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L;DR
- 독일에서 온 물리학자가 한국에서 교과서를 고쳤다. IBS 양자나노과학연구단의 드미트리 보로딘 그룹리더 연구팀은 막스플랑크 다학제과학연구소와 함께, 계단처럼 층진 백금 표면에서 분자와 금속을 잇는 전자가 약 100옹스트롬에 걸쳐 퍼져 있음을 실험으로 보였다. 결과는 10월 30일 사이언스에 실렸다.
- 그가 한국에 온 이유는 ‘연구하러’였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괴팅겐대 박사후연구원을 마치고 2023년 초 한국에 왔고, 국경이 닫혀 있던 코로나19 시기에 한국행을 정했다. 인재 유출을 걱정하는 나라에 들어온 드문 이야기다.
- 초파리유전학자의 결론. 과학자는 돈보다 먼저 ‘연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움직인다. 파리방이 세계의 젊은 연구자를 끌어당긴 것도 연봉이 아니라 열린 실험실이었다. 한국이 붙잡아야 할 것은 사람보다 먼저 그런 실험실이다.
초파리 연구실의 아침은 물건을 받는 일로 시작될 때가 많다. 다른 나라의 스톡센터나 동료 연구실에서 보낸 작은 상자가 도착하면, 우리는 바이알을 하나씩 꺼내 파리가 살아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파리는 여권 없이 국경을 넘는다. 정확히는 수많은 서류와 검역을 거쳐 넘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그 이동이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연구자가 국경을 넘을 때는 파리보다 훨씬 많은 것이 따라 움직인다. 가족, 비자, 연구비,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10월 30일 아침 머니투데이는 그 질문에 한국을 답으로 고른 한 물리학자의 이야기를 실었다. 독일을 떠나 한국에 온 연구자가 사이언스에 기존 이론을 뒤집는 결과를 냈다는 기사였다. 나는 중국에서 연구실을 꾸리는 한국인 과학자로서 이 기사를 남다르게 읽었다.
계단 위의 전자

먼저 과학부터 보자. 기사에 따르면 IBS 양자나노과학연구단의 드미트리 보로딘 그룹리더 연구팀은 독일 막스플랑크 다학제과학연구소와 함께, 계단처럼 층층이 놓인 백금 표면 위에서 암모니아, 일산화탄소, 일산화질소 분자가 얼마나 단단히 붙는지를 측정했다. 그 결과 분자와 금속 표면 사이의 결합을 만드는 전자가 약 100옹스트롬, 그러니까 원자 수십 개에 걸친 거리까지 퍼져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처음 보였다고 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그동안 표면화학에서는 분자가 붙은 자리 바로 주변의 좁은 영역만 결합 세기를 결정한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촉매가 그 위의 분자를 붙잡고 놓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이 ‘국소성’의 가정은 계산을 단순하게 만들어 주는 편리한 출발점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결합이 생각보다 훨씬 넓은 이웃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물리화학자가 아니어서 이 결과의 세부를 평가할 자격은 없다. 다만 생물학자로서 이 이야기에서 익숙한 무늬를 본다. 한 자리의 성질이 그 자리만으로 정해지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계단의 모서리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 연구자의 성과도 그렇다. 우리는 논문 한 편을 한 사람의 능력으로 계산하는 데 익숙하지만, 실제로는 그 연구자가 놓인 실험실과 기관과 나라라는 넓은 표면이 결합의 세기를 정한다. 이것은 나의 비유일 뿐이지만, 오늘 이야기의 실마리가 된다.
연구하러 왔다는 말

기사가 더 흥미로웠던 것은 연구자의 이력이다. 보로딘은 독일 괴팅겐대에서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마치고 2023년 초 한국으로 와서 약 3년 동안 이 연구를 이어 왔다. 기사는 그가 코로나19로 국경이 닫혀 있던 시기에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전한다. 기사 제목이 붙인 말은 짧았다. 연구하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다.
이 말이 낯설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그동안 반대 방향의 이야기만 들어 왔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은 몇 년째 이공계 인재 유출을 다뤄 왔고, 중국의 파격적인 연봉과 주거 지원, 미국의 연구 환경과 비교하며 한국이 사람을 붙잡지 못한다고 걱정해 왔다. 그런 가운데 한 외국인 연구자가 한국을 ‘연구할 수 있는 곳’으로 골랐다는 사실은 작지만 의미 있는 반례다.
그렇다고 이 한 사례로 한국의 연구 환경이 매력적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같은 매체는 작년 9월 ‘실험할 곳이 없다’는 제목으로 한국에 온 해외 연구자들이 처한 어려움을 다룬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제목만 보아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과 그 사람이 실험할 공간과 시간을 주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보로딘의 경우는 IBS라는, 장기적이고 비교적 안정된 연구단 체제 안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울의 다른 쪽

