 결합하는가”라는, 가장 기초적인 박물학자의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 분야는 이미 원하는 답을 알고 있었으므로. 호기심이라면 녹아웃 대조군을 단 한 번이라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표를 좇는 과학은 젤을 돌렸고, 논문을 냈다.
결국 두 종류의 과학이 있다. 보고 싶은 것을 세는 과학과, 거기 실제로 있는 것을 세는 과학. 의지로 밴드를 빚어내는 과학과, 그 밴드가 무엇인지 끝내 캐묻는 과학. 페인터의 권위에 눈멀어 마흔여덟을 세던 삼십 년의 과학과, 한밤중 홀로 현미경 앞에 앉아 이백쉰 개의 세포를 다시 세어 마흔여섯을 확인한 한 사람의 과학. 우리가 둘 중 어느 쪽을 키워낼지는, 누구에게 상을 주고 누구에게 침묵을 줄 것인가를 정하는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항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상자에는 진실이 적혀 있었다. 염색체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사진 속에는 마흔여섯이 있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언제나, 이미 답을 안다고 믿어버린 우리의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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