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그린스펀이 죽었다는 소식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뜬 건 지난 6월 22일이었다. 백 살, 파킨슨병 합병증. 29년을 함께 산 부인 앤드리아 미첼은 그를 “거인 같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낯익은 이름 하나가 타임라인에 다시 걸렸다. 양신규.
페이스북 지인들이 쓴 두 편의 글이 거의 동시에 올라왔다. 하나는 90년대 생산성 역설을 오늘의 AI 논쟁 위에 포개는 에세이였고, 다른 하나는 그린스펀의 부음에 부쳐 그를 직접 만났던 이가 쓴 회고였다. 두 글 모두 같은 이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MIT의 대학원생이었고, 브린욜프슨의 제자였고, 컴퓨터 자산 1달러가 시장가치 10달러를 만든다는 것을 숫자로 증명해 낸 사람. 그리고 2005년, 그 증명이 옳았음을 세상이 알아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

두 글의 저자들에게 양신규는 경제학자였다. 하지만 나에게 양신규는 물리학자로 그리고 진보적 과학자로 기억되어 있다.
내가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건 2000년대 초, 인터넷 게시판이 아직 지식인들의 콜로세움이던 시절이었다. 소칼 사건의 여진이 한국에도 밀려오던 때, 서울대 물리학과 동기 두 사람이 한 과학 게시판에서 정면으로 붙었다. 한쪽은 홍성욱, 지금은 서울대에서 과학사를 가르치는 그 홍성욱이었다. 다른 한쪽이 양신규였다.
논쟁의 표면적인 주제는 데이비드 블루어의 스트롱 프로그램과, 포스트모더니즘이 과학사회학에 빌려준 알량한 정당성이었다. 홍성욱은 소칼의 공격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그가 과학사회학과 과학철학을 잘 모른 채 칼을 휘둘렀다고 비판하는 글을 썼다. 양신규는 그 글을 포스트모더니즘 옹호로 읽고 반박에 나섰다. 논쟁은 곁가지를 치며 미로처럼 번졌고, 나중에는 원래 무엇을 다투고 있었는지조차 흐릿해졌다. 허수아비 때리기로 시작해서 자존심 대결로 끝났다는 게 뒷날의 중평이다.
그때 나는 그저 게시판을 눈팅하던 젊은 과학도였다. 물리학과를 나와 MIT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그의 이력은, 당시엔 그저 흥미로운 여담이었다. 날카롭고 물러서지 않는 논객 — 그것이 내가 양신규에게 처음 붙인 이름이었다. 경제학자 양신규를 만나기까지는 몇 년이 더 필요했다.
2009년, 나는 개인 블로그에 짧은 글 하나를 남겼다. 좌빨 과학 블로거가 추천하는 책 세 권에 관한 글이었는데, 본문보다 각주 하나가 더 오래 남았다. 이렇게 썼다.
“과학자로 이러한 논쟁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많이 알지는 못하는데, 그 중 양신규는 독보적이다. 물리학과 출신으로 경영학 경제학을 공부했던 그는 홍성욱-양신규 논쟁을 통해 과학사회학의 Strong Program과 전쟁을 벌였고, 그의 정치적 성향을 월간 말이나 여러 게시판을 통해 표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학자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조만간 양신규에 관한 글을 한편 쓸 작정이다. 나는 너무 그를 늦게 알았다.”
그 밑에는 각주의 각주도 하나 달려 있었다. “양신규라는 학자의 죽음도 최근에야 알았다. 유일하게 내가 추적하고 싶은 학자는 양신규가 유일하다.”
그 후로 17년이 흘렀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정확히는, 지킬 방법을 몰랐다. 그가 남긴 논문 몇 편,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게시판 논쟁의 흐릿한 기억뿐이었으니까. 이번에 그린스펀의 부음과 함께 그의 이름이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면, 이 약속은 아마 계속 미뤄졌을 것이다.
이제야 그를 제대로 추적해 본다.
양신규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MIT 슬론경영대학원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94년, 석사 논문 한 편을 제출했다. 제목은 「기업의 IT 투자와 시장가치의 관계」. 에릭 브린욜프슨은 훗날 이 논문을 회고하며, 자신이 읽어본 석사 논문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었다고 했다. 슬론의 학장과, 노벨상을 받은 로버트 솔로가 컴퓨터에 대해 내린 결론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담고 있었다고도 했다.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질문은 하나였다. 왜 컴퓨터에 그렇게 돈을 쏟아붓는데 생산성 통계는 꿈쩍하지 않는가. 솔로는 이미 1987년에 이렇게 쏘아붙인 바 있었다. “컴퓨터 시대는 어디서나 보이는데, 생산성 통계에서만 보이지 않는다.” 훗날 이 논쟁에서 회의론을 대표하게 되는 노스웨스턴대의 로버트 고든이, 다름 아닌 솔로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계보는 이렇게 학문 안에서도 갈라진다.