연구자의 이동은 늘 저울질이다. 한쪽에는 연봉과 직위가, 다른 쪽에는 연구의 자유와 안정이 놓인다. 그리고 그 저울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흔들리고 있다. 네이처는 10월 29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를 가져가면 트럼프 행정부의 논란 많은 연구비 심사 계획을 멈추고 일부 연구비 조치를 제어할 수 있다는 분석 기사를 실었다. 연구비의 운명이 선거 결과에 달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 과학자들이 느끼는 불안의 크기를 보여 준다.
유럽도 평온하지 않다. 네이처는 하루 전, 유럽연구위원회(ERC)의 연구비에 지원자가 몰리면서 선정이 사실상 복권처럼 되어 간다는 문제를 다뤘다. 미국의 불안정이 연구자를 밀어내고, 유럽은 몰려드는 지원서를 감당하지 못하며, 중국은 적극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 사이에서 한국은 어떤 자리에 있는가.
나 역시 국경을 건너 일하는 연구자로서 이 저울이 얼마나 복잡한지 조금은 안다. 그래도 저울의 눈금을 읽는 법은 의외로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이 문제를 계속 붙들 수 있는가. 함께 일할 학생과 동료가 있는가. 실패해도 다음 연구를 이어 갈 수 있는가. 이 세 질문 앞에서 연봉의 숫자는 생각보다 가볍다. 물론 이것은 연구자마다 다르고, 생계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이 어떤 자리에 설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도 연봉 경쟁에 있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이 중국과 같은 규모로 돈을 쓰기는 어렵다. 그러나 연구자가 몇 년 동안 평가에 쫓기지 않고 한 문제에 매달릴 수 있는 시간, 장비와 공간을 함께 쓰는 문화, 행정이 연구를 방해하지 않는 제도는 돈보다 덜 들고 더 오래 남는다. 보로딘이 3년 만에 사이언스에 결과를 냈다는 사실보다, 그가 3년 동안 한 문제를 붙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나는 읽는다.
파리방의 이주자들

초파리유전학의 역사는 사실 이주자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컬럼비아대 모건의 파리방에는 미국 학생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러시아에서 온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1920년대 후반 모건의 연구실에 합류했고, 그 뒤 초파리 집단유전학으로 진화생물학의 현대적 종합에 큰 몫을 했다. 파리방은 좁은 방이었지만 세계의 젊은 연구자가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들이 그 방을 찾은 이유는 높은 연봉이 아니었다. 그 방에서는 돌연변이 계통이 공유되었고, 아이디어가 책상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으며, 누구든 좋은 질문을 들고 오면 함께 파리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개방성이 과학자를 끌어당기는 가장 강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열린 실험실은 그 자체로 인재 유치 정책이다.
오늘의 한국 과학 정책은 인재를 붙잡는 일을 자주 숫자로 이야기한다. 몇 명을 유치하고, 얼마를 지원하고, 몇 년 안에 성과를 내겠다는 식이다. 그러나 연구자가 실제로 묻는 것은 다르다. 여기서 내 질문을 오래 붙들 수 있는가. 여기서 다른 연구자들과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가. 그 두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실험실이 많아질 때, 연구하러 왔다는 말은 드문 기사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될 것이다.
오늘도 연구실에는 어딘가에서 온 파리 상자가 도착할 것이다. 파리는 자기가 어느 나라에 와 있는지 모른다. 다만 먹이가 있고 온도가 맞으면 알을 낳고, 다음 세대를 이어 간다. 과학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이 있으면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계단 위의 전자가 멀리까지 퍼져 결합을 만들듯, 한 연구자의 성과도 그를 둘러싼 넓은 표면이 만든다.
사람을 부르는 것은 돈이지만, 사람을 머물게 하는 것은 실험실이다.
보통 과학자
출처
- “연구할래” 독일 떠나 한국 온 물리학자, 기존 이론 뒤집었다. 머니투데이 (2026.10.30). https://www.mt.co.kr/tech/2026/10/30/2026102616404053202
- How the US mid-term elections could shake up science. Nature (2026.10.29). 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26-03479-0
- Is research funding now a lottery? Elite funder ERC swamped by applications. Nature (2026.10.28). 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26-03476-3
- 실험할 곳이 없다… 한국행 해외 연구자들 ‘낙동강 오리알’. 머니투데이 (2025.9.25). https://www.mt.co.kr/tech/2025/09/25/2025092419174926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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