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L;DR
- 뇌는 설계도대로 지어지지 않는다는 두 편의 에세이가 나란히 나왔다. 11월 2일 The Transmitter에 초파리 시각계 발생을 연구해 온 로빈 히징어와 이론신경과학자 일라 피에테가 각각 글을 실었다. 두 사람 모두 뇌 발달에서 유전자가 정하지 않는 부분, 곧 세포들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나는 ‘자기조직화’를 진지하게 보자고 말한다.
- 유전자는 재료와 몇 줄의 지시를 줄 뿐, 나머지는 과정이 만든다. 피에테는 게놈을 케이크 믹스의 레시피에 비유했고, 히징어는 그 비유조차 유전자에 너무 많은 공을 돌린다고 본다. 그가 드는 예는 초파리 눈의 광수용체 축삭이 약 15시간 동안 스스로 시트를 이루며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 초파리유전학자의 결론. 유전자를 찾는 일로 출발한 파리방의 전통은 강력했지만, 그 언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질서가 있다. 나는 유전학이 조금 겸손해질 때, 실험가와 이론가가 서로의 주방을 드나들 때 발생의 수수께끼가 더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파리 연구실의 학생들은 언젠가 한 번은 번데기를 해부해 그 안의 뇌를 들여다본다. 애벌레의 몸이 허물어지고 어른의 몸이 다시 지어지는 며칠 동안, 겹눈의 수많은 광수용체에서 뻗어 나온 축삭들은 뇌 속의 정해진 자리를 찾아간다. 누가 그 길을 알려 주는가. 교과서는 대개 유전자라고 답한다. 어떤 유전자를 망가뜨리면 길을 잃는 축삭이 생기고, 그 유전자의 이름이 곧 설명이 된다.
11월 2일 신경과학 매체 The Transmitter에 이 익숙한 답을 흔드는 에세이 두 편이 함께 실렸다. 한 편은 베를린자유대학의 로빈 히징어가, 다른 한 편은 MIT의 일라 피에테가 썼다. 한 사람은 초파리 시각계 발생을 오래 연구해 온 실험가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격자세포와 신경망을 다루는 이론가다. 출발점은 달라도 두 글은 같은 곳을 가리킨다. 뇌의 질서 가운데 상당 부분은 유전자에 적혀 있지 않고, 세포들이 서로 부딪치며 자라는 과정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유전학자인 나는 이 글들을 읽으며 조금 불편했고, 그래서 좋았다.
소용돌이처럼 생겨나는 질서

히징어가 먼저 꺼내는 예는 척추동물 망막의 자발적 파동이다. 광수용체가 아직 빛을 받지 못하는 발생 초기에, 망막신경절세포들은 바깥 자극 없이 스스로 전기 활동의 물결을 만들어 낸다. 물결은 무작위 방향으로 조직을 가로지르고, 그 결과 이웃한 세포들이 더 자주 함께 발화한다. 함께 발화하는 연결은 강해지고 멀리 떨어진 연결은 정리된다. 히징어에 따르면 이 현상은 1990년대에 실험으로 확인되었지만, 그보다 앞선 1970년대에 이론가들이 꽤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한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감각 경험 없이 생기는 이 파동은 본성과 양육의 이분법으로 보면 순수한 ‘본성’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파동은 유전적으로 부호화되어 있는가. 히징어의 답은 부호화라는 말을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파동은 게놈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그것은 세포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시간 속에서 펼쳐질 때 나타난다. 그는 이것을 물리화학의 소산 구조, 이를테면 소용돌이나 가열된 액체에 생기는 대류 무늬에 견준다.
히징어는 자기조직화가 그저 멋진 말이 되지 않으려면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간에 따라 되돌릴 수 없이 진행되는 과정이어야 하고, 개별 구성요소만 봐서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작동 방식이 상호작용에서 생겨나야 한다. 뇌 오가노이드가 저절로 자란다는 사실만으로는, 혹은 뇌 전체가 자기조직화된다는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덧붙인다. 설명이 되려면 그 과정이 무질서한 초기 연결을 어떻게 더 특정한 패턴으로 바꾸는지 보여 줘야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유전학자의 습관을 떠올렸다. 우리는 돌연변이를 만들고 표현형을 본다. 파동을 없애는 돌연변이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유전자가 파동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이다. 원인을 찾는 일과 설명을 완성하는 일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틈이 있다. 이것은 나의 해석이다.
레시피는 설계도가 아니다