양신규와 브린욜프슨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측정하고 있는가. 그들은 미국 대기업 1,031곳의 1987년부터 1994년까지 데이터를 뜯어봤다. 회계장부가 아니라 주식시장을 봤다. 결과는 명확했다. 컴퓨터 자산이 1달러 늘어날 때마다, 그 기업의 시장가치는 평균 5달러에서 20달러, 대략 10달러 가까이 늘어났다. 다른 자산에 투자했을 때는 1달러가 딱 1달러만큼의 가치를 만들었을 뿐인데.
시장이 미쳤거나, 회계장부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양신규는 후자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그것을 조직자본이라 불렀다. 분권화된 의사결정, 스스로 조직되는 팀, 넓어진 직무 범위, 재훈련된 인력, 다시 설계된 업무 프로세스 — 컴퓨터를 사는 것과 함께 이루어지지만 비용으로만 기록되는 투자들. 시장은 그것까지 계산에 넣고 있었다.
이 발견은 그린스펀의 손에서 무기가 됐다. 1990년대 후반, 실업률이 떨어지는데도 물가는 오르지 않는 이상한 호황이 이어지자, 필립스 곡선을 신봉하는 매파들은 선제적 금리 인상을 요구했다. 그린스펀은 버텼다. IT 혁신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 물가 압력을 흡수하고 있다는 직관은 있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실증 근거가 필요했다. 양신규와 브린욜프슨의 연구가 그 근거였다. 그린스펀은 의회 증언에서, 공개 강연에서 이들의 연구를 인용했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긴 경기 확장기 — 1991년 3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이어진 그 10년의 배후에,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온 한 젊은 대학원생의 석사 논문이 있었던 셈이다. 공교롭게도 그린스펀 자신도 뉴욕대 박사였다. 훗날 양신규가 자리 잡게 될 학교의 박사였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에 묘한 순환성을 더한다.
양신규는 숫자와 논문 사이에만 머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월간 말에 글을 썼고, 여러 인터넷 게시판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굽히지 않고 드러냈다. 홍성욱과 벌인 논쟁이 그 단면이었다. 물리학에서 출발해 경제학의 언어로 시장을 설명하면서도, 그는 끝까지 논객이었다.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가 된 뒤에도 아마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2005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우울증 끝의 선택이었다고 전해진다. 너무 이른 나이였다. 그가 옳았다는 것을 세상이 뒤늦게 인정하는 광경을, 그는 보지 못했다.
2018년, 브린욜프슨은 대니얼 록, 채드 사이버슨과 함께 「생산성 J커브」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일반목적기술은 도입 초기에 오히려 생산성을 끌어내렸다가, 보완적인 무형자산이 충분히 쌓인 뒤에야 폭발적으로 상승시킨다는 이론이었다. 30년 전 양신규가 데이터로 보여준 것을, 이제 모델로 정식화한 셈이다. 그 논문 첫머리, 감사의 말 앞자리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우리는 이 논문을 양신규를 추모하며 바친다, 무형자산의 역할에 대한 그의 선구적인 통찰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각주가 아니라 헌사였다. 학자에게 그보다 정중한 인정은 없다.
지금 AI를 두고 그때와 똑같은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런 애쓰모글루는 향후 10년간 AI가 총요소생산성에 기여하는 정도는 1%에도 못 미칠 거라고 못박는다. 골드만삭스는 AI가 10년간 전 세계 GDP를 7퍼센트 끌어올릴 거라 전망하고, 매킨지는 연간 2조 6천억에서 4조 4천억 달러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예측은 늘 이렇게 갈린다. 그리고 브린욜프슨은 여전히 J커브로 답한다. 인간을 흉내 내고 대체하는 데만 골몰하는 AI는 ‘튜링 트랩’에 빠진다고, 인간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조직과 함께 투자해야 진짜 생산성이 온다고. 30년 전 양신규가 스승에게 가르쳐 준 것과 같은 말이다.
물리학에서 경제학으로 건너간 사람이 남긴 것은 결국 하나의 질문이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측정하고 있는가. 장부에 적히는 것과 실제로 가치를 만드는 것은 왜 이렇게 다른가. 이 질문은 컴퓨터 시대에도, AI 시대에도 똑같이 유효하다. 그리고 이 질문을 처음 숫자로 증명해 낸 사람은, 그 증명이 옳았다는 걸 세상으로부터 확인받지 못한 채 떠났다.
나는 초파리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한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 갈래가 어디서 갈라졌는지, 누가 먼저 그 길을 냈는지 알고 싶어지는 것은 과학자의 오랜 습성이다. 모건의 초파리방을 거슬러 올라가듯, 나는 이제서야 양신규의 이름도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다.
17년 전 나는 그를 너무 늦게 알았다고 썼다. 이제는 이렇게 고쳐 쓴다. 늦었지만, 결국 도착했다고. 어떤 이름은 부고 옆에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물리학에서 와서 경제학의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고, 논객으로 살다가, 결국 각주가 아니라 헌사로 남은 이름. 보통의 과학자인 나는 그 이름 하나를 이제야 제자리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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