피에테의 글은 케이크 믹스로 시작한다. 상자에 든 재료 목록에는 완성된 케이크의 식감도 향도 적혀 있지 않다. 그 성질은 물을 붓고 굽는 동안 단백질이 엉키고 전분이 굳고 표면이 갈색으로 변하면서 생긴다. 피에테는 뇌도 그렇다고 본다. 유전자는 재료와 몇 줄의 지시, 곧 무엇을 얼마나 어떤 순서로 섞을지를 정할 뿐이다. 이웃한 뇌 영역의 경계나 뉴런 한 쌍 한 쌍의 배선, 피질의 크기를 직접 적어 두지는 않는다.
그는 이 생각이 새롭지 않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20세기 중반 튜링과 폰 노이만은 단순한 국소 규칙의 반복만으로도 풍부한 구조가 생길 수 있음을 보였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분자유전학이 눈부시게 성공하면서 설명의 추는 유전자의 지시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피에테는 이제 그 추를 되돌릴 때라고 말한다. 유전자는 규칙을 정하고 손잡이를 돌리며, 나머지 대부분은 자기조직화가 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설계도형 설명의 대표로 초파리 배아의 비코이드 구배를 든다는 점이다. 앞뒤 축을 따라 농도가 달라지는 분자가 세포에게 위치를 알려 준다는 생각은 초파리 발생유전학이 세상에 남긴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피에테는 이런 방식과 튜링 패턴 같은 자기조직화 방식이 서로 장단점을 갖는다고 정리한다. 앞의 것은 몸 크기에 맞춰 늘어나지만 잡음에 약하고 많은 유전자가 필요하다. 뒤의 것은 견고하고 적은 유전자로 충분하지만 한 가지 척도의 무늬만 만든다. 그래서 질문은 ‘어느 쪽이 옳은가’가 아니라 ‘뇌의 어느 부분, 어느 시기에 어떤 방식이 쓰이는가’가 된다.
그가 덧붙인 진화 이야기는 특히 생물학자의 귀에 오래 남는다. 설계도라면 몸을 바꾸기 위해 여러 곳을 한꺼번에 고쳐야 한다. 레시피라면 손잡이 하나를 조금 돌리는 것만으로도 앞뒤가 맞는 전체의 변이가 생길 수 있다. 진화할 수 있는 체계는 조절할 수 있는 체계라는 그의 말은, 유전자가 모든 것을 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진화가 쉬워진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15시간의 파리 눈

히징어는 레시피라는 비유조차 유전자에 너무 많은 공을 돌린다고 본다. 재료뿐 아니라 단계와 순서까지도 발생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드는 예가 바로 초파리의 눈이다. 그의 에세이에 따르면 광수용체의 축삭들은 약 15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특정한 연결 패턴으로 다시 배열된다. 이때 축삭들은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신호, 혹은 정해진 화학 구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수천 개의 성장원추가 스스로 일시적인 시트를 이루는데, 이 구조는 재배열 전에도 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히징어는 이 장면을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공연장으로 걸어가는 관객에 빗댄다. 목적지가 먼저 있고 길잡이가 길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 사람들의 움직임 자체가 목적지를 만든다는 이야기다. 초파리 시각계는 유전학자들이 길잡이 분자를 찾아내며 가장 많은 성공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길잡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과정이 보고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 말이 유전자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성장원추가 서로를 알아보고 붙고 떨어지는 데에는 분명 유전자가 만든 단백질이 필요하다. 다만 그 단백질 목록을 다 모은다고 해서 15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이 저절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목록과 과정 사이에는 시간과 상호작용이라는, 유전자 지도에 그려지지 않는 차원이 있다. 이 구분은 내가 두 글을 읽고 정리한 해석이다.
두 주방 사이에서

히징어는 과학사가 이블린 폭스 켈러가 말한 ‘인식론적 문화’를 끌어온다. 분자신경과학은 특정 분자와 측정된 상호작용에서 설명을 찾고, 계산신경과학은 세포나 분자와 무관한 알고리즘에서 설명을 찾는다. 같은 뇌를 보면서도 무엇을 ‘설명’으로 인정하는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조직화가 두 문화가 함께 쓸 수 있는 설명의 범주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피에테의 글은 분자신경과학자와 계산신경과학자가 서로의 주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말로 끝난다.
나는 이 제안을 파리방의 전통과 함께 생각한다. 모건의 방은 유전자를 염색체 위의 위치로 읽는 언어를 만들어 냈고, 그 언어는 한 세기 동안 생물학을 이끌었다. 그 방의 힘은 돌연변이 계통과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나누는 공유의 문화에서 나왔다. 오늘 필요한 공유는 아마 계통을 넘어 설명의 방식을 나누는 일일 것이다. 실험가는 구배의 기울기나 상호작용의 폭 같은 ‘손잡이’를 재고, 이론가는 그 손잡이가 어떤 무늬를 만들지 예측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문제는 연구비 심사장에서도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분자 기전’을 밝혀야 좋은 연구라고 평가하고, 과정이나 동역학에 대한 설명은 아직 기전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취급한다. 같은 주에 메가저널 Scientific Reports가 미국 국립의학도서관의 재평가로 PubMed 색인이 멈췄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논문 수와 색인 여부가 연구의 가치를 대신하는 체제에서, 한 분야의 설명 습관을 바꾸는 느린 작업은 보상받기 어렵다. 이것은 두 소식을 엮은 나의 해석이다.
유전자는 생명의 모든 것을 적어 둔 설계도가 아니라, 몇 줄의 지시와 손잡이가 달린 레시피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레시피조차 다 적혀 있지 않을지 모른다. 이 생각은 유전학자를 작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더 정확하게 말하게 해 준다. 번데기 속에서 15시간 동안 길을 만드는 축삭들을 떠올리며, 나는 유전학이 조금 더 겸손해질 때 더 멀리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과학자
출처
- When is self-organization a mechanism in brain development? (P. Robin Hiesinger). The Transmitter (2026.11.02). https://www.thetransmitter.org/development/when-is-self-organization-a-mechanism-in-brain-development/
- The genome offers a recipe, not a blueprint, for the brain (Ila Fiete). The Transmitter (2026.11.02). https://www.thetransmitter.org/neurodevelopment/the-genome-offers-a-recipe-not-a-blueprint-for-the-brain/
- Scientific Reports on hold in PubMed while NLM reevaluates journal. Retraction Watch (2026.10.30). https://retractionwatch.com/2026/10/30/scientific-reports-pubmed-on-hold-national-library-medicine-eval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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